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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길을 찾아서] 북한의 유연한 변화에도 남한은 압박만 / 한완상

등록 2012-08-05 19:51

1993년 12월21일 뉴욕에서 토머스 허버드(왼쪽) 미국 국무부 부차관보와 허종(오른쪽) 주유엔 북한대사는 핵사찰 수용, 남북 실무접촉과 특사교환 등 4가지 조처에 합의했다. 북-미 협상이 무르익던 그 무렵 정작 필자는 통일부총리 자리에서 떠나야 할 때를 맞고 있었다.
1993년 12월21일 뉴욕에서 토머스 허버드(왼쪽) 미국 국무부 부차관보와 허종(오른쪽) 주유엔 북한대사는 핵사찰 수용, 남북 실무접촉과 특사교환 등 4가지 조처에 합의했다. 북-미 협상이 무르익던 그 무렵 정작 필자는 통일부총리 자리에서 떠나야 할 때를 맞고 있었다.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60
1993년 12월에 들어서자 북한은 미국과 3차 회담을 성사시키려고 한층 더 노력했다. 12월3일에는 미국과 우리가 제시해온 두 가지 조건과 관련해 좀더 융통성 있는 자세를 보여주는 메시지를 미국 쪽에 전했다. 종전과 달리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받는 문제에서 유연한 태도를 취했다. 원자력기구가 사찰하고 싶어 하는 7개 시설 중 5개에 대해서는 임시사찰과 통상사찰을 받겠다고 했다. 나머지 2개에서도 필름 교체를 허용하겠다고 했다. 남북대화 개시에 관해서도 원자력기구 사찰팀이 입북하면 곧 남북 특사교환 문제를 다루는 실무접촉을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이 실무접촉이 개시되면, 한국과 미국은 94년도 팀스피릿 훈련 중지를 발표하고 동시에 3차 북-미 회담 날짜를 발표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 새로운 제안이 우리에게도 전달되었지만, 미국 국무부는 북한과의 접촉 사실을 시인할 뿐 자세한 내용은 발표하지 않았다. 다소의 진전은 있었으나 아주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라고만 했다.

그 무렵 우리 정부는 미국에 일괄타결보다 더 강경한 ‘철저하고 광범위한’ 대북접근법을 채택하도록 요구하고 있었다. 12월7일에는 김 대통령과 클린턴 대통령이 전화회담을 통해 북한이 원자력기구가 7개 시설을 모두 사찰하도록 허용하고 남북 특사교환을 위한 실무접촉을 재개할 때만, 94년도 팀스피릿 훈련 중지와 3차 북-미 회담 날짜를 발표하기로 합의했다. 팀스피릿 훈련 중지는 한국이, 3차 북-미 회담 날짜는 미국이 발표하기로 했다. 북한의 12월3일 메시지를 더 엄격한 잣대로 수용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다. 김 대통령이 강조한 ‘철저한’ 조처의 한 단면을 보는 듯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12월21일 뉴욕에서 허버드 국무부 부차관보와 허종 주유엔 북한대사가 만나 4가지 조처를 동시에 추진하기로 합의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첫째, 국제원자력기구가 영변에 있는 7개 시설 중 5개에 대해서는 전면사찰을 하고 2개에는 제한사찰을 한다. 제한사찰은 원자력기구와 협의 아래 카메라의 배터리를 교환하는 것이다. 둘째, 남북간 실무접촉을 시작하는데, 남쪽의 진지한 자세가 보이면 북쪽은 당일 특사교환이 가능하도록 하겠다. 셋째, 한국과 미국은 94년도 팀스피릿 훈련 중지를 발표할 것이다. 넷째, 미국은 북한과의 3차 접촉 날짜를 발표할 것이다.’

이러한 합의를 발표하면서 허 대사가 허버드 부차관보에게 흥미로운 얘기를 했다. 팀스피릿 훈련 중지와 3차 북-미 회담은 원자력기구의 사찰이 완료되고 남북 특사교환이 실현된 뒤에 해도 좋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원자력기구에서 먼저 북과의 만남을 제의해주길 바란다고 했다. 북한이 3차 북-미 회담만큼은 어떻게든 실현시키고 싶다는 의지를 강하게 표명한 셈이다. 그런데 북한이 이렇게 조금 유연해진 이때 나는 통일 업무를 떠나야 했다.

그에 앞서 기억에 남는 따뜻한 만남에 대해 먼저 얘기해야 할 것 같다. 12월3일 노신영 전 총리가 점심을 함께하자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를 만나고 싶던 참이었다. 그는 나에게는 은인이기도 했다. 1981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수감됐다 풀려난 뒤 샘 넌 미국 상원 국방위원장이 전두환 군부에 나의 출국을 요청했을 때 외무장관이 바로 그였다. 아마도 강경 군부와 미국 사이에 끼어 그는 몹시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주미대사의 요청을 여러 번 받고도 정권에서는 강경하게 반대했을 테니 말이다.우여곡절 끝에 에모리대학 초빙교수로 나가게 됐던 그해 9월 말 유엔 총회 참석차 출국한 노 장관은 그를 배웅나간 딕시 워커 주한 미대사에게 ‘한완상 박사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귀띔해주었다. 그때는 김대중 전 총재가 아직도 옥살이를 할 때라 나 같은 사람에게 출국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한완상 전 부총리
한완상 전 부총리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뒤에야 그와 점심을 함께하면서 나는 뒤늦게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그때 일을 잊지 않고 이렇게 연락해서 그렇게 어두웠던 시기에도 밝은 햇살이 사람들을 따뜻하게 감싸던 순간이 있었음을 상기시켜주니 더 고마웠다. 어떠한 절망의 시기에도 찬란한 희망을 만들어내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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