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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민주·통일운동 20여년…인혁당 연루
“내가 죽는 이유는 조국을 사랑한 죄”

등록 2011-11-21 20:21수정 2011-11-21 20:21

1972년 여름 삼락일어학원 시절 북한산성 계곡에서 함께 한 이수병(오른쪽)과 김종대(<민족지평> 상무)씨. 이들은 김금수(노동운동가)·이영호(전 한양대 교수)씨와 부산사범 동기이자 ‘암장’의 회원이었다.
1972년 여름 삼락일어학원 시절 북한산성 계곡에서 함께 한 이수병(오른쪽)과 김종대(<민족지평> 상무)씨. 이들은 김금수(노동운동가)·이영호(전 한양대 교수)씨와 부산사범 동기이자 ‘암장’의 회원이었다.
그때 그 사람 민족통일의 선구자 이수병 선생
‘짓눌린 지초처럼/ 치솟는 해일처럼/ 그렇게 강인하고/ 그렇게 감격스런/ 새해를 또 맞으시기 바랍니다’(1974년 새해 아침 이수병)

이렇게 힘차고 당당하게 연하 편지를 보냈던 그는 불과 4개월 뒤 박정희 유신정권에 끌려가서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74년 4월18일 서울 종로 청진동 삼락일어학원에서 강사로 일하던 이수병은 원장이자 친구인 김종대와 얘기하던 중 낯선 방문객을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가 중앙정보부의 검은색 세단에 실려 끌려갔다. 같은 시각, 조금 전 점심을 함께 하고 헤어졌던 김용원도 중정에 연행됐다. 당시 경기여고 물리교사였던 그는 박정희의 둘째딸 근영의 담임을 맡기도 했다. 대구에 있던 도예종·서도원·하재완도 이미 끌려와 조사를 받고 있었다.

앞서 2월 이수병은 우홍선으로부터 중정에서 유신반대 학생 시위를 구실로 10년 전 인혁당 사건 때 뿌리뽑지 못한 혁신세력을 제거하려 한다는 정보를 들었다. 이어 4월16일 경북대 학생회장 출신으로 73년 말 대구의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에서 학원으로 파견한 여정남이 체포됐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하지만 사태를 낙관했던 그는 도피를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75년 4월9일 새벽 4시30분 사형장으로 끌려온 이수병은 천천히 펜을 들었다. “내가 죽는 이유는 오직 하나, 조국을 위하여 민족민주운동을 한 것뿐이다. 가족들이 보고 싶다. 가족들의 생활대책을 세워달라.”

37년 경남 의령군 부림면 손오리에서 태어난 이수병은 임시정부 독립자금을 댄 백산 안희제의 생가와 지척에 산 인연으로 그의 아들 안상록(1905~82)으로부터 일찍이 사회과학 의식을 배웠다. 53년 부산사범에 입학해 사회과학 토론모임 ‘암장’을 꾸려 활동한 데 이어 56년 부산대 교육학과에 진학해 혁신계인 정치학과 교수 이종률에게 영향을 받았다.

59년 신흥대(현 경희대) 경제학과에 편입해 서울로 올라온 그는 암장 동지들과 ‘점등작업’이라는 강연회를 펼치던 60년 ‘4·19’를 맞았다. 11월 경희대 민족통일연구회를 결성해 회장을 맡은 그는 61년 2월28일 진명여고에서 열린 민족자주통일협의회(민자통·민민청과 통민청의 통합조직)의 ‘3·1운동 강연회’에 학생대표 연사로 나서 주목을 받았다. <민족일보> 창간 첫 공채에서 수석합격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이어 5월13일 민자통 주최로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남북학생회담 환영 및 민족자주통일 촉진 궐기대회’에서 그는 또 한번 학생대표로 나섰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이 땅이 뉘 땅인데 오도 가도 못하느냐? 배고파서 못 살겠다 통일만이 살길이다.”


그러나 5월16일 박정희의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체포된 그는 혁명재판소에서 서울대 유근일과 함께 학생운동 지도자로는 최고형인 1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때 옥중에서 집필한 장편 대화체 소설 <수경 선생>은 74년 체포 직후 가족들이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나 역시 그의 저서로 알고 읽었던 <만적론>은 사실 부산사범 동창 유진곤이 <민족일보>에 투고하려고 보낸 논문이었다.

68년 7년 만에 출소해 지물포를 운영하며 2남1녀 가정을 이룬 그는 71년 9월 종로1가 청진여관에서 부산의 이영석, 광주의 김세원, 서울의 우홍선 등과 모여 대구의 서도원을 좌장으로 ‘경락연구회’를 꾸렸다. 경락처럼 보이지 않는 점조직으로 각 지역에 민자연(민족전통의학 자연건강연구회-민족자주통일운동연합)을 구성하고, 근거지로 충무로에 지압시술소를 열기도 했다.

64년 ‘6·3사태’ 때 수감돼 같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생전의 그를 직접 만나본 적은 없다. 다만 그의 옥바라지를 전담했던 김용원과 친구인 이영호와는 대학시절부터 가까이 지냈고, 그의 또다른 친구 최종국 그리고 박중기로부터도 그에 대한 얘기를 자주 들었다. 그는 내게 여전히 전설적인 변혁운동가로 각인돼 있다.

나는 74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 때 그 가족들과의 인연으로 그들의 구명운동을 뒤에서 도울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어설픈 구명운동이 혹여 그들의 죽음을 앞당긴 것은 아닌지 죄책감이 들곤 한다.

정리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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