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2월 중순 필자(오른쪽)는 국민의 정부 초대 교육부총리 취임 이후 처음으로 국회에 출석해 김용갑 의원을 비롯한 한나라당 의원들의 집중적인 ‘사상검증’ 공세에 시달렸다. 사진은 2월15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대정부 질문이 진행되는 동안 한화갑(왼쪽) 당시 민주당 최고위원과 답변을 논의하는 모습이다.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149
2001년 2월1일 국민의 정부 초대 교육부총리로서 나는 각 정당 대표에게 찾아가 정중하게 취임 인사를 했다.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와의 만남은 다소 어색했다. 문민정부에서 감사원장과 통일부총리로서 함께 일한 사이인데도 그는 나를 퍽 경계하듯 맞이했다. 지난날 양심적 대법원 판사로서 그 고매한 인품은 그사이 정치 탁류에 시달려서인지 흐려진 듯하다.
2월5일 국회 본회의가 열려 간단한 인사말을 한 뒤 국무위원석으로 가는데 앞자리의 한 한나라당 의원이 ‘창발력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창조적 발상의 능력’이라는 뜻으로 서울대 교수 때부터 즐겨 사용해온 표현이어서 나는 그저 간단히 창의력이라고 대답했다. 왜 그걸 묻는지 궁금했으나 곧 잊고 말았다.
2월26일에는 국회 교육상임위원회가 열렸다. 내가 초대 교육부총리로 임명되자마자 한나라당의 분위기는 험악했던 것 같다. 며칠 전 교육상임위 소속인 이재오, 현승일 의원을 점심에 초대했더니 현 의원이 “선배님, 왜 하필 이런 때 교육부총리로 오시느냐”고 볼멘소리를 했다. 이 총재 이하 적지 않은 야당 의원들이 나를 벼르는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첫 상임위에서 나는 다소 긴장했는데 야당의 권철현·황우여 의원이 질문을 하긴 했지만 부드럽게 잘 끝났다.
그런데 다음날 2월27일, 국회 예산결산위원회에서 김용갑 의원은 작심한 듯 나에 대한 공격적 질문을 퍼부었다. 그가 노태우 정권에서 청와대 사회문화수석일 때 나는 서울대 교수로서 따로 만나 ‘학원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눈 적도 있었다. 그러나 8년 전 통일부총리 때 그랬던 것처럼 그는 이날도 오후 2시부터 밤늦도록 마치 사상검증하듯 물고 늘어졌다.
그는 지난해 10월 북한 조선노동당 창건 55돌 기념행사 때 남쪽 참관단이 서울을 떠나면서 ‘그리운 형제의 명절에 사랑과 축하의 마음을 전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전혀 사실무근이었기에 그런 적 없다고 잘라 부인했더니, 그는 ‘노동당을 형제로 보느냐’고 시비 걸듯 되물었다. 참관단장으로서 내가 했던 관례적 인사말들을 꼬투리 잡던 그는 내 해명은 듣지 않은 채, 앞으로 국가보안법을 인권 탄압하는 악법으로 가르칠 것인지, 안보교육은 어떻게 해나갈 것인지를 밝히라고 하더니 끝내는 ‘북한을 주적으로 보느냐’고 물었다. “1991년 12월 노태우 대통령 때 발표된 남북기본합의서에 벌써 북한을 주적에서 동반자 개념으로 바꾼 내용이 나옵니다.” 나는 김 의원을 정면으로 보면서 부드럽되 단호하게 선언하듯 말했다. “좋은 질의십니다. 이때까지 (북한은) 주적이었습니다. 지금도 주적입니다. 앞으로는 주적을 우리의 동반자로 바꾸는 그런 평화의 교육을 할 생각입니다.”
그는 다시 ‘박정희기념관 반대 국민연대 고문’을 맡고 있냐면서 청소년들에게 박 대통령을 극복·청산의 대상으로 교육시킬 것인가를 따져 물었다. “(질문을 해줘서) 고맙습니다. 박 대통령을 사모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이 십시일반 돈을 내서 기념관을 건립하는 것에 대해 절대로 반대할 리가 없습니다.” 나는 고문단의 한 사람으로 다만 국가재정으로 기념관을 건립하는 것은 반대한다고 했다.
또 내 개인 사상과 이념을 탓할 생각은 없으나 자유민주주의를 비판하는 내가 교육부총리로 있는 것은 문제라고 다시 강조하기에, 준비된 답변을 했다. “저는 과거 민주화운동의 일각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거기에 대해 편향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 도도한 세계사적·민족사적 민족화해와 평화의 물결을 편향적이라 생각하지 않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교육을 하려면 전쟁보다는 평화를 가르쳐야 된다고 생각하며, 싸움보다는 화해를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에, 그것이 우리 헌법 정신인 자유민주주의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이날 밤 9시17분 예결위가 속개되자, 김 의원은 다시 질의에 나서 오후 내내 나와 논쟁을 했던 문제들을 계속 거론했다. 대체로 지엽적인 얘기들이었기에 더 피곤한 노릇이었다.
독재에 맞선 사형수였던 디제이가 대통령이 되고, 6·15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공동선언도 나왔고, 그 정신을 전세계가 높이 평가하는 노벨평화상까지 받은 새천년에도, 우리의 국회에서는 이처럼 시대착오적인 냉전적 갑론을박을 계속해야만 한다는 말인가. 나는 교육부를 맡았는데도 8년 전 통일부총리 때처럼 냉전용사들의 공격을 받고 보니, 한반도는 아직도 차갑고 무서운 냉전 동토에 갇혀 있음을 절감하게 된다. 을씨년스럽다. 디제이피(DJP) 체제라 해도 김대중 대통령은 이제 노벨평화상 수상자로서의 긍지를 가지고, 이 차갑고 무섭고, 비이성적인 체제요, 문화요, 의식이요, 종교가 되어버린 냉전체제를 녹이는 일에 더욱 용기 있게 앞장서야 할 것 같다. 아니 앞장서야 한다.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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