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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전태일평전·광주항쟁…그가 세계로 알렸다

등록 2012-02-27 20:43수정 2012-02-28 10:58

1974년 7월6일 도쿄의 일본 가톨릭 대주교관에서 지학순 주교(오른쪽)와 함께한 송영순 바오로. 바로 이날 하네다공항을 통해 귀국한 지 주교는 김포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민청학련 배후’로 몰려 정체불명의 기관원들에게 끌려갔다.
1974년 7월6일 도쿄의 일본 가톨릭 대주교관에서 지학순 주교(오른쪽)와 함께한 송영순 바오로. 바로 이날 하네다공항을 통해 귀국한 지 주교는 김포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민청학련 배후’로 몰려 정체불명의 기관원들에게 끌려갔다.
김정남의 ‘증언, 박정희 시대’
⑭ 마지막회-재일동포 송영순
갑작스런 죽음
한국쪽에서 제대로
감사뜻 전하지도 못했는데
2004년 여름 평창동 원룸서
홀로 세상을 떠났다

날로 궁핍한 생활
전기공학도 한·일서 사업
한국에 돌아올 길 막혀
회사투자금 회수 못하고
6·29선언 뒤에야 귀국길

보이지 않는 헌신
때론 ‘세카이’를 통해서
때론 회견으로 자료집으로
인혁당·김지하·오원춘 사건
미문화원 방화 등 알려

1983년 8월15일 광복절 38돌에 김대중과 김영삼은 이른바 ‘8·15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그것은 김영삼의 23일에 걸친 단식투쟁으로 비롯된 양김 연대투쟁의 결실로 ‘워싱턴에서 김대중-서울에서 김영삼’의 이름으로 동시에 발표됐다.

이 성명은 민주화 투쟁이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한 투쟁의 연장선 위에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민주투쟁 승리의 날에 우리는 민주투쟁에서 숨지거나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진 사람들을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애국선열의 반열에 올려놓아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이룩될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고, 싸우다 죽어간 모든 사람들의 피나는 고통 위에서 이룩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내가 특히 이 구절을 기억하는 것은 그 초안을 내가 썼기 때문이다.

30여년에 걸친 이 땅의 민주화 투쟁에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민족의 독립운동에 못지않은 희생과 고난의 역정이 있었다. 그 이면에는 나라 안팎에서 보이지 않는 헌신들이 있었다. 그러나 민주화의 이름으로, 민주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그들의 헌신과 희생에 걸맞은 예우를 갖추지는 못하고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민주화가 이룩된 과정에도 그 원인이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양김의 ‘8·15 공동성명’은 빈말이 되고 말았다. 저마다 내 명예회복과 내 몫의 보상에 관심을 두는 사이 진정한 유공자들이 한분 한분 세상을 떠나고 있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재일동포 송영순(1930~2004) 선생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지학순 주교와의 만남과 김지하 구명운동

1970년대 후반 일본을 방문한 김수환 추기경(가운데)과 함께한 송영순-김애자씨 부부. 김애자씨는 김 추기경 형님의 딸로, 여동생은 수녀, 남동생은 신부일 정도로 독실한 가톨릭 집안이다. 당시 송영순씨는 주로 명동의 가톨릭여학생관을 통해서 김 추기경과 긴밀한 소통을 했다.
1970년대 후반 일본을 방문한 김수환 추기경(가운데)과 함께한 송영순-김애자씨 부부. 김애자씨는 김 추기경 형님의 딸로, 여동생은 수녀, 남동생은 신부일 정도로 독실한 가톨릭 집안이다. 당시 송영순씨는 주로 명동의 가톨릭여학생관을 통해서 김 추기경과 긴밀한 소통을 했다.
1974년 7월 박정희 유신정권에 의한 천주교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의 구속은 재일동포 송영순의 삶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그것은 전기공학도이자 사업가였던 그가 민주화 투쟁에 투신하는 계기였다. 이보다 앞서 71년 10월5일에 있었던 원주교구의 부정부패 추방시위를 통해 그는 지 주교의 열렬한 지지자가 됐다. 그는 사업 경험을 통해 한국 사회가 얼마나 부정부패에 깊이 절어 있었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때부터 그는 지 주교가 국외 출장길에 일본에 들를 때면 몸을 아끼지 않고 편의를 도왔다.


그해 7월6일 하네다공항에서 귀국하는 지 주교를 배웅한 그는 김포공항에서 지 주교가 구속되자마자 구명운동에 온몸으로 뛰어들었다. 당시 가톨릭주교회의 의장이었던 시라야나기 세이이치 대주교는 송영순에게 한국 천주교회와 일본 가톨릭 사이의 연락을 책임지는 일본 가톨릭정의평화협의회 간사 일을 맡겼다. 이로부터 그는 지 주교 구명운동 등 가톨릭 차원의 교류와 협력은 물론 그것을 뛰어넘어 한국 민주화운동의 대일 창구 노릇을 자임했다.

75년 8월4일 김지하의 양심선언을 일본어와 영어로 번역해 일본 가톨릭정의평화협의회의 이름으로 발표한 것이 바로 그였다. 그는 그때 양심선언의 추신 형식으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신부들에게 보낸 육필 편지도 공개했다. 양심선언 발표는 김지하 구명운동이 일본은 물론 전세계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송영순은 이후 김지하의 재판 과정을 정리해 그때마다 일본 언론에 공개하고, 김지하의 미발표 작품을 번역·발표함으로써 일본에서 김지하 구명운동의 불길이 꺼지지 않도록 했다. 이렇게 70년대 내내 일본에서 ‘김지하를 구원하는 모임’과 그것을 확대·발전시킨 ‘김지하 구원 국제위원회’ 등의 활동을 밑받침했다.

76년 8월26일에는 유신정권이 문제삼고 있던 김지하의 ‘옥중 메모’ 전문을 공개했다. 단편적으로만 알려졌던 옥중 메모를 구명운동 차원에서 일본에서 공개한 것이다. 78년 4월에는 이색적인 ‘김지하 석방하라! 연속 심포지엄’을 주도했다. 이 심포지엄에서는 김지하의 석방은 물론 ‘죄없는 재일동포 사형수 진두현·최철교·강우규·백옥광·강종헌씨’ 등을 석방할 것을 참석자 전원의 이름으로 요구해 한국 민주화운동과 일본 시민운동의 연대를 이룩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75년 10월 그는 일본 가톨릭정의평화협의회에서 발표한 김지하의 양심선언 전문과 ‘오적’, ‘비어’ 등을 묶어 김지하의 작품집 <불귀>를 한국어로 펴내 전세계에 배포했다. 79년 8월에는 <김지하는 누구인가>(부제: 그 옥중투쟁의 기록)를 역시 한국어로 펴냈다. 그동안 김지하의 재판과 관련해서 한국에서 일본으로 보낸 자료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편집한 것이었다. 이 책의 발문은 시라야나기 대주교가 썼다.

“김지하 시인은 바야흐로 우리들의 시인이라고 말해도 결코 과언은 아닙니다. … 그는 우리들 자신의 분신이며 우리들 속에 내재하는 정의와 양심을 최전선에서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들이 그의 법정투쟁 기록을 출판한다는 것은 그와 우리들이 하나라는 사실을 스스로 확인하는 작업의 일환입니다.”

‘한국으로부터 온 통신’

2002년 8월20일 군사독재 시절 국외에서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원로들을 청와대로 초청한 자리에서 김대중 대통령 내외와 인사를 나누고 있는 송영순씨. 2004년 돌연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자신의 민주화 공로를 스스로 내세운 적도, 어떠한 보상을 받은 적도 없었다.
2002년 8월20일 군사독재 시절 국외에서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원로들을 청와대로 초청한 자리에서 김대중 대통령 내외와 인사를 나누고 있는 송영순씨. 2004년 돌연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자신의 민주화 공로를 스스로 내세운 적도, 어떠한 보상을 받은 적도 없었다.
송영순은 김지하 사건 이외에도 인혁당 사건, 시노트 신부 강제추방 사건, 원주선언과 3·1 민주구국선언 사건, ‘10장의 역사연구’ 필화사건, 동일방직 사건, 7·7 사태, 오원춘 사건, 와이에이치(YH)무역 사건, 부마 민주항쟁, 10·26 박정희 살해사건, 5·18 광주민주화운동, 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등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자료를 취합·정리·번역해 일본의 교회와 사회는 물론 전세계로 ‘한국으로부터의 민주화 투쟁 소식’을 발신했다.

그에게 전달된 민주화운동 자료는 어떤 것은 <세카이>(세계)에 티케이(TK)생의 이름으로 ‘한국으로부터 온 통신’에 실리고, 어떤 것은 기자회견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좀더 중요한 자료들은 일본 가톨릭정의평화협의회에서 자료집으로 제작해 배포했다. 한국에서 건너간 원 자료와 일본어로 번역·제작된 자료집은 그대로 한국 민주화운동의 귀중한 자료로 남아 있다.

송영순은 스스로 전세계를 향해 배포할 지도를 면밀하게 작성하고 자신이 수집·번역한 자료들을 그때마다 우편 또는 인편으로 송부했다.

76년 4월 한국에서 김명식의 ‘10장의 역사연구’ 필화사건이 터졌지만, 민주화운동 진영조차도 그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내가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10장의 역사연구’ 전문을 송영순에게 보냈더니 <세카이> 10월호에 전재되었다. 그때 이 시를 해설한 사람이 와다 하루키 도쿄대 교수였다.

와다 교수는 한국에서 보내는 자료를 ‘한국 지하문서’라는 말로 표현했는데, 그는 김지하 구명 관련 자료를 구하려고 송영순과 인연을 맺기 시작해 80년대 이후에는 번역을 도맡는 협력자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수배중의 조영래가 쓴 <전태일 평전>이 78년 일본에서 먼저 출판되고 또 <어머니>라는 제목의 영화로 제작될 수 있게 한 것도 송영순이었다. 79년 10·26 사태 때 김재규의 육성녹음을 전세계에 전파한 것도, 광주항쟁의 그 사진과 기록을 세계로 발신한 것도 그였다.

송영순의 업적 가운데 가장 큰 하나는 83년 미국에서 출판된 세 권짜리 영문자료집 <양심선언-한국 가톨릭교회와 인권>이라 할 수 있다. 나중에 두 권이 더 보태져 다섯 권으로 된 이 책은 ‘일본 가톨릭정의평화협의회 편, 송영순 책임 편집’으로 나왔다. 이 자료집은 가톨릭은 물론 한국 민주화운동의 주요 내용과 과정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 한국 민주화운동의 영문 자료집으로는 유일한, 사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은 책이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죽음

1983년 미국 메리놀선교회에서 출간한 영문 자료집 <양심선언-한국 가톨릭교회와 인권>. 송영순씨가 책임편집을 맡은 모두 5권짜리 자료집으로, 한국 민주화운동에 관한 거의 유일한 영문 기록이다.
1983년 미국 메리놀선교회에서 출간한 영문 자료집 <양심선언-한국 가톨릭교회와 인권>. 송영순씨가 책임편집을 맡은 모두 5권짜리 자료집으로, 한국 민주화운동에 관한 거의 유일한 영문 기록이다.
송영순은 해방 이듬해인 46년 일본에 유학중이던 형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형은 학병으로 끌려가 오키나와에 출병한 뒤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형은 거기서 전사했던 것이다. 송영순은 고학으로 리쓰메이칸대학과 메이지대학원을 마치는데 전공은 전기공학이었다. 기술로 조국에 기여해 보겠다는 일념으로 그는 60년 재일한국인산업기술연구회를 만들어 그 부회장이 되었다.

65년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지자 그는 귀국해 신한애자주식회사를 만들어 사업을 벌였다. 그것은 한국의 전력개발에 필요한 고압애자를 생산하는 회사였다. 그러나 일본 기업의 방해와 한-일간의 정경유착과 정치부패 때문에 기술자 출신인 그의 사업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70년 그의 사업은 끝내 남의 손으로 넘어갔고, 그에게는 회사에 조달한 그와 주변의 빚만 남겨졌다.

학업을 마칠 무렵 그는 김수환 추기경의 조카딸과 혼담이 이루어졌는데 그때 결혼 조건은 가톨릭 영세를 받는 것이었다. 그는 73년의 8·3 조치 때 그와 그의 주변이 회사에 빌려준 2억원 가까운 액수를 신고했다. 10년 동안 이자를 동결하고 10년 뒤 원금을 반환케 한다는 것이 ‘8·3 긴급조치’의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는 10년 뒤 신고한 금액을 찾기 위해 한국에 돌아올 수 없었다. 그때는 이미 그의 일본에서의 민주화 활동이 한국의 정보기관에 알려졌기 때문에, 그가 한국에 돌아온다는 것은 제 발로 감옥으로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때문에 김 추기경도 지 주교도 그의 귀국을 반대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그는 그때 2억원의 거금을 고스란히 한국 정부에 떼여야 했다. 그뿐만 아니라 생업조차 없어져 그의 생활은 날로 궁핍해져 갔다.

편지로만 주고받고, 자료만 서로 교환했던 그를 처음 만난 것은 87년 이른바 ‘6·29 선언’이 있고 난 한참 뒤였다. 아마도 명동의 가톨릭여학생관(지금의 전진상교육관)이었을 것이다. 오는 편지, 가는 편지 등 모든 수발을 다 들어주었던 콜레트 누아르 수녀, 김 추기경, 왜관의 분도수도원장 오도 아빠스와 함께한 자리였다. 그 이후 우리는 그가 한국에 올 때마다 자주 만났다. 그러나 그가 한국에 자유롭게 드나들기 전까지는 우리들의 연락은 애환도 많았고 그때마다 조마조마했다.

송영순의 활동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물론 그 자신도 그것을 내세우지 않았다. 공식이든 비공식이든, 한국 쪽에서 제대로 된 감사의 뜻을 전한 일도 없었다. 있었다면 2002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국외 민주인사의 일원으로 한번 초청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가 남긴 자료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채로 내 방에 쌓여 있다. 그의 사후 그의 아들 정빈이 내게 보낸 것이다. 내가 70년대 서울에서 보낸 자료와 편지, 그리고 그가 일본에서 작업했던 자료집, 신문 기사 등이 고스란히 보관돼 있었다.

말년의 그는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아 한국에 모셔오는 일에 몰두했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생활하던 2004년 여름, 그는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 종로구 평창동 원룸에서 평화스런 모습으로 세상을 떠났다. 8월4일 서울에서는 김 추기경의 집전으로, 8월14일 일본 도쿄에서는 시라야나기 추기경의 집전으로 추모미사가 거행되었다. 그때 와다 하루키 교수는 조사에서 “마치 포복전진하고 있다가 어느샌가 옆의 전우가 총탄을 맞고 전사한 것과 같은 느낌”이라며, 그 마지막에 한국말로 “형님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고별인사를 했다. 아마도 그에 대한 최종적인 평가는 그가 남긴 자료를 정리하고 난 뒤에나 가능할 것이다. <끝>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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