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현대 선수들이 6일 전주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23 K리그1 인천 유나이티드와 경기가 끝난 뒤 팬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선수들 뒤로 걸린 팬 걸개에는 “잼버리도 망치고 전북도 망치고”라는 글이 적혀있다.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축구는 한국에서 가장 정치적인 스포츠다. 월드컵 때면 많은 국민이 관심을 갖고, 대회 성적이 정권 지지에도 영향을 준다. 2002년에는 월드컵 4강 특수를 누린 대선 유력주자가 탄생할 정도였다. 애초 프로축구 탄생 배경에도 전두환 정권의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
시대가 달라졌다. 초기에는 정권이 톱다운 방식으로 만든 리그였지만, 이제는 그 속에 많은 이들의 삶이 숨 쉬고 있다. 올 시즌 K리그는 전반기에만 유료관중 117만명이 경기장을 찾았다. 역대 최고 수준이다. 이제 더는 필요에 따라 정치인들이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리그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달라진 시대에 정치권은 적응하지 못했다. 지난 6일 박보균 문화체육관광부과 김관영 전북도지사는 폭염으로 연기했던 2023 새만금 세계스카우트잼버리 K팝 공연이 11일 전주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다고 밝혔다. 이곳을 안방 경기장으로 쓰는 전북 현대는 날벼락을 맞았다. 9일 축구협회(FA)컵 인천 유나이티드전은 연기됐고, 12일 리그 수원 삼성전도 연기 위기에 놓였다.
축구팬은 분노했다. 더욱이 하루 뒤인 7일 조직위원회는 태풍을 이유로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으로 공연 장소를 바꿨다. 덕분에 12일 리그 경기는 그대로 치를 수 있지만, 이미 전주에 머물던 인천이 전주에서 떠나버린 터라 9일 경기는 기약 없는 연기에 들어갔다. 밀어붙이기식 행정이 아니었다면, 막을 수 있는 사태였다. 잼버리 파행-장소 결정-장소 번복. 자책골 해트트릭이다.
이용호 국민의힘 의원이 7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 페이스북 갈무리
정치인은 불난 데 기름을 부었다. 이용호 국민의힘 의원(전북 남원·임실·순창)은 7일 페이스북에 “잼버리대회 성공을 위해 온 국민이 나서서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 상황에서 개최 지역 주민은 어쩌면 ‘안방’이라도 내줘야 할 입장”이라며 “일부 축구 팬들이 이런 거부 반응을 보였다는 소식에, 전북 정치인으로서 부끄럽고 실망스럽다”고 썼다. 댓글창은 성난 목소리로 가득 찼다. 이 의원은 약 1시간 만에 게시글을 지웠다.
분노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번처럼 주목받지는 못했지만, 최근에는 부산 아이파크가 안방 경기장인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을 잇달아 내줬다. 5월27일 열린 K팝 드림콘서트, 8월3일 열린 파리 생제르맹(PSG) 친선전 때문이다. 당시에도 부산시는 엑스포 추진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지금도 그때도 국가적 대의를 위해서는 축구팬이 무조건 희생해야 한다는 식이었다.
황교안 당시 자유한국당 대표가 2019년 3월30일 창원축구센터에서 열린 경남FC와 대구FC의 경기에 당명이 적힌 붉은 점퍼를 입고 들어가 선거 유세를 하고 있다. 자유한국당 누리집 갈무리
‘정치권 축구 흑역사’는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강원FC는
김진태 강원도지사 취임 뒤 이영표 대표가 사실상 밀어내기를 당했다.
신상진 성남시장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관련 의혹을 이유로 성남FC 매각을 언급했고, 홍준표 대구시장은 2014년 경남도지사 시절 “경남FC 해체를 검토하겠다”고 했다. 2부리그 강등이 그 이유였다.
황교안 전 자유한국당 대표는 2019년 4·3 보궐선거 당시 만류에도 불구하고 경남FC 경기장에서 유세했고, 애꿎은 구단은 정치 행위 금지 규정을 어겼다는 이유로 벌금 2천만원을 냈다.
축구팬은 단순히 경기 취소 탓에 화가 난 것이 아니다. 그들 삶의 일부인 축구를 정치 도구쯤으로만 생각하는 정치권의 관습 때문이다. 잼버리대회 파행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참가자들의 꿈을 국위선양 도구쯤으로 취급했던 이들에게 향하듯 말이다.
이준희 기자
givenhapp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