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월29일 필자는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국민의 정부 초대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임명장을 받고 곧바로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에서 ‘교육인적자원부’ 현판식을 했다. 전날 장모상으로 빈소에서 임명 소식을 받고 빌려서 매고 나온 적벽돌색 넥타이를 빌미로 <조선일보>는 ‘사상적 편향’이라고 비꼬기도 했다.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148
2001년 1월1일. 올해는 한반도에 평화가 착실하게 뿌리내리게 되길 바란다. 지난해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에서 낳은 ‘6·15 공동성언’이 앞으로 남북관계 개선과 평화정착을 이룩하는 데 실효성 있는 기준이자 마침내 한반도를 평화통일로 이끌어가는 역사적 지침이 되어야 할 것이다.
1월6일 나는 <문화방송>에 출연해 1시간가량 ‘평화와 통일’에 관해 강연하면서, 남쪽의 냉전수구세력에서 나타나는 몇 가지 신화적 확신을 지적했다. ‘북한 불변론’이 그 하나요, ‘남북관계 변화의 속도조절론’이 그 둘째요, 정상회담 같은 파격적 관계 전환은 이르다는 ‘시기상조론’이 그 셋째요, 남쪽의 진보세력이 북쪽에 너무 많이 퍼주어 김정일 권력을 강화시켜준다는 ‘퍼주기론’이 그 넷째다. 이런 객관적 근거가 희박한 주장, 곧 신화적 주장은 남북관계 악화를 통해 국내 기득권을 강화하려는 이데올로기적 주장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한달쯤 뒤 이 강연이 큰 시련을 안겨주게 될 줄 그때는 상상조차 못했다.
1월22일 북한 김정일 위원장은 상하이를 방문했다. 중국식 국가자본주의의 화려한 꽃과 열매를 보고 크게 놀란 듯하다. 일종의 천지개벽 같은 모습을 확인하고 충격을 받은 듯하다. 북한이 살 길은 중국처럼 개방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특히 미국 정부가 쥐고 있는 지렛대를 활용할 수 있도록 남쪽 정부가 적극 권장해야 한다. 즉 미국이 북한의 체제 안전을 확실하게 보장해주는 한편 경제난 해소를 위해 협력하도록 해야 한다.
1월25일. 뜻밖에 청와대에서 한광옥 비서실장이 전화를 했다. 다음날 점심때 롯데호텔에서 만난 한 실장은 ‘김대중 대통령께서 한국을 21세기 지식기반사회로 발전시키겠다는 의지가 강하다’며 특히 대학교육의 경쟁력을 키우도록 교육부를 인적자원을 개발하는 총괄부서로 확대하고, 장관을 부총리로 격상한다고 한다. 곧 새로 생길 교육부총리 자리에 나를 불러내고 싶어한다고 했다. 나는 고민해보겠다고 답했다. 이런 아이러니가 있나. 8년 전 와이에스가 내게 교육부를 맡겼다면 문민정부와 관계가 그렇게 꼬이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런데 디제이는 나를 통일정책이 아니라 교육정책 개혁에 쓰려고 한다. 물론 교육부도 해볼 만한 큰 도전임이 틀림없다. 다만, 내가 초대 교육부총리가 된다면 수구냉전언론과 정치권에서 가만히 있을까. 무거운 마음으로 원주로 돌아왔다.
1월28일, 수년 동안 치매를 앓던 장모님께서 소천하셔서 장례 준비로 경황이 없는데 이튿날 아침 9시20분께 청와대에서 나를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겸 부총리로 임명했다고 발표했다. 오전 10시쯤에는 김 대통령께서 친히 전화를 해서 축하를 해주셨다. 나는 대통령님을 역사의 시각에서 보필하겠다고 대답했다. 오후 3시 청와대에서 임명장을 받은 뒤 곧장 교육부 청사로 가서 ‘교육인적자원부’ 새 명패를 내걸었다.
나는 교육부 관료들에게는 개혁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라고 강조하기 위해 ‘접시 깨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기존의 잘못된 관행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간혹 접시를 깨는 것은 탓할 일이 아니라고 했다. 무사안일·복지부동하는 관료들은 질책할 것이지만, 개혁과 개선을 위해 힘쓰다가 실수를 한다면 칭찬받을 것이라고 했다. 또 개혁의 주체는 학생·교사·학부모임을 분명히 했다. 이들 주체를 개혁의 대상으로 변질시켜서는 안 된다고 했다.
대체로 나의 교육부총리 임명에 대해 진보 단체와 언론은 환영했고, 보수언론에서는 관망하겠다고 했고, 수구세력은 비판적이었다. <조선일보>(1월30일치)는 내가 임명장을 받을 때 맸던 넥타이의 적벽돌 색깔을 꼬투리 삼아 ‘사상적 편향’을 드러낸 것인 양 비웃었다. 상복 차림으로 장모님 빈소에서 문상객을 맞다가 허겁지겁 동생에게 빌려 매고 갔을 뿐인데 말이다.
야당인 한나라당은 “과거 문민정부 시절 통일부총리로 급진적 통일론과 대북정책을 펴다 물러난 인물”, “향후 국정운영의 기본방향을 대북문제와 연계해 승부를 걸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본다” 식으로 비난과 경계심을 드러냈다. 평소 교육문제에 가장 적극적으로 발언해온 <중앙일보>(1월30일치) 사설에서 ‘교육부총리가 먼저 할 일’로 신자유주의 경쟁원리를 적용하라는 주문을 했다. 교육 현장에 사회적 다윈주의 경쟁을 도입하면 무서운 정글이 될 수 있다는 비극적 사실을 보수언론은 진정 모른단 말인가! 같은 날 <한겨레>의 사설은 “우리는 한완상 부총리에게 기대를 건다”며 “그를 ‘급진적’이라고 낙인찍고 예의 ‘색깔론’을 들먹이며 흠집 내려는 일부 보수세력의 시각이야말로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고 쐐기를 박았다.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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