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3월1일 ‘3·1 명동성당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윤보선 전 대통령을 비롯한 재야 지도자들이 구속된 뒤 공덕귀 구속자가족협의회 회장(가운데)이 부인들과 함께 부채 시위를 하고 있다.
그때 그 사람 민주화 운동의 큰 어머니 공덕귀
최근 박형규 목사의 회고록 <나의 믿음은 길 위에 있다>(창비·2010)에서 읽은 이야기다.
‘1974년 초, 나병식(풀빛출판사)으로부터 민청학련의 반유신투쟁 자금 지원 요청을 받은 박형규는 3월초 어느날 통행금지가 해제된 직후 자전거를 타고 안국동의 해위 윤보선 댁을 찾아간다. 그는 대문 안에 놓여 있던 신문을 꺼내 1면의 제호 위 여백에 “급히 돈이 필요합니다. 100만원쯤 만들어 주십시오. 규.”라고 쓰고는 신문을 대문 안으로 밀어넣었다. 해위는 곧 45만원을 마련해 부인 공덕귀에게 건넸고, 이우정 당시 기독교장로회 여신도회 회장을 통해 박형규에게 전해진 자금은 안재웅을 거쳐 나병식에게 도달했다. 그해 4월 민청학련 사건이 터져 잡혀간 나병식은 공산세력으로 몰고 가려는 정권의 의도에 맞서, 애초 안재웅의 결혼 축의금이라고 하기로 했던 각본과 달리 자금 제공원을 사실대로 자백했다. 결국 윤보선과 박형규는 긴급조치 위반으로 법정에 서야 했다.’
1970년대 윤보선은 ‘반유신 민주화투쟁의 상징’이자 자존심이었다. ‘전 대통령 윤보선’이라는 우산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그는 언제나 기꺼이 그 우산이 되어 주었다. 해위의 바깥출입이 통제되면서 안국동 8번지, 해위와 밖의 연결통로는 부인 공덕귀였다.
내가 공덕귀(1911~97)를 처음 만난 것은 74년말 민주회복국민회의를 만들어 윤형중 상임대표위원과 함세웅 대변인을 돕고 있을 때였다. 그때 안국동에서는 나를 ‘윤 신부’로 불렀다. 윤형중 신부를 연상해서 내게 붙인 암호명이었다.
74년 5월 교회여성연합회 초대 인권위원장을 억지로 떠맡았던 공덕귀는 그때 민청학련 사건 가족들의 모임인 구속자가족협의회 회장도 맡고 있었다. 공덕귀는 협의회의 훌륭한 우산이 되어 주었고, 김윤식 부회장은 대내외적인 일을 통어했으며, 총무 김한림은 가족들을 끌어내어 하나로 묶었다. 76년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이 터지고 나면서 공덕귀는 더욱더 바빠졌다. 구속자 부인들로 구성된 ‘3·1사건 대책협의회’의 회장을 맡은 것이다.
공덕귀는 그냥 감투만 쓰고 앉아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지극정성을 다해야 직성이 풀렸다. 교회여성연합회로 들어오는 여성 노동자들의 눈물겨운 이야기를 들을 때면 “우리가 이들을 돌보지 않으면 누가 돌보랴” 하며 나섰다.
그는 77년 9월 ‘방림방적 사건’ 대책위원장으로서 체불임금 지급촉구 성명서도 내고, 서명도 받고, 기도회도 열고, 항의도 하는 등 열심히 뛰어다녔다. 앞서 그해 5월 ‘남영나일론’ 사건에는 불매운동으로 맞서 복직 약속과 사과를 얻어냈다. 78년 2월 ‘동일방직 사건’에 이어 79년 해태제과 사건, 와이에이치(YH) 사건이 터져 나오자 ‘한국인권운동협의회’가 결성됐고, 회장에 함석헌, 부회장에 문익환·김승훈·송건호 그리고 그가 추대되었다. 공덕귀는 확실히 ‘70년대 재야 민주화운동의 큰 어머니’였다. 그의 따뜻한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1911년 4월21일 경남 통영에서 태어난 공덕귀는 14살 때 대한제국의 군인이었던 아버지가 작고한 뒤 삯바느질하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당시 가장 선구적인 학교였던 동래일신여학교에서 팔방미인으로 활약한 그는 일본 요코하마신학교를 거쳐 도쿄여자신학교 4학년에 편입해 수료했다. 해방 뒤 조선신학교(현 한신대) 베다니 여자신학부의 교수가 된 그는 미국 프린스턴신학대학의 전액장학생으로 수속을 밟고 있던 중 서울시장 윤보선과 결혼했다.
유신시절 가택연금된 해위가 종종 나를 부를 때면 늦은 밤 이발소를 통해 들어가, 나올 때는 새벽기도 가는 공덕귀를 따라 나와 사라지곤 했다. 그때 나는 그에게서 ‘늙는 것도 충분히 아름답다’ ‘아름답게 늙을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정리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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