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왼쪽 둘째)이 <기독교방송>(CBS) 라디오 스튜디오에 출연해 김관석 당시 기독교방송 사장(맨 왼쪽), 박형규 목사(가운데) 등과 대담을 하고 있다. 1980년대 초반으로 추정된다. 74~75년 민청학련 사건 때 서대문구치소 ‘감방 동기’였던 지학순 주교의 주선으로 이뤄진 김 추기경과 박 목사의 교류는 군사독재시대 신구 교회의 민주화 투쟁을 이끄는 연대의 끈이 됐다.
김정남의 ‘증언, 박정희 시대’
⑦ 교회협 ‘선교자금’ 사건
⑦ 교회협 ‘선교자금’ 사건
1975년 4월 교회협 압수수색
“세계급식선교회 원조금 2700만원 상당을
구속자가족 돕기에 사용 횡령·배임 혐의” 구속 보이지 않는 검은손
재판부 무죄판결 하려하자 중앙정보부로부터 시달려
뒷날 담당판사 고백 “그땐 정말 죽고 싶었다” 어이없는 교회탄압
세계급식선교회 책임자 독일서 날아와 증언대 서
“횡령·배임 아니다” 검찰 공소 조목조목 부인
1975년 4월3일 오전 서울시경 형사 4명이 압수수색영장을 가지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사무실로 몰려와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이하 수도권 선교위) 사업에 관한 서류를 압수하고 총무 김관석 목사를 연행했다. 오후에는 수도권의 박형규 목사와 권호경 목사,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의 사무총장 조승혁 목사 등 3명을 끌어갔다. 박·권 목사는 긴급조치 1호와 4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가 2·15조치로 풀려난 지 채 2달이 되지 않았다. 이것이 이들에게는 세번째 구속이었다.
경찰은 이들이 세계급식선교회(BFW)로부터 받은 원조자금 20만3000마르크(당시 한국화폐로 2700만원 상당)를 빈민촌의 급식과 위생시설, 장학금과 직업훈련 등 원래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그 목적 외에 구속자 가족 돕기 등에 사용하여, 이들을 업무상 횡령과 배임 혐의로 입건했다고 발표했다.
한국의 수도권 빈민 선교사업에 대한 세계급식선교회의 지원은 73년 김관석 목사가 독일을 방문해 선교회의 아시아 담당 책임자 볼프강 슈미트 목사를 만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김 목사의 안내로 빈민선교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청계천 주변의 빈민가를 둘러본 적이 있었다. 그는 한국의 빈민가에는 아프리카나 인도, 남미지역과 달리 삶의 의욕이 넘치고 있다면서 수도권 빈민선교에 원조 용의를 밝혔다. 이 선교회는 1차로 900여만원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계좌로 보내왔다.
김 총무는 박·권 목사 등 수도권 빈민선교 책임자와 실무자들이 74년 초 모두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구속되자, 이 돈의 일부를 구속자 가족을 돕는 데 쓰고, 일부는 산업선교 실무자 훈련장소 사용료 등으로 지급했는데, 이것이 업무상 배임과 횡령죄에 해당한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교회 안에서 출발하였다. 활빈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한 민아무개 목사와 청계천 교회의 정아무개 목사가 이 선교자금에 의혹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74년 10월 김 총무에게 돈을 요구했다. 민 목사는 정 목사로 하여금 ‘김관석 목사 타도 전략’이라는 것을 짜게 하는 한편, 교회협의회의 실행위원회에 이 문제를 제소했다. 이들은 세계급식선교회가 수도권에 지원한 2700만원이 송정동 등 네 지역의 활동을 돕기 위한 것이므로 그 4분의 1에 해당하는 자금을 활빈교회에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행위원회는 이두성 목사를 위원장으로 한 특별수습위원회를 구성해 진상조사 끝에 선교자금은 특정 지역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므로 송정동 지역에 일정 금액이 할당될 당위성은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러자 이들은 판자촌 주민들을 동원해 기독교회관의 교회협의회 사무실로 몰려와 “김관석 물러가라”를 외치며 농성을 벌이고, 청계천 수렁에서 오물을 퍼 와 뿌리는 등 난동을 부리면서 돈을 내라고 요구했다. 연말이 다가오자 활빈교회 쪽은 조속한 시일 안에 100만원을 지원해주면 나머지 금액에 대해서는 결정에 따르겠다고 했고, 74년 12월6일 실행위원회는 대책회의를 거쳐 이를 지급했다. 이후 공개적인 마찰은 발생하지 않은 채 75년 2월15일 수도권 위원장인 박형규 목사가 출감하니 최종적인 문제해결은 이제 수도권의 책임으로 넘겨졌다. 박 목사를 비롯한 수도권 선교위 실무자들은 석방되자마자 건강진단을 위해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그런데 2월20일 밤 10시쯤 정 목사가 권 목사의 병실로 찾아와 또다시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그의 태도가 도를 넘어서자 이웃 병실에 있던 수도권의 다른 실무자들이 달려와 사태를 진정시키려 했다. 이 와중에 정 목사의 눈에 경미한 상처가 났다. 정 목사는 이를 구실로 세브란스병원과 이대병원에 상해진단서를 떼어줄 것을 요구하다가 거절당하자 동대문경찰서의 공의(公醫)인 성인외과병원에서 전치 4주의 진단서를 발부받고 그 자리에서 바로 입원했다. 2월21일 정 목사는 이 상해진단서를 근거로 권 목사를 비롯해 이규상·신동욱 전도사, 모갑경·허병섭 목사 등 5명을 고소했고, 2월24일 서대문경찰서는 이를 입건했다. 당국과 협의를 거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정 목사의 고소는 유신정권이 기독교교회협의회와 수도권 선교위에 개입해 주요 인물을 탄압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 이때부터 납득할 수 없는 이상한 일들이 잇따라 벌어졌다. 사건의 전모를 알린다며 경찰이 이 사건과 관련한 인쇄물을 언론에 돌리는가 하면, <한국방송>은 티브이 뉴스에 정 목사의 입원 장면을 보도했다. 어느 언론사에서는 김 총무를 일방적으로 공격하는 기사를 크게 실으라는 지시가 내려오기도 했다. 김관석 목사는 당시 한국 교회 민주화운동의 지지기반이라 할 교회협의회의 실무책임을 훌륭히 수행해내고 있었다. 그 덕분에 교회협의회는 민주화운동의 구심점이 될 수 있었다. 그를 교계에서 고립·소외시키는 것이야말로 당국의 노림수였다. 박·권 목사 등 수도권 선교위는 억눌린 자를 해방하고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전파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교사명이라고 믿고, 소외된 대중의 의식을 깨우치고 힘을 모아 스스로 처지를 개선해 나가도록 노력하는 선교단체로 당국은 어떻게든 수도권의 확장을 억제하려고 했다. 조승혁 목사는 기독교사회행동단체의 연합체인 교회사회선교협의회의 사무총장이었고, 74년 구속된 성직자의 대부분이 산업선교와 학생선교 등에 종사한 실무자들이었다. 당국이 이들을 겨냥한 것은, 한국 기독교의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 그리고 사회선교 활동을 봉쇄·저지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더욱이 횡령과 배임이라는 파렴치한 죄목으로 기독교계와 주요 인물들의 명예를 훼손하려는 악의까지 내포된 계산된 교회탄압이었던 것이다.
■ 전국 교회의 일치운동
기독교계는 즉각 대응에 나섰다. 유신정권의 종교탄압이 전면적이고도 노골적으로 자행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수도권 선교위는 구속된 박 목사를 대신해 문동환 목사가 위원장 서리를 맡아 사태에 대처했다. 교회협의회는 ‘선교자유수호 임시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박세경·이태영·이세중·홍성우·황인철 등 5명으로 변호인단을 구성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도 4월8일 명동성당에서 인권회복 기도회를 열고 민주인사들의 명예를 실추시켜 기독교계의 민주화운동에 제동을 걸려는 음모의 소산이라고 규탄했다. 교회협의회의 6개 가입교단도 처음부터 적극적인 공개행동에 나서 ‘전국 교회에 알려드리는 말씀’을 발표하고 기도회를 여는 등 교회의 일치운동으로 전개해나갔다.
주요 국제기구와 각국의 책임있는 교회 지도자들도 잇따라 한국을 방문해 국제적인 지지와 관심을 보였다.
5월30일에는 4명으로 구성된 세계교회협의회(WCC) 임원들이 한국을 찾아와 6월2일까지 머물면서 진상을 확인하고, 가족과 관계자들을 위로했다. 김 총무와 박 목사 등 구속자에 대한 접견이 이루어지지 않자 이들은 법무부 장관과 문공부 장관을 만나 석방을 강력히 촉구했다. 이들은 또 일본 도쿄로 가서 기자회견을 열어 한국의 성직자 구속사건은 선교의 자유를 직접적으로 침해하는 것이며, 횡령죄가 성립할 수 없는 충분한 증거가 있는데도 정부 당국이 재판으로 몰고 가고 있다고 비난했다.
각국 교회에서도 전문을 통해 한국 교회의 고난에 관심과 동참을 표시했다. “김관석 목사의 인품과 정신적 지도력을 확신합니다.”(미국연합장로교) “김관석 목사는 과거 수년 동안 정의와 사랑의 뜻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세계교회협의회) “유감입니다. 일체감을 가지고 기도하고 있습니다.”(독일선교협의회) “연민의 정을 금할 수 없습니다.”(런던기독교협의회)
6월10일 드디어 공판이 시작되었으나 너무 많은 방청객이 몰려와 법정이 혼란하다는 이유로 재판이 연기되었다. 7월5일 3회 공판 때는 세계급식선교회의 아시아담당 책임자인 볼프강 슈미트 목사가 독일에서 날아와 직접 증언대에 섰다.
변호인: 세계급식선교회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를 통해 수도권에 보낸 돈은 수도권이 독자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가?
슈미트: 그렇다.
변호인: 공소사실에 따르면, 이 자금이 당초의 목적 이외의 일에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가?
슈미트: 목적에 위배되지 않는다.
변호인: 도시산업선교 실무자들의 훈련 프로그램 또는 세미나 등에 지출한 돈을 피고인들의 횡령에 포함시키고 있는데 그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가?
슈미트: 충분히 지출될 수 있는 일이다.
변호인: 수도권 위원장인 박형규 목사와 실무자인 권호경 목사 등이 구속되었을 당시에 그들을 위해 지출된 돈이 자금의 목적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슈미트: 위배되는 것이 아니다.
(……)
변호인: 감옥에 갇혀 있는 이들을 위해 변호사를 선임하고 변호사 비용을 그 자금 가운데서 지불한다면 그렇게 지출된 자금은 선교회의 목적에 합당한 것인가?
슈미트: 그렇다.
변호인: 수도권 관계자들이 구속되어 있을 때 그들을 위해 돕는 일도 넓은 의미의 선교라고 생각하는가?
슈미트: 그렇다고 생각한다.
변호인: 정아무개 목사가 피고인들을 횡령으로 고발했는데,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슈미트: 돈을 준 선교회에 한마디 문의도 하지 않은 채 그가 취한 고발행위는 근거가 없는 것으로 본다.
이처럼 돈을 준 선교회 쪽에서 횡령이 아니라고 명백히 밝혔음에도 8월2일 열린 공판에서 검사는 김 총무 징역 3년, 박·권 목사에게 징역 5년, 조 목사에게 징역 4년을 구형했다. 박세경 변호사는 변론에 나서 “왜 마음대로 돈을 썼느냐고 하는 것이 공소사실의 요지인데, 남을 돕는 일에 쓰라고 보내준 돈을 그에 합당하게 썼을 뿐이다. 검사는 수도권 선교위 자체가 피해자라고 주장하나 ‘내가 나의 돈을 횡령했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고 역설했다. 홍성우 변호사는 “수도권 선교위는 임의단체로서 그룹 형태로 조직되어 있다. 자금은 선교위 차원에서 집행된 것인데도, 위원장과 실무 총무가 돈을 횡령한 것으로 몰고 있다. … 이 사건은 명백히 국가형벌권의 남용이다. 법적으로 이들이 무죄하다는 것을 확신한다”고 주장했다. 황인철 변호사는 “수도권이라는 단체는 그 단체 의지에 따라 운영되어야 하고, 또 그렇게 사업이 진행되어 왔으므로 검사가 주장하는 혐의사실은 성립될 수 없다”고 변론했다.
9월6일 서울지법 대법정에서 열린 선고공판에서 재판부는 김 총무와 조 목사에게 각각 징역 6개월, 권 목사에게 징역 8개월, 박 목사에게 징역 10개월을 선고했다. 김 총무는 더이상의 재판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해 항소를 포기하고 9월17일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항소심이 끝난 뒤 이미 만기일을 넘긴 조·권 목사는 출감할 수 있었고, 박 목사는 남은 형기를 모두 채우고 76년 2월14일 만기 출소했다.
그래도 이 재판은 변호인 쪽 증인 요청을 다 받아주었고, 또 형량도 구형량에 비해서는 현저히 낮게 선고하였다. 담당 재판부인 곽동헌 판사는 무죄판결을 하려 한 정황이 드러나 중앙정보부 등으로부터 무척 시달렸다. 홍성우 변호사는 뒷날 곽 판사가 “그때는 정말 죽고 싶었다”고 고백했다고 전했다.
구속당한 것은 네 사람이었지만, 그밖에도 많은 사람이 이 사건과 관련해 고통을 당했다. 중앙정보부는 김동완·허병섭 목사를 연행해서 수도권 선교위의 회계책임자 손학규 간사의 행방을 집요하게 추적했다. 두 목사는 중정에서 심하게 고문을 당해 전치 2주의 상처를 입었다. 이밖에도 이경배·김원식·이대용 등 교회협의회 직원들도 공판기록을 유인물로 만들어 배포했다는 이유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이 사건은 이처럼 기독교계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명백한 정치적 탄압사건이었다.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수석
“세계급식선교회 원조금 2700만원 상당을
구속자가족 돕기에 사용 횡령·배임 혐의” 구속 보이지 않는 검은손
재판부 무죄판결 하려하자 중앙정보부로부터 시달려
뒷날 담당판사 고백 “그땐 정말 죽고 싶었다” 어이없는 교회탄압
세계급식선교회 책임자 독일서 날아와 증언대 서
“횡령·배임 아니다” 검찰 공소 조목조목 부인
문제는 교회 안에서 출발하였다. 활빈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한 민아무개 목사와 청계천 교회의 정아무개 목사가 이 선교자금에 의혹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74년 10월 김 총무에게 돈을 요구했다. 민 목사는 정 목사로 하여금 ‘김관석 목사 타도 전략’이라는 것을 짜게 하는 한편, 교회협의회의 실행위원회에 이 문제를 제소했다. 이들은 세계급식선교회가 수도권에 지원한 2700만원이 송정동 등 네 지역의 활동을 돕기 위한 것이므로 그 4분의 1에 해당하는 자금을 활빈교회에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행위원회는 이두성 목사를 위원장으로 한 특별수습위원회를 구성해 진상조사 끝에 선교자금은 특정 지역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므로 송정동 지역에 일정 금액이 할당될 당위성은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러자 이들은 판자촌 주민들을 동원해 기독교회관의 교회협의회 사무실로 몰려와 “김관석 물러가라”를 외치며 농성을 벌이고, 청계천 수렁에서 오물을 퍼 와 뿌리는 등 난동을 부리면서 돈을 내라고 요구했다. 연말이 다가오자 활빈교회 쪽은 조속한 시일 안에 100만원을 지원해주면 나머지 금액에 대해서는 결정에 따르겠다고 했고, 74년 12월6일 실행위원회는 대책회의를 거쳐 이를 지급했다. 이후 공개적인 마찰은 발생하지 않은 채 75년 2월15일 수도권 위원장인 박형규 목사가 출감하니 최종적인 문제해결은 이제 수도권의 책임으로 넘겨졌다. 박 목사를 비롯한 수도권 선교위 실무자들은 석방되자마자 건강진단을 위해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그런데 2월20일 밤 10시쯤 정 목사가 권 목사의 병실로 찾아와 또다시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그의 태도가 도를 넘어서자 이웃 병실에 있던 수도권의 다른 실무자들이 달려와 사태를 진정시키려 했다. 이 와중에 정 목사의 눈에 경미한 상처가 났다. 정 목사는 이를 구실로 세브란스병원과 이대병원에 상해진단서를 떼어줄 것을 요구하다가 거절당하자 동대문경찰서의 공의(公醫)인 성인외과병원에서 전치 4주의 진단서를 발부받고 그 자리에서 바로 입원했다. 2월21일 정 목사는 이 상해진단서를 근거로 권 목사를 비롯해 이규상·신동욱 전도사, 모갑경·허병섭 목사 등 5명을 고소했고, 2월24일 서대문경찰서는 이를 입건했다. 당국과 협의를 거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정 목사의 고소는 유신정권이 기독교교회협의회와 수도권 선교위에 개입해 주요 인물을 탄압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 이때부터 납득할 수 없는 이상한 일들이 잇따라 벌어졌다. 사건의 전모를 알린다며 경찰이 이 사건과 관련한 인쇄물을 언론에 돌리는가 하면, <한국방송>은 티브이 뉴스에 정 목사의 입원 장면을 보도했다. 어느 언론사에서는 김 총무를 일방적으로 공격하는 기사를 크게 실으라는 지시가 내려오기도 했다. 김관석 목사는 당시 한국 교회 민주화운동의 지지기반이라 할 교회협의회의 실무책임을 훌륭히 수행해내고 있었다. 그 덕분에 교회협의회는 민주화운동의 구심점이 될 수 있었다. 그를 교계에서 고립·소외시키는 것이야말로 당국의 노림수였다. 박·권 목사 등 수도권 선교위는 억눌린 자를 해방하고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전파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교사명이라고 믿고, 소외된 대중의 의식을 깨우치고 힘을 모아 스스로 처지를 개선해 나가도록 노력하는 선교단체로 당국은 어떻게든 수도권의 확장을 억제하려고 했다. 조승혁 목사는 기독교사회행동단체의 연합체인 교회사회선교협의회의 사무총장이었고, 74년 구속된 성직자의 대부분이 산업선교와 학생선교 등에 종사한 실무자들이었다. 당국이 이들을 겨냥한 것은, 한국 기독교의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 그리고 사회선교 활동을 봉쇄·저지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더욱이 횡령과 배임이라는 파렴치한 죄목으로 기독교계와 주요 인물들의 명예를 훼손하려는 악의까지 내포된 계산된 교회탄압이었던 것이다.
1975년 4월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 선교자금을 횡령했다는 엉터리 죄목으로 구속된 박형규 목사가 재판에 출석한 뒤 서대문구치소로 돌아오고 있다.
당시 간사로서 자금을 실질적으로 관리했던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오른쪽 둘째)는 도피해 한참 동안 수배생활을 해야 했다. 사진은 사건 이전 어느해 명절 때 박형규 수도권 선교위원장(가운데)이 언론과 인터뷰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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