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2월19일 아침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과 부인 이희호씨가 경기도 고양시 일산 자택 앞에서 대통령 당선을 축하하는 주민들의 환호에 답례하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은 선거 이틀 전 청와대를 찾아간 필자에게 ‘선거 과정에서 자신이 디제이의 당선을 간접적으로 지원했다’는 메시지를 김 당선인에게 전해주기 바랐다.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111
1997년 11월16일 세계 거대대학(학생수 10만명 이상의 방송통신대학) 총장회의에 참석하고자 3년 만에 남아공을 다시 방문했다. 회의중에도 남아공 주재 대사관을 통해 한국의 경제위기 소식이 속속 들려왔다. 내 마음은 불안하기만 했다. 아무래도 국제통화기금(IMF)의 관리를 받게 될 모양이다.
12월16일. 대통령 선거 이틀 전이다. 오후 3시20분쯤 청와대에서 들어오라는 전갈이 왔다. 1시간 남짓 김영삼 대통령과 둘이서만 얘기했다. 나는 그동안 하고 싶었던 얘기들을 쏟아냈다. 김 대통령은 힘이 많이 빠져 보였다.
나는 우리 경제위기가 얼마나 심각한지 물었다. 김 대통령은 강경식 경제부총리나 김인호 경제수석비서관은 다소 낙관적이지만 이제는 아이엠에프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딱한 상황임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임창열 장관에게 대응책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나는 이 위기가 오히려 기회로 전환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김 대통령은 얼마 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 때 우리 경제의 심각한 위기를 클린턴 미국 대통령에게 호소했고, 이어 귀국 뒤 클린턴이 직접 전화해 어떻게든 도와주겠다고 했단다. 또 보즈워스 신임 주한 미대사가 이번 경제위기가 전화위복이 될 것이라고 했단다.
최근 대선후보들이 앞다퉈 김 대통령을 공격하고 있는데, 여당인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의 공격이 특히 그를 아프게 하는 것 같다. 또 후보들은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사면을 주장하며 결자해지 차원에서 김 대통령이 앞장서야 한다고 했다. 나는 이 주장에 대해 신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결자해지에서 ‘결’은 역사 청산과 개혁의 차원에서 내린 맺음인데, 이를 너무 쉽게 풀어주면 역사 바로 세우기는 역사 바로 지우기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날 나는 5년 전을 회고하며 몇가지 아쉬웠던 점을 조목조목 말씀드렸다. 특히 보수언론에서 나와 김정남 수석을 ‘색깔론’으로 모함했을 때 대통령께서 단호하게 방어해주지 않아 섭섭했다고 털어놓았다. 나는 그때 대통령께서 <조선일보> 사장에게 단 한번만이라도 친히 전화로 “한 부총리 그런 사람 아니오!” 하고 단호하게 변호해주기를 기대했다. 그러자 와이에스는 다소 열없어하면서 그때 하루에 수백 통의 편지가 들어왔는데 대부분이 나를 비난하는 내용이었다고 했다.
김 대통령은 이틀 뒤 선거에서 누가 당선될 것 같으냐고 물었다. 디제이가 1~2%의 아주 근소한 차이로 이길 것이라고 하자 대통령은 “그렇지, 그렇지” 호응하면서 은근히 이인제 후보를 견제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 그때는 그 얘기를 그저 흘려들었다.
12월18일, 대통령 선거에서 예상대로 박빙의 차이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었다. 12월31일 정축년의 마지막날 원격화상회의를 통해 전국의 지역학습관(지역대학) 직원들을 연결해 종무식을 했다. 거리의 제약을 정보통신혁명으로 뛰어넘는 기쁨을 체험했다. 퇴근길에 병원에 들러 며칠 전 태어난 손자의 자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내 호인 ‘한민’을 이름으로 주었다. 평온하게 잠든 그 모습을 보며 이 사악하고 오염된 세상에서 그가 앞으로 겪게 될 성장의 아픔을 잠시 상상해보았다.
그런데 이날 저녁 교회에서 송구영신 예배를 보고 돌아와 막 잠들려는 순간 전화가 울렸다. 밤 11시40분께다. 청와대였다. 김 대통령께서는 “지난 16일 우리 얘기할 때 감을 잡았소?”라고 밑도 끝도 없이 말씀하셨다. 나는 수화기를 들고 잠시 멍청히 서 있었다. 내가 대답을 못하고 망설이니까, 이인제 후보 얘기를 꺼냈다. 그를 사퇴시키지 않았다고 했던 말이 퍼뜩 생각났다. 속으로 ‘아! 이인제 후보를 막지 않음으로써 디제이가 당선되도록, 적어도 간접적으로 판세를 관리했다’는 뜻이로구나 하고 깨달았다. 그래서 “예 알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김 대통령은 이회창 후보가 자신과 디제이를 싸잡아 비난했던 것을 상기시키면서 그렇게 욕하는 사람을 지지할 수는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 후보가 선거 때 와이에스와 디제이의 닮은 점을 신문에 대대적으로 광고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임기가 끝날 때까지 남은 두 달을 디제이와 힘을 합쳐 이 경제난국을 이겨내겠다고 하셨다. 내가 이런 와이에스의 속뜻을 디제이에게 전달해주기를 바란다는 뜻이었다.
나는 전화를 끊은 뒤 내일 아침, 우선 김대중 총재의 최측근인 권노갑 전 의원부터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를 통해 와이에스의 속뜻을 꼭 디제이에게 전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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