1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있는 건물 1층에서 고 정창희 할아버지의 큰아들과 이춘식 할아버지의 자녀들이 임재성 변호사와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 등과 함께 외교부의 제3자 변제 공탁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어렸을 때 기억으로 아버지(고 정창희 할아버지·미쓰비시중공업 히로시마 공장 피해자)가 계신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사무실엔 항상 경찰 정보계 형사들이 상주해 있었어요. ‘혹시 일본에 가서 허튼소리 하지 않을까’ 하는 (경찰의) 감시 속에서도 아버지는 꿋꿋이 투쟁하셨습니다.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에 사과와 보상을 받는 것이 아버지의 뜻인데, 그 권리를 소멸시키려는 공탁은 전면 무효입니다.”
11일 서울 종로구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앞에서 한 ‘제3자 변제 공탁에 대한 피해자 측 입장 발표 기자회견’에서 정 할아버지의 장남 정종건(66)씨는 이렇게 말했다. 정 할아버지는 미쓰비시 히로시마 공장에서 노역을 하다가 원폭 피해를 봤다. 정종건씨는 “정부가 대법원 판결을 제3자 변제라는 이상한 (방식으로) 우습게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회견에는 일본제철 강제동원 생존 피해자인 이춘식(99) 할아버지의 장남 이창환(67)씨와 이고운(64)씨도 참석했다. 이고운씨는 “일본에서 그렇게 고생을 많이 하고 오신 어르신들에 대해 우리나라는 이긴 재판을 무마시키면서 공탁을 건다”며 “외교부는 우리 아버지한텐 (공탁 관련) 전화 한 통화 없었다”고 말했다. 이창환씨도 “국가는 국민의 권리를 지켜줘야 한다. 대법원 판결로 우리가 (얻은) 권리를 정부는 끝까지 지켜주길 원한다”고 했다. 회견에는 피해자인 양금덕 할머니의 자녀도 함께할 예정이었지만 폭우 탓에 참석하지 못했다.
이들은 제3자 변제 해법 수용을 거부한 피해자와 가족을 대상으로 한 정부의 공탁 조처를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공탁이란 채권자와 합의가 이뤄지지 않을 때 채무자 쪽이 금전 등을 법원에 맡겨 채무를 면제받는 제도다. 대법원 배상 확정판결을 받은 강제징용 피해자와 유족 15명 가운데 11명은 제3자 변제 해법을 수용했지만, 이춘식 할아버지와 고 정창희 할아버지 유족 등 4명은 수용을 거부하고 있다. 정부는 미쓰비시중공업과 일본제철 등 일본 가해기업에 대한 강제동원 배상 문제를 마무리 지으려 이달 초 광주, 전주, 수원지법 등에 공탁서를 냈지만 법원은 피해자 쪽이 제3자 변제를 원하지 않는다며 ‘불수리’ 결정을 내렸다.
기자회견 뒤 피해자 가족들과 법률 대리인들은 심규선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이사장을 만나 20분 동안 면담했다. 이들은 심 이사장에게 ‘왜 정부가 공탁을 하려는 것인지, 공탁을 통해 2018년 대법원 판결을 통해 피해자들이 받은 채권을 소멸시키려고 하는 것인지’ 등을 물었지만, 심 이사장은 “여러분 뜻을 잘 알겠다”며 구체적인 답변은 하지 않았다.
장예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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