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0월9~14일 필자(가운데)는 북한 노동당 창건 55돌 기념행사에 초청받아 서울 김포공항에서 고려항공을 타고 열흘 남짓 만에 두번째 방북을 했다. 평양으로 가는 기내에서 필자는 우여곡절 끝에 남쪽 참관단 40여명을 대표하는 단장으로 뽑혔다.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145
2000년 10월4일, 북쪽 민화협(민족화해협의회)에서 ‘조선노동당 창건 55돌을 맞아 10월9~14일 평양을 방문해 기념행사에 참관해달라’며 초청장을 보내왔다. “우리는 역사적인 북남공동선언 이행에 이바지할 실천적 방도를 협의하기 위하여 상지대 총장 한완상 선생과 이부영 선생, 김근태 선생, 박형규 선생을 평양에 초청하는 바입니다. 이 기회에 우리의 명절인 조선노동당 창건 기념일도 우리와 함께 뜻깊게 쇠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방문 경로는 3국을 경유하여 오는 것이 좋겠다고 봅니다. 이미 우리 정부, 정당, 단체 합동회의에서 남측의 여러 정당, 단체, 대표들을 초청한 조건에서 선생들이 평양을 방문하는 데 다른 문제가 없으리라고 봅니다. 우리는 선생들을 따뜻이 환대할 것이며 무사귀환을 보장할 것입니다. 사증 속에 필요한 선생들의 인적사항(이름, 성별, 생년월일, 국적, 민족별, 직위, 거주지, 여권종류, 여권번호)을 민족화해협의회 앞으로 긴급히 보내주기 바랍니다.”
나는 이 초청을 받아들여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6·15 공동선언을 실천하는 일이니 마땅히 가야 하는데, 남북 교차관광으로 백두산을 거쳐 평양을 다녀온 지 2주도 안 되는 이 시점에 또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런데 박재규 통일부 장관이 전화를 해서는 꼭 가달라고 부탁했다. 정부로서는 이번 방북 초청 인사들 중 상당수가 민노당과 민주노총 등 상대적으로 강성인 진보세력이어서 걱정이 되었나 보다. 그래서 내가 가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 듯했다.
10월9일 김포공항에 도착해 보니 40여명의 방북자들이 모였다. 우리 정부로서는 이들에게 뚜렷한 지침을 주지도 않았고 줄 수도 없었다. 공항에는 이미 북쪽에서 보낸 고려항공기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민주노총에서 재판 계류중이어서 방북 허가를 받지 못한 초청자들도 함께 가게 해달라고 우리 통일부 쪽에 요청하면서 한참을 옥신각신했다. 다른 일행들은 잠시나마 영문도 모른 채 인질처럼 잡혀 있어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비행기에 막 타려는 순간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과 몇 사람이 나타났다. 원래 초청자 명단에는 없었는데 아마도 북쪽에서 나중에 따로 초청한 듯하다.
기내에 올라 맨 앞자리에 앉으니, 북쪽 민화협의 이관익 사무국장이 우리를 순안공항까지 안내할 책임자라고 인사를 한다. 지난번 백두산 교차관광 때 만나 구면인 그는 내게 누가 우리 방문단의 대표단장인지 물었다. 나는 모른다고 했다. 실제로 몰랐다. 그러니 비행기 안에서 단장을 선출해야 할 판이다. 어디선가 김용태 민예총 부위원장이 나를 단장으로 모시자고 소리 높여 제의했는데 뒷좌석 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러 단체의 책임자들이 뒤쪽에 모여 열띤 의논을 하는 듯했다. 한 시간쯤 지나 비행기가 평양 상공에 이를 무렵 누군가 나를 단장으로 선출했다고 발표했다.
결국 그렇게 얼결에 단장을 맡게 된 나는 문익환 목사의 부인인 박용길 장로와 함께 제일 먼저 비행기 트랩을 내려왔다. 순안공항에는 수백명이 나와 꽃술을 들고 환영했고 벤츠 40여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11호차를 타고 숙소에 도착했는데, 김영성 북쪽 민화협 준비위 부위원장이 급히 뛰어와 ‘단장님인 줄 몰라서 1호차에 모시지 못했다’며 정중히 사과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평양 쪽에서는 오종렬 선생을 단장으로 알고 그를 1호차에 배정했던 것이다. 여하튼 나는 단장으로서 우리를 ‘평화참관단’이라고 소개하기로 했다.
이번 두번째 평양 방문에는 또 한가지 작은 혼선이 있었다. 그때 나는 경실련 산하 통일협회 이사장도 맡고 있었는데 북쪽에서는 경실련과 같은 단체인 줄 알고 그쪽으로도 내 초청장을 보냈던 모양이다. 그런데 당시 경실련 사무총장인 이석연 변호사 등은 단오절이나 개천절 같은 남북 공통 명절이면 좋지만 ‘북한 노동당 55돌 기념행사’에는 참석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불참을 통보했다고 한다. 다행히 나는 상지대 총장으로도 초청장을 받았기에 방북에는 지장이 없었다. 하지만 통일협회 회원들은 보수언론의 비난과 비판을 지나치게 의식한 경실련의 불참 결정을 못내 아쉬워했다.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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