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전 대통령의 ‘문민정부’ 때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으로 임명돼 김 전 대통령의 발언을 듣고 있는 한승수 총리 지명자.(왼쪽 사진)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 때 외교통상부 장관으로 청와대에서 열린 통일·외교·안보 분야 장관 간담회에 참석한 한 총리 지명자.(가운데 사진)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때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위원장으로서 유치에 실패한 뒤 노 대통령의 위로를 받고 있는 한 총리 지명자. <한겨레> 자료사진
한승수 총리 지명
국보위 참여→노태우정부 상공장관→YS때 세계화 주창→외환위기 책임론→DJ때 ‘햇볕’ 전도→한나라 복당→참여정부 유엔특사
이명박 정부의 첫 국무총리로 지명받은 한승수 유엔 기후변화특사에겐 여러 전력 논란과 ‘양지만 좇는다’는 평이 따라붙는다. 정부 성격과 관계없이 잇따라 주요 관직을 역임한 탓에 ‘코드 행보’가 너무 심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인사 청문회가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코드 행보 외에도 △국보위 참여 경력 △경제부총리 시절 한보사태 및 외환위기 책임론 △소버린 사외이사 추천 등도 논란이 되고 있다.
참여연대 “또 국보위…시대착오 인사”
97년 경제부총리때 외환관리 ‘부실’
■ 코드·철새·무소신 행보=한 총리 지명자를 겪은 사람들의 공통적인 평가는 “온화하다” “무난하다” “남에게 싫은 소리를 안 한다” 등이다. 이는 한 지명자의 최대 강점이자 최대 약점이다. 또 한 지명자가 성격이 전혀 다른 여러 정부에서 빠짐없이 낙점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1988년 13대 의원(민정당)으로 정계에 입문한 한 지명자는 노태우 정부 실세였던 박철언 전 의원의 ‘월계수회’로 분류됐고, 상공부 장관을 지냈다. 그러나 3당 합당 이후 그는 노태우·박철언 쪽과 경쟁관계였던 김영삼 민자당 최고위원을 대통령 후보로 지지하는 추대위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어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주미 대사와 대통령 비서실장,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 등을 역임하며 ‘세계화’를 주창했다.
그러나 2000년 공천에서 탈락하자 한나라당을 탈당해 민국당 후보로 당선됐고, 이어 민주당·자민련·민국당의 정책 연대로 김대중 정부에서 외교통상부 장관을 역임했다. 이때 그는 ‘햇볕정책’의 전도사였다. 그러다 대선을 두 달 남겨둔 2002년 10월 “내 정치의 뿌리”를 찾겠다며 당시 햇볕정책을 강하게 반대했던 한나라당에 복당했다.
한 지명자는 이처럼 정권이 바뀔 때마다 요직을 차지했고, 대통령의 뜻에 자신의 색깔을 맞춰 ‘양지 30년, 무소신 30년’이라는 지적도 받는다. 한 지명자는 이에 대해, 28일 총리 지명 기자회견에서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정부에 들어가 국가 이익을 위해 노력했다”고 항변했다.
■ 국보위 전력=한 총리 지명자는 1980년 전두환 정권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에서 활동한 바 있다. 이경숙 인수위원장의 국보위 입법회의 전력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참여연대는 논평을 통해 “또 국보위인가, 시대착오적인 인사”라고 비판했다.
한 지명자의 국보위 전력은 1995년 청와대 비서실장 때 처음 문제가 됐고, 당시 그는 이로 인해 사표를 냈으나 김영삼 대통령은 반려했다. 2000년, 2004년 총선연대가 발표한 ‘낙선 대상자’ ‘공천 철회 대상자’에 잇따라 오른 이유도 ‘국보위 전력’ 탓이 크다.
이와 관련해 한 지명자는 이날 회견에서 “80년 -3.9%의 성장률로 60년대 이후 처음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서울대 교수로 재직할 당시 국보위 재무분과를 담당해 일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학자적 양심으로 안 갈 수도 있었으나 국가가 우선이라는 생각에 가서 국가 위기를 풀려고 했다. 국보위 입법회의가 만들어진 뒤에는 학교로 돌아가 5공화국 7년간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고 적극 해명했다.
■ 경제부총리 시절 공과=96년 8월부터 97년 3월까지 경제부총리(재정경제원 장관 겸임)로 일했을 당시의 업적도 논란 거리다. 이른바 ‘정리해고법’으로도 불려지는 96년 말의 노동법 개악 과정과 97년 초의 한보철강 부도 사태 등이 모두 그의 재임 시절에 일어난 일이다. 한보철강 부실 사태는 60여개 금융기관에 5조7천억원의 피해를 입혔을 뿐 아니라, 그해 말 닥친 외환위기의 첫 출발이라는 성격이 짙다. 이를 두고 손낙구 민주노동당 대변인은 “97년 말 외환위기의 직간접적인 원인 제공자이자 책임자”라고 비판했다.
한 지명자를 노동법 개악이나 한보철강 부실 사태, 그리고 이어지는 외환위기와 곧바로 연결지어 책임을 묻는 건 다소 무리가 따르기도 한다. 하지만 경제부총리로서 제구실을 다하지 못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한 학계 인사는 “97년 초에는 이미 외환위기 가능성이 경제계를 중심으로 널리 퍼진 상태였다”며 “당시엔 금융감독 기능이 전혀 체계화되지 않은 때라 경제부총리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했는데도 외환 쪽이나 거시관리 등 위기관리를 한 게 없다”고 말했다.
■ 소버린 사외이사 논란=2003년 미국계 펀드 소버린이 에스케이와 경영권 분쟁을 벌일 당시 소버린의 추천으로 현직 의원 신분으로 사외이사를 맡은 일을 놓고도 말들이 많다. 특히 한 지명자는 16대 국회의원을 끝으로 정계를 떠난 뒤인 2004년부터는 투기자본인 론스타의 법률 자문을 맡고 있는 김앤장 고문으로 활동했다. 국내기업 사냥에 나서는 외국계 펀드의 이해를 앞장서 대변한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운 셈이다. 이에 대해 인수·합병 분야의 한 관계자는 “그의 경력 및 네트워크 능력과 외국계 펀드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측면이 있을 것”이라며 “그가 적극적으로 의사결정 과정에 개입한 적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권태호 최우성 기자 ho@hani.co.kr
97년 경제부총리때 외환관리 ‘부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과 한승수 총리 지명자가 28일 오전 서울 삼청동 인수위원회에서 기자회견을 마친 뒤 기자들과 인사를 하려고 다가서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한승수 총리 지명자 역대 정권별 주요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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