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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단아하면서도 늘 “내가 할게”…타고난 ‘민주화의 어머니 총무’

등록 2011-12-12 20:44수정 2011-12-27 14:24

1976년 3·1 명동성당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구속된 관련자 가족들이 이듬해 12월말 석방 기념 다과회를 열어 고난에 동참해준 국내외 후원자들에게 답례를 하고 있다. ‘타고난 총무’였던 김한림 선생이 다과회 중에도 또다른 시국사건 관련 가족들을 보살피고 있다.  고 김한림 추모집 <따슨 손 따슨 웃음꽃> 중에서
1976년 3·1 명동성당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구속된 관련자 가족들이 이듬해 12월말 석방 기념 다과회를 열어 고난에 동참해준 국내외 후원자들에게 답례를 하고 있다. ‘타고난 총무’였던 김한림 선생이 다과회 중에도 또다른 시국사건 관련 가족들을 보살피고 있다. 고 김한림 추모집 <따슨 손 따슨 웃음꽃> 중에서
김정남의 ‘증언, 박정희 시대’ ⑤ 구속자가족협의회 총무 김한림
어떻게 결성됐나
민청학련 관련 1034명 검거
어머니들 만남 계속하면서
함께 법정 달려가 자식 격려
74년 9월 협의회로 출범

김윤 어머니 김한림
딸이 7년 징역 선고받자
사형 학생들에 미안하다 외쳐
들고 다닌 천가방 속에는
선언문·영치금…별의별것이

언제나 어머니가 있었다
구속자 가족 행사를
신명나게 이끄는 재주가
민주화 단체서 하는 일치고
그의 손 거치지 않은 것 없다

■ 구속자가족협의회의 결성

1974년 4월3일 서울대·이화여대·성균관대 등 서울시내 각 대학에서 시위가 터졌다. 그와 함께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이름으로 ‘민중·민족·민주선언’(일명 삼민선언), ‘민중의 소리’ 등의 유인물이 배포되었다. 이보다 앞서 3월21일에는 경북대에서, 3월28일에는 서강대에서도 시위가 있었다. 일련의 시위는 학생들이 전국적으로 벌인 동시다발적인 반유신투쟁의 표출이었다.

그날 밤 10시 대통령 박정희는 특별담화를 통해 민청학련이라는 불법단체가 불순세력의 배후조종하에 인민혁명을 수행하기 위한 상투적 방편으로 통일전선의 초기단계 지하조직을 우리 사회 일각에 형성하고, 반국가적 불순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며, 이러한 불순세력을 발본색원하기 위해 ‘긴급조치 제4호’를 발동한다고 발표했다.

신학기를 앞둔 74년초부터 내밀하게 전개된 학생들의 투쟁 기미를 포착한 유신 당국은 ‘긴조 4호’를 발동하기 전에 이미 상당수의 학생을 잡아들였고, 공식적으로는 1034명을 검거해 이 가운데 253명을 구속했다. 이것이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이다.


처음에 부모들은 갑작스러운 검거와 구속 소식에 당황했지만, 자식들의 행방조차 알 수 없었다. 반국가단체를 구성해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는 무시무시한 발표로 가족들은 겁에 질려 있었다. 정보과 형사들은 학생들이 빨갱이라고 악성루머를 퍼뜨리고 다녔고, 이 때문에 주변의 시선은 싸늘해져갔다. 어머니들은 비록 면회는 안 되지만, 영치금과 책·옷 따위를 넣어주기 위해 구치소로 몰려들었다. 그때만 해도 어머니들은 자식들을 원망했다. “비싼 돈 들여서 가르쳐 놨더니 반국가사범이 웬말이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곧 박형규 목사의 부인 조정하, 서강대생 김윤의 어머니 김한림, 김지하의 어머니 정금성 선생 등과 어울리면서 그나마 위안을 받기 시작했다. 목요기도회, 명동성당 기도회 등에 참여하면서부터는 자신들이 결코 외롭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겁먹었던 가족들은 이제 자식들의 행동이 옳았다는 것을 신념으로 갖게 되었다. 자식들을 격려하고 고무하는 어머니로 거듭 태어났다. 그것은 감옥에 있는 자식들에게 커다란 위안과 용기가 되었으며, 그들로 하여금 법정에서 더욱 당당할 수 있게 했다.

어머니들의 만남과 모임이 계속되면서 구속자가족협의회가 자연스럽게 결성됐다. 74년 9월 구속자가족협의회는 회장에 공덕귀, 부회장에 연세대 김학민의 아버지 김윤식, 총무에 김한림 선생을 선임했다. 여기에 조정하·정금성 등 외에 이현배의 부인 최영희, 유인태의 어머니 박노숙, 김효순의 형 김병순, 서광태의 어머니 최말순, 이철의 부친 이근진씨 등이 그 중심에서 활동했다. 미아리 유인태의 집은 어머니들의 집합소였고, 그 어머니들과 행동을 같이하며 그 수발을 든 것은 김병순이었다.

이로부터 구속자 가족들은 민주화투쟁 과정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구속자가족협의회는 중요한 민주화운동단체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는 민주화운동에서 중요한 진전이었다. 다음은 74년 11월21일에 발표된 결의문의 일부분이다.

“우리 구속자 가족들은 우리들의 투쟁 없이 자식과 남편을 구할 수 없고, 우리들의 투쟁 없이 얻는 자유는 진정한 자유라 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 우리는 이제 자식이 외치다가 들어간 유신독재 철폐를 부르짖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아들과 남편들이 그토록 사랑하던 조국을 위하는 길이고, 그들을 구하는 길임을 알았습니다.”

가족들은 다 함께 법정에 달려가 재판받는 자식들을 격려했다. 가족들의 방청은 검찰과 재판부에 대한 무언의 시위였고 도덕적 압력이었다. 어머니들은 언론이 없던 그 시절, 전국의 교도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신구 교회의 기도회 소식, 그리고 대학에서 일어나고 있는 학생 시위와 노동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노에 찬 노동자들의 인간선언을 발과 구전으로 세상에 알렸다.

구속자 가족들에게는 거리낄 것이 없었고, 또 그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든지 있었다.

구속자가족협의회 회원 어머니들이 1977년 8월17일 서울 오장동 제일교회에서 양심수 석방을 요구하며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다. 왼쪽 둘째부터 이우정·박영숙 전 의원, 맨 오른쪽 기도하는 이가 김한림 총무다.
구속자가족협의회 회원 어머니들이 1977년 8월17일 서울 오장동 제일교회에서 양심수 석방을 요구하며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다. 왼쪽 둘째부터 이우정·박영숙 전 의원, 맨 오른쪽 기도하는 이가 김한림 총무다.
1974년 11월 구속자 가족 21명이 포드 미국 대통령의 방한에 맞춰 주한 미대사관 앞에서 기습시위를 벌이고 있다. 어머니들은 손수 기저귀천으로 펼침막을 만들곤 했다. 오른쪽 둘째 검은 목도리를 한 채 울고 있는 사람이 김한림 총무다.
1974년 11월 구속자 가족 21명이 포드 미국 대통령의 방한에 맞춰 주한 미대사관 앞에서 기습시위를 벌이고 있다. 어머니들은 손수 기저귀천으로 펼침막을 만들곤 했다. 오른쪽 둘째 검은 목도리를 한 채 울고 있는 사람이 김한림 총무다.

■ 타고난 총무 김한림

구속자 가족들의 행동을 조직하고 앞에서 이끌어간 이는 김한림 총무였다. 딸 김윤이 10년 구형에 7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을 때 그가 “사형선고 받은 학생들에게 미안하다. 죽이든지 살리든지 모두 다 함께하라”고 외친 것은 널리 알려진 일화다.

김 선생은 딸을 옥바라지하는 와중에도 자신보다 더 어려운 가족들을 보살폈다. 이현배가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그 아내 최영희는 아들을 조산하는 바람에 패혈증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아무도 돌봐주는 이 없는 사형수의 아내를 찾아가 그때 돈 5만원을 손에 쥐여주고 격려한 이가 그였다. 이효재 이화여대 교수 등 옛 동래일신여고 제자들이 용돈을 주면, 그 비상금을 더 어려운 사람들에게 찾아가 거침없이 내놨다. 하지만 늘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했다.

김 선생이 들고 다니는 천가방 속에는 언제나 별의별 것이 다 들어 있었다. 선언문·성명서·호소문·옥중서신·영치금·원고 초안 등 이쪽에서 저쪽으로 전해야 할 문서가 있는가 하면, 남몰래 서명을 받아야 할 구명운동 연판장도 있었고, 어딘가에서 발표해야 할 성명서도 있었다. 민주회복국민회의를 비롯한 재야 민주화단체에서 하는 일치고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의 몸은 고난 속에서 더욱 날랬고, 해야 할 일은 언제가 “내가 할게”였다.

김 선생은 구속자가족협의회의 웬만한 성명서는 스스로 작성해서 발표했다. 민청학련 사건 때 사형과 무기형이 속출하자 국민들을 향해 이런 글을 썼다. “국민들이여! 민족의 앞길을 이끌어갈 젊은이들이 세계 역사상 있을 수 없는 형식적인 재판과 법 밑에서 죽어가는 것에 대해 양심대로 말해 봅시다. 진정으로 이 어린 학생들이 죽어가야 하는지를. … 국민들이여! 우리의 자녀 형제들의 생명이 살 길에는 당신들의 용기있는 양심의 외침이 필요합니다. 양심의 외침이~!”

구속자 가족들의 행사를 언제나 신명나는 한판으로 이끄는 재주가 김 선생에게는 있었다. 연행되는 닭장차 안에서나 경찰서 마당에서 그가 한 손을 높이 들고 바닥이 꺼져라 한쪽 발을 쾅쾅 구르며 “무릎을 꿇고서 사느니보다는/ 서서 죽기를 원한단다 좋다좋아/ 우리들은 뿌리파다 좋다좋아”를 선창하면, 가족들에게는 새로운 활기가 일어나곤 했다. 신명을 일깨우는 레퍼토리는 무궁무진했다. 이렇게 구속자 가족들이 몰려다니면서 노래도 같이 부르고 슬픔도 같이 나누는 것을 본 일본인 목사들이 한국의 어머니들은 슬픔 속에서도 신명을 내고, 싸워도 참 즐겁게 싸운다고 부러워 했다.

구속자 가족들은 일찍이 없었던 새로운 투쟁방법을 적지 않게 개발했다. 그때마다 맨 앞에는 김 선생이 있었다. 74년 성탄절과 76년 부활절 때는 서대문구치소에서 가까운 김상근 목사의 수도교회에서 합숙하고, 통금이 해제되자마자 서대문구치소 뒷골목으로 올라가 새벽송을 불렀다. 찬송가를 목이 터져라 부르다 보면 어느새 노래 반, 울음 반이 되었고, 감옥 안에서도 그에 화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들은 펼침막을 너무 잘 만들면 경찰의 표적이 되어 너무 쉽게 빼앗기므로 아기 기저귀를 만드는 소창으로 여러 장을 만들어 여기저기서 기습적으로 펴드는 방법을 쓰기도 했다. 3·1민주구국선언 사건 때는 가족들이 보라색 한복을 똑같이 맞추어 입고 “민주인사 석방하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쓰인 양산을 펴들거나, 구호가 적힌 부채를 들고 시위했다. 검정 테이프로 만든 십자가를 입에 붙이고 덕수궁 앞에서 침묵시위를 벌인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가족들은 고난을 상징하는 보라색 삼각 숄(일명 승리 숄)을 손뜨개로 만들어 팔아 구명운동에 보태기도 했다. 김 선생은 한시도 손에서 뜨개질을 놓은 적이 없었다. 장기표는 김 선생의 뜨개질은 간디의 물레질과 같은 것이라고 했는데, 그가 수배 중에 딸을 낳았을 때 김 선생은 분홍 털실로 짠 아기이불을 뜨개질해서 선물하기도 했다.

김 선생은 언제나 그 표정이 맑고 단아한데다 꼭 열여덟살 처녀처럼 수줍음도 잘 탔다. 아이들과도 그렇게 잘 놀 수가 없었다. 피아노도 쳐주고 깡충깡충 뛰면서 동요도 함께 불렀다. “빨간 꽃 빨간 꽃 너 어째서 빨가니?/ 마음이 예뻐서 빨갛지/ 하얀 꽃 하얀 꽃 너 어째서 하야니?/ 마음이 착해서 하얗지”

김 선생은 그 누구에게나 다리가 되어주는 사람이었다. 신구 교회를 이어주고, 목요기도회·금요기도회에 구속자 가족들을 끌어들여 그들과 교회를 이었으며, 일본 기자들에게는 통역으로서 한국의 인권문제에 대한 비밀 홍보대사 노릇을 톡톡히 했다. 재일동포 유학생 서승·서준식 두 아들을 면회하기 위해 한달에 한번 한국에 오는 그 어머니에게는 살아생전 친구가 되어 주었다.

77년 3월22일 3·1 명동성당 민주구국선언 사건의 대법원 최종판결이 있던 날, 윤보선·정구영·윤형중·천관우·정일형·양일동·함석헌·지학순·박형규·조화순 등의 연명으로 3·1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과 같은 새로운 형태의 투쟁방식을 제안한 것이 민주구국헌장이었다. 기획은 내가 했지만 이 민주구국헌장에 서명을 받아내러 다닌 것은 김 선생이었다. 이 일로 구속자 가족과 동아투위 기자 등 100여명이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고, 김 선생 자신은 상당 기간 피신해야 했다.

80년 서울의 봄 때도 선생은 내가 편집한 김재규 구명운동을 위한 자료집 때문에 1년 넘게 수배생활을 감내해야 했다. 그때 김 선생에게는 100만원의 현상금이 걸려 있었다. 훗날 말씀하길, 공무원 가정도 가서는 안 되고 한집에 너무 오래 있어도 안 되고, 그래서 무려 27군데를 옮겨다녔다고 했다.

수배생활이 끝난 뒤 지인들이 신촌의 조촐한 음식점에서 고희연을 마련해 드린 적이 있었다. 이때 김 선생은 당신을 도와준 고마운 분들을 초대했다. 아마도 이것이 김 선생에게 세상이 감사의 뜻을 표시한 작고 초라한 마지막 행사가 아니었나 싶다.

박형규 목사는 김 선생을 두고 참으로 정곡을 찌르는 말을 했다. “그 고난의 유신시대에 한몫을 하게 만들려고 한 하늘의 섭리가 아닌가 생각해. 김한림 선생의 한 인간으로서의 진면목이 그때 비로소 발휘된 것이 아닌가 싶어. 독재에 대한 투쟁에서, 여성이 지닌 투쟁의 능력이랄까, 저항의 효과를 십분 발휘할 수 있도록 김한림이라는 인물이 그동안 숨겨져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 가지고 구속자 가족들, 특히 어머니들의 정서를 묶어서 저항운동으로 나갈 수 있도록 지도력을 발휘한 것이지. 김한림 선생은 요새 말하는 조직가라 자기는 앞에 나서지 않고 총무로서 뒷전에 서 가지고 힘을 조직해내는 능력이 탁월했지.”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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