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항저우아시안게임 여자농구 예선 C조 2차전에서 북한 로숙영(왼쪽) 과 한국 박지수가 공을 다투고 있다. 항저우/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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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때인 1950년 8월 김활란 전시내각 공보처장은 “조선일보의 ‘조선’이란 제호는 북이 쓰는 국호이니 이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두고 국무회의에서 격론이 벌어졌고, 이승만 대통령이 “조선일보는 일제 때부터 사용한 고유명사인데, ‘조선’이면 어떻고 ‘한국’이면 어떠냐”고 논란을 정리했다.
이런 논란이 벌어진 것은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이 남한의 국호로 확정되면서 북한의 국호(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들어간 ‘조선’은 금기어가 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정식국호는 ‘대한민국’이나 사용의 편의상 ‘대한’ 또는 ‘한국’이란 약칭을 쓸 수 있되, 북한 괴뢰정권과는 확연한 구별을 짓기 위하여 ‘조선’은 사용하지 못한다.”(1950년 1월 국무원 고시 제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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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9일 2022 항저우아시안게임 여자농구 예선 C조 2차전 남북 경기 뒤 기자회견장에서 한국 취재진이 “북한”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이에 통역을 맡았던 북한 선수단 관계자가 영어로 “우리는 북한(North Korea)이 아니다. 우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이다. 아시안게임에선 모든 나라에 정확한 이름을 불러야 한다”고 발끈했다.
남북한의 국호,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역사는 깊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때 뿌리를 둔 ‘우-대한, 좌-조선’ 구도가 100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대한민국의 ‘대한’은 ‘대한제국’에서 따왔다. 조선 고종은 1897년 10월 조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꿨다. 500년간 사용해온 조선이란 국호가 기자조선(箕子朝鮮)에서 나왔는데, 기자조선이 중국에 사대를 하고 책봉을 받던 왕조의 이름이라 주권을 가진 자주독립국의 이름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대한의 ‘한’은 삼국시대 이전에 한반도에 자리잡았던 마한, 진한, 변한 삼한(三韓)에서 나왔다.
1910년 8월29일 일본에 국권을 빼앗겨 대한제국이란 국가는 없어지고 일본에 속한 일개 지역인 조선으로 전락했다.
독립운동세력 중 우익 민족주의 세력은 대한민국을 선호했다. 조선은 중국에 사대하던 봉건왕조의 이름이자 일제 치하에서 격하된 일개 지역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대한은 자주독립과 근대적 국민국가를 지향하는 이름이었다.
1919년 4월 좌우익이 손을 잡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됐으나 임시정부의 방향을 두고 외교론(우익)과 무장투쟁론(좌익)으로 갈렸다. 1923년 좌익계열이 임시정부에서 나갔고, 이들은 국호로 ‘대한’이 아닌 ‘조선’을 선호했다.
공산주의자는 왜 봉건왕조와 일제가 사용하던 조선을 선호했을까. 이미 우익 민족주의자들이 대한이란 용어를 선점했고, 공산주의자들이 인민과의 친화성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당시 대중에게는 1392년 건국해 500년간 사용했던 조선이란 이름이 친숙했고 불과 13년간 존립했던 대한제국은 낯선 이름이었다.
2018년 2월18일 평창겨울철올림픽에 출전한 여자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선수들. 이들이 입은 경기복에는 ‘한반도기’와 ‘KOREA’라는 국호가 적혀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우-대한, 좌-조선’ㅍ구도는 분단 과정에서 굳어졌다. 해방 이후 우익은 ‘대한민국’, 좌익은 ‘조선인민공화국’을 통일독립국가의 예비 국호로 내세웠다.
우익은 국권 상실 당시 일본이 대한제국이란 독립국가의 국호를 폐기하고 격하된 식민지 지역명칭으로 조선을 공포한 사실을 들어, 자주독립의 기상을 표시하려면 대한민국이란 국호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좌익은 △조선은 단군 이래 4천년간 존재한 고유한 이름이나 대한은 이조 말엽 패망기에 잠깐 존재했던 이름이고 △대한민국은 봉건 이조 말기의 대한제국 이름을 약간 변형시켜 그대로 답습하려는 것이라 주장했다.
여운형, 김규식, 안재홍 등 중도파는 고려공화국을 국호로 내놓았다.
남한에서는 1948년 7월 제헌국회가 헌법을 제정하면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했다. 법학자 유진오가 짠 헌법 초안의 전문에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조선인민은…”으로 적혀있어, 국호를 조선으로, 국민 대신 인민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헌법기초위원회는 국호를 놓고 표결 결과 대한민국으로 결정했다. 이후 조선과 인민은 북한에서 쓴다는 이유로 남한에서 쓸 수 없는 단어가 됐다.
북한은 1948년 9월8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을 채택했다. 다음날인 9월9일 정부 수립을 선포하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국호가 됐다.
해방 이후 북한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조선인민공화국을 놓고 국호 논쟁이 벌어졌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이름이 너무 길고 국호에 민주주의와 인민을 함께 쓴 사례가 없어, 민주주의를 빼고 조선인민공화국으로 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당시 김일성은 민주주의를 빼자는 주장에 대해 “조국이 남북으로 갈라진 조건에서 혁명을 수행한다는 것을 무시한데서 나오는 매우 그릇된 주장”이라고 비판했다. 북한이 민주주의를 지키고 확산시켜야 하는 민주기지인데, 이런 국가 이름에서 민주주의를 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북한을 민주기지로 다진 다음 미국의 식민지인 남한을 해방시키겠다는 이른바 ‘민주기지론’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국호 논리에서는 한반도는 미국과 북한이 대결하는 공간이고, 남한은 존재감이 없는 미국의 괴뢰에 불과하다. 북한이 지난달 30일 열린 항저우 아시안게임 남북 여자축구 8강전 결과를 보도하면서 남한을 ‘괴뢰’로 표현한 것은 이런 오래된 인식의 반영이다.
△인용한 자료 ‘국호로 보는 분단의 역사’(강응천, 동녁)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