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월13일 오전 10시20분께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김대중 대통령이 전용기에서 내리는 순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직접 영접을 나와 트랩 바로 아래에서 박수로 환영하고 있다. 분단 이래 55년 만에 이뤄진 첫 남북정상회담은 2박3일 일정 내내 파격의 연속이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141
2000년 6월13일 오전 10시25분, 평양 순안공항에서 남북의 두 정상이 만나는 ‘흐뭇한 파격’을 나는 텔레비전 생중계로 지켜보았다. 마침 <한겨레>에서 이 역사적인 장면에 대한 느낌을 글로 남겨달라고 요청이 와 이렇게 적어 보냈다.
“마침내 남북 정상이 만났다. ‘반갑습니다. 보고 싶었습니다’라는 김대중 대통령의 짤막한 인사는 따지고 보면 한 사람의 인사가 아니다. 분단으로 갈라져 억울하게 고통받아온 7천만 겨레 모두의 마음을 담아낸 절절한 말이었다. 나는 7천만의 목소리를 그 짧은 인사말에서 듣는 듯했다. 서울 떠난 지 불과 한 시간 만에 평양에 내린 김 대통령은 김정일 위원장과 반갑게 만났다. 이 한 시간은 지난 반세기에 걸친 긴 고통의 시간회로를 거친 뒤 비로소 가능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기도 하다. 여기에 만시지탄의 안타까움이 있다.”
하지만 나는 이날 북에서 보여준 파격이 회담의 성과로 이어지길 기대했다. 특히 김 위원장이 비행기 트랩 바로 아래까지 직접 영접을 나와 김 대통령을 기다리고 서 있는 모습은 단순히 전례 없는 정중한 마중이라는 의미를 넘어 반세기 냉전의 두터운 담벼락을 깨뜨리는 첫걸음일 수도 있지 않겠나. 그것은 앞으로 남북관계가 민족당사자 원칙에 따라 착실히 진전될 수 있음을 뜻한다. 또 그것을 뜻해야 한다.
또 한가지 신기한 모습은, 두 지도자가 순안공항에서 관중 앞을 지나갈 때 “김대중! 김정일!”을 외치는 평양 시민들의 환호소리가 들렸는데, ‘위원장’ 경칭을 붙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뭔가 의미있는 변화의 조짐처럼 보인다. 나는 그 외침 속에서 언뜻 백범 선생의 목소리도 함께 듣는 듯했다. 게다가 김 위원장은 의전용 리무진의 상석에 김 대통령을 모시고, 그 옆에 동승해 백화원초대소까지 함께 가며 ‘비공식 단독 회담’을 하는 뜻밖의 해프닝도 연출했다. 바로 이런 열린 대화, 진솔한 역지사지의 대화가 냉전 불신을 녹이기 시작할 것이다.
6월14일 밤 11시20분, 마침내 남북의 두 정상은 공동선언문에 다섯가지 합의사항을 명시하고 서명한 데 이어 이튿날 아침 ‘6·15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했다.
그 첫 항에는 통일을 민족 자주적으로 이룩하자는 장엄한 선언을 담았다.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 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두 국가로 나눠졌다 해도 민족은 하나이니 뭉칠 수밖에 없다는 뜻이 읽힌다. 이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밝혔던 민족당사자 원칙과도 상통한다. ‘남쪽의 국가연합과 북쪽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가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는 둘째 합의사항은 혹여 디제이를 색깔론으로 비난해온 냉전수구세력이 물고 늘어질 여지가 보여 염려되기도 한다. 셋째 항의 이산가족 상봉 상설화는 김 대통령이 의지를 갖고 관철시킨 듯 보인다. ‘남과 북은 경제협력을 통하여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라고 표현한 넷째 항은 참으로 의미있는 중요한 합의다. 지금 북한 주민들이 겪고 있는 굶주림은 안보위협보다 더 심각한 위협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항에는 합의사항들을 빠른 시일 안에 실현할 수 있는 조치에 대한 합의사항이다. 특히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도록 정중히 초청하였으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방문하기로 하였다’는 대목이 중요하다. ‘신변안전’을 염려하는 김 위원장 쪽에서는 다소 불안할 수도 있겠지만, 그의 답방은 국가연합제, 나아가 통일의 문을 여는 중대한 전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앞으로 과연 합의사항을 남북이 다 같이 성실하고 신속하게 실천해 나갈 수 있을까 하는 일말의 불안감도 떨쳐버릴 수 없다. 우선 합의내용 가운데 긴장완화와 평화정착의 의제가 빠진 것 같아 아쉽다. 2차 정상회담이 서울에서 열리게 된다면, 그때는 군사대립 해소 방안이 반드시 논의되고, 협의되고, 합의되기를 바란다.
또 한가지, 이번 ‘6·15 공동선언’의 실현을 위해서는 한반도 주변 나라들로부터 확고한 지지를 얻어내야 할 것이다. 중국은, 직전 방문한 김 위원장을 통해 이번 정상회담에 대한 지지를 밝혔다. 문제는 워싱턴이다. 아직은 클린턴 정부가 북핵 일괄타결 전략을 추진하고 있으며 정상회담에 대해서도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12월 미 대선에서 공화당의 부시 후보가 당선된다면 강경 대북정책으로 선회할 가능성이 크고, 그에 맞춰 국내 뉴라이트세력들도 6·15 공동선언 이행에 심각한 제동을 걸 가능성이 없지 않다. 정말 염려스럽다.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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