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7월 중순 김대중 대통령은 청와대로 ‘80년 5월 내란음모 조작사건 피고인’들을 초청해 한달 전 평양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북한 최고 권력기관인 국방위 위원들을 전원 참석시켜 김대통령에게 경례를 올리게 한 일화 등을 직접 소개했다. 사진은 2000년 6월13일 평양 순안공항에서 처음 만난 남북 정상이 의장대를 사열하는 모습.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142
2000년 7월19일, 청와대는 이른바 ‘5·17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 피고인’들을 만찬에 초대했다. 하지만 이날 우리는 80년 5월의 끔찍했던 비탄을 되새기지 않았다. 대신 한달 전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의 소중한 소회를 김대중 대통령에게 직접 들을 수 있었다.
6월14일, 김정일 위원장은 북한 최고권력기관인 국방위원회의 위원들을 모두 모아 김 대통령에게 일제히 거수경례를 시켰다. 오랜 세월 증오해온 ‘괴뢰집단의 최고지도자’에게, 선군정치와 강성대국을 총칼의 힘으로 추진하고 있는 주역들이 정중하게 인사하는 모습은 일종의 희극 같기도 하다. 그러나 분단과 증오를 뛰어넘으려면 이제는 서로 존경의 경례를 붙일 수 있어야 한다. 이는 김 위원장의 막강한 장악력을 과시한 셈이기도 하다. 또 정상회담의 위력이기도 하다.
김 대통령은 이날 만찬회의에서 ‘6·15 공동선언’의 내용면에서는 우리가 득을 보았고 김 위원장은 대내외 선전 효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했다. 특히 김 위원장이 햇볕정책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했다. 아마도 김 위원장은, 김 대통령이 미·일의 최고지도자들에게 평양에 직접 가보도록 권고했다는 얘기를 듣고 햇볕정책이 북한을 고립시키거나 옥죄기 위한 국제공조 정책이 아님을 확인한 듯하다. 또한 중국 방문 때도 최고지도자를 통해서 디제이의 햇볕정책의 의도가 한반도 평화에 있음을 확인한 듯하다. 나는 이 말이 퍽 반가웠다. 2년 전 베이징에서 전금철 책임참사를 만나 햇볕정책을 설명하느라 애썼던 나로서는 정말 흐뭇한 진전이 아닐 수 없다.
이날 김 대통령의 이야기 중에서 북이 대남 대응 전략을 바꾼 과정도 흥미로웠다. 심각한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해 이른바 ‘통미봉남책’을 써왔던 평양은 지난 4월 디제이의 ‘베를린선언’을 살펴본 뒤 ‘통남’으로 선회했다고 한다. 역시나 남북의 정치적 성명을 읽을 때는 행간에 숨은 깊은 뜻을 헤아리는 지혜가 필요하다.
두 정상은 남북 경제협력에 대해 가장 적극적으로 대화를 했다. 김 대통령은 군을 동원해서라도 문산과 장단까지 경의선을 복구할 용의가 있으며, 나아가 철원에서 원산까지 철로를 잇고 이를 통해 시베리아를 거쳐 파리까지 갈 수 있는 ‘철의 실크로드’를 남북이 함께 건설해 나가자고 제의했다고 한다. 더불어 김 대통령은 한반도에서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고, 놀랍게도 김 위원장은 공동성명에서 듣기 좋은 레토릭보다는 실리와 성과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했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미 국무부는 북한을 포함한 반미적 국가들에 사용한 부정적 표현을 바꾸려 하고 있다. 대단한 변화다. 북한·이라크·이란·시리아 등을 지목했던 ‘로그 스테이트’(불량깡패 국가)라는 표현 대신 ‘스테이트 오브 컨선’(우려 대상국)으로 쓰기도 했다. 미국과 관계 개선을 원한다면 ‘관심의 초점이 되는 국가’라는 훨씬 세련된 표현을 써주겠다는 것이다. 여하튼 화해 지향적인 표현의 변화가 실제의 변화를 정직하게 드러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8월 들어서도 언론에서는 ‘6·15 공동선언’에 따른 국민들의 여러 반응을 보도하고 있다. 특히 야당은 김 대통령을 좌파로 몰려고 한다. 한 야당 국회의원은 청와대를 지칭해 노골적으로 친북세력이라고 비난했다. 그렇다면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이 친북인사요, 국민들도 친북세력이라는 뜻인가? 지나치게 편향된 수구적 논리가 아닐 수 없다.
마침 그즈음 한 월간지에 기고한 글을 통해 나는 ‘남남 대화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남북을 비교할 때, 북쪽에서는 ‘북북 대화’가 절박하지 않다. 최고지도자를 중심으로 똘똘 뭉친 일사불란한 체제이니까. 그런데 남쪽은 열린 민주사회인데도 ‘남남 대화’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 땅의 냉전세력이 일종의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처럼 독선적인 닫힌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8월20일, 김 대통령은 박정희 기념관 건립에 200억원의 국고보조금을 지원하기로 했다. 디제이피(DJP) 체제에서 어쩔 수 없는 결정으로 보이나, 이는 역사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할 것이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성장이라는 업적도 따지고 보면 이 땅의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들 그리고 그들의 딸과 아들들의 피눈물 나는 희생으로 이뤄진 것이다. 군사쿠데타·인권유린·언론탄압·냉전적 억압통치 등등 엄연한 비극적 현실을 외면하는 기념관이 무슨 역사적 가치가 있겠는가?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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