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공소시효’ 만료일이었던 1988년 10월18일 정의구현사제단 주최로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최종길 교수 추모 미사에 참석한 유족들. 앞줄 왼쪽부터 최종숙(큰누님)·최광준(아들)·백경자(부인)·최희정(딸), 뒷줄 왼쪽 셋째부터 필자(김정남)·최종선(막내동생). 이날 검찰은 ‘증거 없다’며 사건 고발을 기각했으나 유족들과 필자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진상규명 운동에 나섰다.
김정남의 ‘증언, 박정희 시대’ ② ‘의문사 1호’ 최종길 서울대 교수 <하>
1973년 10월 그때 최종길 교수의 막내 동생 종선은 마침 중앙정보부 감찰실에 근무하고 있었다. 한 해 전에 그는 중앙정보부 정규과정 제9기에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73년 10월13일 오전 11시께 그는 총무국에 근무하는 동료로부터 5국에서 동베를린 사건 비슷한 수사를 벌이고 있는데, 북한 공작원 이재원과 중학교 동창생인 최 교수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다. 사무실로 돌아온 그는 직속 상관인 과장에게 직원 신상 문제로 정식 보고하고 형이 혹시 조사받게 된다면 비인격적인 대우가 없도록 노력해줄 것을 요청했다.
중정직원-간첩누명 ‘형제 잔혹사’
“이참에 동생 직장이나 보세요”
“허허, 남산엘 다 와보는구나”
사흘뒤 주검 치운채 투신 통보 진실 은폐 어떻게 했나
중정은 최종길의 동생 불러
“형이 조국배반” 각서받아
재수사 검찰 “적당히 덮죠” 30년만에 누명 벗어
의문사규명위, 타살 밝혔지만
당시 수사관들 여전히 침묵
어떻게 숨졌는지 미궁인 채로 ■ 형과 함께 정보부로…그리고 마지막 같은 날 오후 3시, 최종선은 5국의 담당 수사관을 만나 같은 요청을 했다. 그 수사관은 “이미 실질적인 조사는 종결되어서 최종적인 기자회견 발표문을 쓰고 있으니 신경 안 써도 된다”며 안심시키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 그는 둘째형, 최 교수에게 가서 정보부 안에서 있었던 일을 말씀드리고, 혹시 수사협조 요청이 있을 땐 너무 불쾌하게 생각하지 말고 최선의 협조를 다해 달라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아무쪼록 교수회의 등에서 말씀을 자제해줄 것도 조심스럽게 요청했다. 최 교수는 “어쨌든 그놈(이재원)이 빨갱이가 된 것이 사실이라면 딱하게 되었구나” 하면서, 그 일 때문이라면 국민의 한 사람으로 협조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느냐며 흔쾌히 수사협조 요청에 응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형제는 오랜만에 술도 한잔씩 마셨다.
10월16일 오후 1시45분, 최종선과 그의 형 최종길 교수는 아스토리아호텔 지하다방에서 만나 차를 한잔씩 마시고, 중앙정보부 남산청사 정문에 도착해서는 담당과에 연락해 최 교수가 왔음을 알렸다. 담당과의 직원이 나와 최 교수를 안내하기 위한 절차를 밟았다. “형님, 이 못난 동생의 직장을 이때 한번 봐 주십시오” 동생은 말했고, 형은 “허허! 말로만 듣던 남산에를 다 들어와 보게 되었구나” 하면서 웃으며 헤어졌다. 이것이 그들 형제의 이승에서의 마지막이었다. 형은 다음날에도, 그다음날에도 나오지 못했다. 10월19일 새벽 5시, 최종선은 중앙정보부 당직실로부터 7시까지 청사로 들어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아주 불길한 예감을 안고 들어간 그는 형이 10월19일 새벽 1시30분께 7층 화장실 창문에서 뛰어내려 사망했다는 사실을 통보받았다. 이미 주검은 어디론가 치워진 뒤였다. 그는 기회를 틈타 투신했다는 그 현장으로 달려갔다. 거기에는 유혈이나 물로 닦아낸 흔적 같은 것도 없었다. 그는 형이 투신한 것도, 자살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그 자리에서 확신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달려가 호소할 곳이 아무 데도 없었다. 최 교수의 죽음 이후 가족으로서 최종선이 중앙정보부에 가장 먼저 요구한 것은 최 교수의 명예였다. 최종선은, 형의 죽음에 반역자로의 누명을 조작해 발표함으로써 형의 명예를 더럽히지 말 것을 요구했다. 중앙정보부는 이 요구를 역으로 이용해 각서를 요구했다. 그들이 작성한 각서의 내용은 각서가 아니라 탄원서였다. “존경하는 중앙정보부장님, 비록 조국을 배반하고 양심의 가책을 못 이겨 결국은 자기의 생명을 끊은 최종길이 한없이 밉고 원망스러우나…그 죄상이 신문에 보도되지 않고 호적에 기재되지 않는 등 사상적 제한이 없이 자손들이 밝게 살아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 공소시효 앞두고 양심선언
최종선의 양심선언은 내가 88년 10월 <평화신문>에 처음으로 공개했다. 그때만 해도 이 양심선언이 실린 신문이 제대로 나올 수 있을까, 조마조마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나는 이때 최종선을 처음 만났다.
이는 ‘양심선언’이란 말이 아직 나오기 전에 쓰인 것이지만, 양심선언이라 이름하여 마땅할 만큼 비장한, 그가 보고 느낀 자신의 진실을 그대로 담고 있다. 최 교수를 중앙정보부로 안내하기까지의 과정, 형님이 아직 조사받고 있다는 데서 오는 불안과 초조, 형의 죽음을 통보받았을 때의 그 낭패감과 분노, 그리고 최 교수의 죽음을 자살로, 간첩으로 몰아가는 일련의 과정을 시간대별로 재생해 내고 있다.
최종선의 수기는 중앙정보부의 은폐조작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최 교수가 간첩임을 자백하고 나서 양심의 가책을 못 이겨 (이러한 자살동기도 수시로 바뀐다) 투신자살한 것이 아니라, 그들에 의해 고문치사되었기 때문에 자살과 간첩으로 은폐·조작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또 자신이 그 안에서 확인한 사실들을 증거로 낱낱이 기록하면서, “광준! 희정! … 최 교수의 자식답게 눈을 똑바로 뜨고 당당히 세상을 보며 살아가거라”라는 말로 이 수기를 끝맺고 있다.
그의 수기는 74년 겨울 최종선과 박기용씨를 통해 함세웅 신부에게 전달되어, 상당한 기간 동안 수녀원 등에 깊이깊이 보관되어 있다가 최 교수 사건 공소시효를 며칠 앞두고 공개된 것이다. 이 양심선언을 바탕으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최종길 교수의 죽음은 그를 간첩으로 만들기 위한 혹심한 고문수사 과정에서 빚어진 폭압적 권력에 의한 살인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며 서울지방검찰청에 재수사를 공개적으로 요청하였다. 또한 관련자 명단도 적시하였다.
검찰은 사건의 진상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고조되자 이 사건의 재수사에 착수하였으나, 그 수사는 수박 겉핥기 식으로 성의 없이 진행되었다. 검찰에 출두한 최종선을 정보부쪽 사람으로 착각한 검사가 “수고 많으십니다. 적당히 덮어버리는 거지요, 뭐!”라고 말했다가 최종선의 거센 항의를 받은 일도 있었다. 검찰은 “최 교수가 간첩이라는 증거도, 자살했다는 증거도 찾지 못했다”는 발표로 수사를 종결했다.
그러나 이때의 수사기록은 2002년의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에 많은 참고가 되었으며, 그 밑바탕에는 최종선의 양심선언이 있었다. 최종선은 그 이후에도 공식적인 진술과 자신의 한 맺힌 저술 <산 자여 말하라>(2001·공동선)에서 이 사건에 대해 피눈물로 증언하고 있다.
■ 대를 이은 진상규명 노력
98년 10월 ‘최종길 교수를 추모하는 모임’에 이어 ‘최종길 교수 고문치사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추진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이 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학술심포지엄(‘의문사문제 해결을 위한 법적 모색’), 자료집 발간, 추모식과 추모제, 추모 문집 발간(2002·공동선) 등의 일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2001년에는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공식으로 진정하기에 이른다. 이 모든 일의 중심에는 이제 최 교수의 아들, 최광준 교수가 있었다.
최광준 교수와 최 교수 제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 2002년 5월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최광준 외 347명의 진정에 대하여, ‘① 최종길 교수는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로 인하여 사망하였다고 인정한다 ② 이 사건에 관하여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 최종길 교수 및 그 유족에 대한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를 요청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는 그동안 중앙정보부 관계자 182명을 조사한 결과와 7천여쪽에 이르는 수사기록을 통하여 얻은 최종결론이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최 교수와 조작 기도된 수사에 자백하지 아니하여 권력의 의도를 달성하지 못하게 한 최 교수의 행동은 권위주의 통치에 항거, 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죽음으로 인정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하면서 당시 중앙정보부의 발표가 허위로 날조된 것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즉, 73년 최 교수 사망사건 당시 최 교수가 간첩임을 자백한 사실이 없으며, 수사관들이 최 교수를 고문한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고문한 사실을 은폐하고, 마치 최 교수가 간첩임을 자백하고 조직을 보호할 목적으로 투신자살한 것으로 자살 동기를 조작하였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최 교수를 간첩 혐의 때문에 수사한 것이 아니라, 공작의 일환으로 조사에 착수했음에도 최 교수의 사후에 현장검증조서, 긴급구속장, 압수조서, 피의자 신문조서(여기에 간첩으로 조작한 내용이 담겨 있다), 신문보도안 등 허위문서를 만들어 이 사건이 간첩사건의 수사과정에서 발생한 우발적인 사고인 것처럼 은폐·조작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체적인 상황을 종합하여 판단한다면 최 교수는 타살된 것이 분명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다.
■ 여전히 감추어진 진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중앙정보부란 국가기관이 위에서 아래까지 공모하여 사람을 고문하여 죽여놓고 그것을 자살로 은폐하고, 엉뚱하게 간첩으로 조작한 가증스러운 범죄행위를 밝혀냈다. 이렇게 하여 최 교수가 간첩이라는 누명은 벗었다. 그것을 밝혀내는 데 30년이 걸렸다. 또 타살되었다는 것까지는 밝혀냈지만 그러나 그가 어떻게 죽어갔는지는 여전히 미궁으로 남아 있다. 사망 당시의 수사관들이 진실을 밝히는 것을 의도적으로 회피하거나 진술을 번복, 거짓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바라는 것은 오직 진실이다. 진실이 없이는 어떤 위로의 표현도, 용서의 기도도, 영혼의 안식도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진실만이 과거를 편히 잠들게 할 수 있다. 차철권·김상원 수사관을 비롯하여 관련자 모든 사람들에게 ‘산 자여 말하라’고 거듭 간절히 말하고 싶다. 감추인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2003년 10월 최 교수의 30주기를 맞아 서울대 법대 근대법학100주년기념관의 소강당은 ‘최종길홀’로 헌정됐다. 그 들머리에 설치한 부조의 헌사를 부끄럽게도 내가 썼다.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수석
“이참에 동생 직장이나 보세요”
“허허, 남산엘 다 와보는구나”
사흘뒤 주검 치운채 투신 통보 진실 은폐 어떻게 했나
중정은 최종길의 동생 불러
“형이 조국배반” 각서받아
재수사 검찰 “적당히 덮죠” 30년만에 누명 벗어
의문사규명위, 타살 밝혔지만
당시 수사관들 여전히 침묵
어떻게 숨졌는지 미궁인 채로 ■ 형과 함께 정보부로…그리고 마지막 같은 날 오후 3시, 최종선은 5국의 담당 수사관을 만나 같은 요청을 했다. 그 수사관은 “이미 실질적인 조사는 종결되어서 최종적인 기자회견 발표문을 쓰고 있으니 신경 안 써도 된다”며 안심시키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 그는 둘째형, 최 교수에게 가서 정보부 안에서 있었던 일을 말씀드리고, 혹시 수사협조 요청이 있을 땐 너무 불쾌하게 생각하지 말고 최선의 협조를 다해 달라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아무쪼록 교수회의 등에서 말씀을 자제해줄 것도 조심스럽게 요청했다. 최 교수는 “어쨌든 그놈(이재원)이 빨갱이가 된 것이 사실이라면 딱하게 되었구나” 하면서, 그 일 때문이라면 국민의 한 사람으로 협조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느냐며 흔쾌히 수사협조 요청에 응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형제는 오랜만에 술도 한잔씩 마셨다.
10월16일 오후 1시45분, 최종선과 그의 형 최종길 교수는 아스토리아호텔 지하다방에서 만나 차를 한잔씩 마시고, 중앙정보부 남산청사 정문에 도착해서는 담당과에 연락해 최 교수가 왔음을 알렸다. 담당과의 직원이 나와 최 교수를 안내하기 위한 절차를 밟았다. “형님, 이 못난 동생의 직장을 이때 한번 봐 주십시오” 동생은 말했고, 형은 “허허! 말로만 듣던 남산에를 다 들어와 보게 되었구나” 하면서 웃으며 헤어졌다. 이것이 그들 형제의 이승에서의 마지막이었다. 형은 다음날에도, 그다음날에도 나오지 못했다. 10월19일 새벽 5시, 최종선은 중앙정보부 당직실로부터 7시까지 청사로 들어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아주 불길한 예감을 안고 들어간 그는 형이 10월19일 새벽 1시30분께 7층 화장실 창문에서 뛰어내려 사망했다는 사실을 통보받았다. 이미 주검은 어디론가 치워진 뒤였다. 그는 기회를 틈타 투신했다는 그 현장으로 달려갔다. 거기에는 유혈이나 물로 닦아낸 흔적 같은 것도 없었다. 그는 형이 투신한 것도, 자살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그 자리에서 확신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달려가 호소할 곳이 아무 데도 없었다. 최 교수의 죽음 이후 가족으로서 최종선이 중앙정보부에 가장 먼저 요구한 것은 최 교수의 명예였다. 최종선은, 형의 죽음에 반역자로의 누명을 조작해 발표함으로써 형의 명예를 더럽히지 말 것을 요구했다. 중앙정보부는 이 요구를 역으로 이용해 각서를 요구했다. 그들이 작성한 각서의 내용은 각서가 아니라 탄원서였다. “존경하는 중앙정보부장님, 비록 조국을 배반하고 양심의 가책을 못 이겨 결국은 자기의 생명을 끊은 최종길이 한없이 밉고 원망스러우나…그 죄상이 신문에 보도되지 않고 호적에 기재되지 않는 등 사상적 제한이 없이 자손들이 밝게 살아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1988년 10월16일치 <평화신문>에 처음 공개된 최종선씨의 수기 원본. 74년 12월 ‘최종길 교수 고문사’를 처음 폭로한 명동성당 추모미사 직후 사제단에 맡긴 이 수기 원본은 14년간 수녀들이 보관했다.(위 사진) 2003년 10월17일 최 교수 30주기를 맞아 ‘최종길 교수 기념홀’로 헌정된 서울대 법대 근대법학100주년기념관 1층 소강당 들머리에 세운 기념 부조. 필자가 쓴 헌정사가 적혀 있다.(아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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