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ident-elect Park Geun-hye waves to supporters at Saenuri Party headquarters in Seoul’s Yeouido neighborhood after receiving news of her election victory, Dec. 19. (by Kang Chang-gwang, staff photographer)
박근혜 당선인 일대기
1952년 2월2일에 태어난 박근혜 당선인은 대통령 취임 전에 61번째 생일을 맞는다. 10대 때부터 ‘대통령 딸’이란 그림자가 평생 드리워졌던 그의 인생은, 60대에 들어 본인이 대통령으로서 새로운 그림을 그리게 됐다.
박 당선인은 대구 삼덕동 셋집에서 태어난 뒤, 군인이었던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임지를 따라 광주와 서울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서울 동숭동, 노량진 등을 거쳐 신당동 집에 이사한 해(1958년)에 장충초등학교에 입학했고, 1964년 이 학교를 졸업했다. 정몽준 공동선대위원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등과 동기동창이다. 그는 자서전에서 신당동 시절을 돌이켜, “모래주머니놀이, 고무줄놀이, 공기놀이 세 종목을 두루 잘하면 동네 골목대장으로 등극할 수 있었는데, 나는 골목대장이 되기에 충분했다. 승부욕에 불타 정말 열심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무렵 전투 이야기가 나오는 역사소설을 좋아했고, 특히 <삼국지>의 조자룡을 좋아해서, “돌이켜 보건대 나의 첫사랑은 조자룡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그가 등장할 때마다 가슴이 두근두근 설렜다”고도 했다.
그가 초등학교 4학년(9살)이던 1961년 5월15일 밤, 쿠데타를 위해 집을 나서던 박정희 당시 소장에게 어머니 육영수씨는 “근혜 숙제 좀 봐주세요”라며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만남을 제안한다. 박정희 소장은 어린 딸이 숙제를 하는 모습과 장모 이경령씨 및 근령·지만 남매가 잠든 모습을 잠시 지켜본 뒤 집을 떠났고, 쿠데타에 성공했다.
5·16으로 집권한 박정희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거쳐 제5대 대통령이 됐고, 박 당선인도 장충체육관 근처의 의장 공관을 거쳐 청와대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곧장 거처를 옮긴 것은 아니었다. 육영수씨는 박 당선인과 동생 근령씨를 서울 외가에 맡겼고, 박 당선인은 성심여중에 들어간 뒤에도 첫해를 기숙사에서 보낸 뒤에야 청와대에 ‘합류’했다. 육영수씨가 ‘자신이 가진 것을 남에게 자랑해선 안 된다’며, 자녀들의 특권의식을 염려했던 탓이다. 박 당선인은 “청와대에서 산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일이다. 하지만 어린 내게 청와대 생활이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청와대 생활은 하지 말아야 할 금기사항이 빼곡한 날들이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정몽준·김승연과 초등학교동창
“내 첫사랑은 삼국지 조자룡” 승용차 통학은 어림없었다. 중2 때 학교가 교실 확장을 한다며 기숙사를 폐쇄하자, 박 당선인은 청와대에서 학교까지 전차로 통학을 했다. 대통령 딸이 전차를 타고 다닌다는 소문이 퍼진 어느 날, 전차 차장이 성심여중 배지를 단 박 당선인에게 “너희 학교에 대통령 딸이 다닌다면서? 예쁘게 생겼니? 공부는 잘하니? 키가 얼마만 하니?”라고 꼬치꼬치 캐물었다. 박 당선인은 “그렇다나 봐요. 글쎄요. 잘하나 봐요. 저만할 거예요”라고 답하며 시치미를 뗐다고 자서전에 썼다. 성심여중 시절 단짝 친구들 몇명이 청와대에 놀러와 방을 보고는 “뭐야, 공주처럼 꾸며놓고 사는 줄 알았는데…”라며 실망했다고도 한다. 친구들 얘기로도, 그 시절 박 당선인의 점심 도시락은 보리밥에 감자조림 반찬이 잦았고, 친구들의 일제 학용품을 보고 “예쁘다”며 부러워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대통령 딸’의 생활이 마냥 평범할 수는 없었다. 그가 중학교에 입학하자 신문들은 “영애 근혜양 합격”이란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성심여고 3학년 때는 일본 요코하마에서 열린 세계 최대 규모의 유조선 진수식에 참석했고, 당시 신문엔 “유니버스 코리아호가 영애 근혜양이 샴페인을 터뜨리는 가운데 진수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가 대학생이 됐을 때 박정희 전 대통령은 10년을 집권한 상태였고, 이후 유신을 통해 장기독재에 돌입했다. 박 당선인은 어머니를 대신해, 1972년 스페인 유조선 진수식, 1973년 미국 하와이에서 열린 ‘한국 이민 70주년 경축 행사’ 등에도 참석했다. 그는 “대학생이 되자 갑작스런 해외방문 일정이 이어졌다”, “나도 모르는 사이 차근차근 외교 훈련을 쌓아가고 있었다”고 말했다. 초등 4학년 숙제하던 밤
아버지 쿠데타하러 집 나서 같은 시기 국내에선 사회문제에 적극 동참하지 못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1970년 박 당선인은 역사 전공을 바라던 어머니의 뜻을 따르지 않고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했다. “산업 역군이 되어 나라에 기여하고 싶다”는 이유였다. 이듬해 ‘10월 유신’ 탓에 대학가에는 반정부 시위가 잇따랐다. 박 당선인은 자서전에서 “한쪽에서는 데모가 벌어지기도 했지만 대체로 캠퍼스 안은 평화로웠다”, “점점 학과 공부에 매달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고 썼다. 이 무렵 대학 동기들을 청와대로 초청한 다과회 자리에서, 누군가 육영수씨에게 “친구끼리 야자해도 괜찮으냐”고 물었다가 “서로 존댓말을 썼으면 좋겠다”는 답변을 들었다. 박 당선인은 지금까지도 과 동기들과 서로 존댓말을 쓴다. “박정희 대통령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던 동기 남학생이 제적되자 어머니에게 얘기해 그 학생을 취업시켜 준 일도 있다. 1974년 이공계 수석으로 대학을 졸업한 박 당선인은 곧장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비행기 시간에 늦어 급하게 떠나는 자동차를 향해 뒤에서 한참 손을 흔들던 모습이 그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다. 여섯달 뒤 육영수씨의 갑작스런 서거로 귀국해야 했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내내 울었다.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처럼 찬바람이 불었다. 밥을 먹어도 허기가 지고 잠을 자도 잔 것 같지가 않았다. 한동안 산송장처럼 지냈다.” 박 당선인은 그런 심정으로 스물두 살의 ‘퍼스트레이디’가 됐다. 이즈음 박 당선인은 이력이 불분명한 최태민이라는 인물을 만나게 된다. 최태민씨는 흔히 목사로 불리지만, 불교 승려가 된 적이 있다거나 천주교 세례를 받은 적이 있다는 기록도 있다. 박 당선인이 퍼스트레이디 경력의 핵심인 새마음운동을 전개하게 된 것도 최씨의 적극적인 권유가 배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씨가 각종 전횡을 저지른다는 등의 의혹 탓에 박정희 전 대통령도 불만이 컸던 것으로 전해진다. 박 당선인은 결혼을 하지 않은 채 퍼스트레이디로서의 ‘바깥일’로 20대를 보냈고,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이 기업체를 방문하거나 국토 시찰을 나설 때 수행했다. 아버지와 아침식사를 할 땐 조간신문을 읽어주며 주요 현안에 대한 생각을 나누기도 했다. 정부의 잘못을 지적해 아버지에게 건의하기도 했다. 부가가치세 도입에 대한 부정적 여론, 김영삼 신민당 총재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및 의원직 제명이 잘못된 것이라는 의견도 아버지에게 전했다고 한다. 그의 이런 ‘임무’는 어머니(육영수)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는 게 당시 청와대 관계자의 증언이다. 청와대 안의 ‘야당’이었던 어머니의 역할을 대신했다는 것이다. 박 당선인은 유신이 막바지로 치닫던 부마항쟁 시기엔, 진압에 투입된 공수특전단의 철수를 직접 아버지에게 건의하기도 한 것으로 전해진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피살당했다. 다음날 새벽, 박 당선인이 이 소식을 전해준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전방에는 이상이 없습니까”라고 말했다는 건 익히 알려진 얘기다. 9일장을 치른 뒤 박 당선인은 15년 만에 청와대를 떠났다. “핏물이 가시지 않은 아버지의 옷을 빨며 남들이 평생 울 만큼의 눈물을 흘렸다. 죽을 만큼 힘든 고통의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핏물 가시지 않은 아버지옷 빨며
남들 평생 울 만큼 눈물 흘렸다” 비극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새로 득세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신군부가 박정희 정권과의 차별화를 도모하면서, ‘박정희의 사람들’이 등을 돌리는 것을 보게 된 박 당선인은 권력의 쓴맛을 곱씹었다. 박정희 시대는 부정, 부패, 비리의 시대로 규정됐고, 박 당선인은 이를 아버지와 그 업적에 대한 폄하로 받아들였다. “퍼스트레이디 대행으로 있는 동안 나라 전체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권력 상층부에 있었지만, 아버지 사후에는 밑바닥까지 경험했다. 수많은 매도 속에 몇 년의 시간을 버티며 벼랑 끝에 위태롭게 서 있었다.” 전두환 정권 시기의 대외활동은 육영재단·영남재단·정수장학회 일에 초점이 맞춰졌다. 1979년 전두환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에게 받은 ‘청와대 금고에 있던 돈’ 6억원, 1982년 경남기업 신기수 회장에게 받은 성북동 집(300평) 등 재산이 생겼다. 6억원에 대해선 최근 방송 토론에서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전두환 정권 마지막 해인 1987년이 돼서야 국립묘지에서 아버지 추도식을 열 수 있었다. 그전까지는 집안 제사로 대신했다. 이듬해 노태우 정권이 들어선 뒤부터는 박정희·육영수 기념사업회를 발족(1988년)시키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업적을 담은 영화를 제작하고 책을 내는 등 아버지를 ‘재평가’하는 활동을 본격화했다. 그러나 이 무렵 다시 등장한 최태민씨의 전횡 논란에서 촉발한 육영재단 분란 끝에 박 당선인은 육영재단 이사장직을 내놓고 다시 공개석상에서 사라졌다. 외환위기뒤 박정희향수 타고 국회 입성…‘선거 여왕’ 승승장구 1997년 박 당선인은 세상의 주목을 받으며 화려하게 돌아왔다. 한나라당에 입당해 이회창 당시 대선 캠프의 고문을 맡으면서 정계에 입문한 것이다. 외환위기로 경제상황이 악화하면서, 박정희 정권 시기의 고도성장에 대한 사회적 향수가 널리 퍼졌던 시기다. 그의 정치권 데뷔는 ‘박정희의 딸’이었기에 가능했다. 이듬해 대구 달성 보궐선거에서 여권 실세였던 엄삼탁씨를 상대로 승리를 거둘 정도로 성공적이기도 했다. 이회창에 반기 들었다가 ‘참패’
유세중 피습 “남은 인생은 덤” 2002년엔 집단지도체제 도입 및 국민참여경선 실시 등 정치개혁을 요구하며 이회창 총재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다. 수용되지 않자 탈당해 한국미래연합을 만들었다가 지방선거에서 참패했다. 결국 그해 말 대선 직전 한나라당으로 돌아왔고, 대선 이후 ‘차떼기 정당’의 오명으로 휘청댄 당이 ‘탄핵 역풍’을 맞은 17대 총선(2004년)에서 구원투수로 나섰다. 당 대표를 맡은 그는 천막당사로 옮기고 연수원을 매각하는 등 당 쇄신을 통해 총선에서 121석을 확보했고, ‘예상외 선전’이란 평가를 얻었다. 2006년 지방선거 직전엔 서울 신촌 유세 중 피습을 당해 큰 수술을 받았다. 그는 “앞으로 남은 인생은 덤”이라고 했지만, 깨어난 직후 꺼낸 첫마디 “대전은요?”가 선거 판세를 역전시킨 것이 오히려 더 큰 화제가 됐다. 높은 대중적 인기를 바탕으로 치르는 선거마다 승리를 거두면서 ‘선거의 여왕’이란 명칭도 생겼다. 박 당선인에게 올해 대선은 두번째 도전이었다. 사실상의 대선이라 불릴 만큼 치열했던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선 이명박 당시 후보에게 불과 2천여표 차로 패해 고배를 마셨다. 당시 그는 “저 박근혜, 경선 결과에 깨끗하게 승복합니다”라는 승복 연설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후 이명박 정부 내내 ‘차기 대세론’을 형성해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발휘하며 이 대통령과 대립과 협력을 반복했다. 2008년 총선을 앞두고 측근들이 대거 낙천하자, 정당 사상 유례없이 개인의 이름을 당명으로 쓴 ‘친박연대’가 등장하기도 했다. 박 당선인은 당 공천에서 낙천한 뒤 무소속으로 총선에 나선 친박 의원들에게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 “살아서 돌아오라”는 말로 이들을 간접적으로 도왔다. 지난해 서울시장 보궐선거 패배 뒤 위기에 빠진 한나라당은 다시 그를 구원투수로 불렀다. 박 당선인은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당헌에 복지와 경제민주화를 도입하는 등 쇄신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결국 패배할 거란 전망이 우세했던 19대 총선을 승리로 이끌며 다시 한번 대세론을 확인시켰다. 이후 당내 대선 후보 경선에서 무난한 승리를 거뒀고, ‘100% 대한민국’, ‘준비된 여성대통령’ 등의 캐치프레이즈를 내걸며 대선 가도를 달려왔다. 선거전 초반, 인혁당 관련 발언 등 과거사 문제와 안철수 후보의 등장 등으로 한때 지지율에서 야권 단일후보에게 뒤지기도 했다. 그러나 보수층의 단단한 결집을 바탕으로 18대 대선 승리를 확정짓고, 대한민국의 첫 여성 대통령이 되어, 청와대로 돌아간다. 김외현 기자 oscar@hani.co.kr
“내 첫사랑은 삼국지 조자룡” 승용차 통학은 어림없었다. 중2 때 학교가 교실 확장을 한다며 기숙사를 폐쇄하자, 박 당선인은 청와대에서 학교까지 전차로 통학을 했다. 대통령 딸이 전차를 타고 다닌다는 소문이 퍼진 어느 날, 전차 차장이 성심여중 배지를 단 박 당선인에게 “너희 학교에 대통령 딸이 다닌다면서? 예쁘게 생겼니? 공부는 잘하니? 키가 얼마만 하니?”라고 꼬치꼬치 캐물었다. 박 당선인은 “그렇다나 봐요. 글쎄요. 잘하나 봐요. 저만할 거예요”라고 답하며 시치미를 뗐다고 자서전에 썼다. 성심여중 시절 단짝 친구들 몇명이 청와대에 놀러와 방을 보고는 “뭐야, 공주처럼 꾸며놓고 사는 줄 알았는데…”라며 실망했다고도 한다. 친구들 얘기로도, 그 시절 박 당선인의 점심 도시락은 보리밥에 감자조림 반찬이 잦았고, 친구들의 일제 학용품을 보고 “예쁘다”며 부러워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대통령 딸’의 생활이 마냥 평범할 수는 없었다. 그가 중학교에 입학하자 신문들은 “영애 근혜양 합격”이란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성심여고 3학년 때는 일본 요코하마에서 열린 세계 최대 규모의 유조선 진수식에 참석했고, 당시 신문엔 “유니버스 코리아호가 영애 근혜양이 샴페인을 터뜨리는 가운데 진수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가 대학생이 됐을 때 박정희 전 대통령은 10년을 집권한 상태였고, 이후 유신을 통해 장기독재에 돌입했다. 박 당선인은 어머니를 대신해, 1972년 스페인 유조선 진수식, 1973년 미국 하와이에서 열린 ‘한국 이민 70주년 경축 행사’ 등에도 참석했다. 그는 “대학생이 되자 갑작스런 해외방문 일정이 이어졌다”, “나도 모르는 사이 차근차근 외교 훈련을 쌓아가고 있었다”고 말했다. 초등 4학년 숙제하던 밤
아버지 쿠데타하러 집 나서 같은 시기 국내에선 사회문제에 적극 동참하지 못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1970년 박 당선인은 역사 전공을 바라던 어머니의 뜻을 따르지 않고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했다. “산업 역군이 되어 나라에 기여하고 싶다”는 이유였다. 이듬해 ‘10월 유신’ 탓에 대학가에는 반정부 시위가 잇따랐다. 박 당선인은 자서전에서 “한쪽에서는 데모가 벌어지기도 했지만 대체로 캠퍼스 안은 평화로웠다”, “점점 학과 공부에 매달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고 썼다. 이 무렵 대학 동기들을 청와대로 초청한 다과회 자리에서, 누군가 육영수씨에게 “친구끼리 야자해도 괜찮으냐”고 물었다가 “서로 존댓말을 썼으면 좋겠다”는 답변을 들었다. 박 당선인은 지금까지도 과 동기들과 서로 존댓말을 쓴다. “박정희 대통령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던 동기 남학생이 제적되자 어머니에게 얘기해 그 학생을 취업시켜 준 일도 있다. 1974년 이공계 수석으로 대학을 졸업한 박 당선인은 곧장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비행기 시간에 늦어 급하게 떠나는 자동차를 향해 뒤에서 한참 손을 흔들던 모습이 그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다. 여섯달 뒤 육영수씨의 갑작스런 서거로 귀국해야 했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내내 울었다.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처럼 찬바람이 불었다. 밥을 먹어도 허기가 지고 잠을 자도 잔 것 같지가 않았다. 한동안 산송장처럼 지냈다.” 박 당선인은 그런 심정으로 스물두 살의 ‘퍼스트레이디’가 됐다. 이즈음 박 당선인은 이력이 불분명한 최태민이라는 인물을 만나게 된다. 최태민씨는 흔히 목사로 불리지만, 불교 승려가 된 적이 있다거나 천주교 세례를 받은 적이 있다는 기록도 있다. 박 당선인이 퍼스트레이디 경력의 핵심인 새마음운동을 전개하게 된 것도 최씨의 적극적인 권유가 배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씨가 각종 전횡을 저지른다는 등의 의혹 탓에 박정희 전 대통령도 불만이 컸던 것으로 전해진다. 박 당선인은 결혼을 하지 않은 채 퍼스트레이디로서의 ‘바깥일’로 20대를 보냈고,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이 기업체를 방문하거나 국토 시찰을 나설 때 수행했다. 아버지와 아침식사를 할 땐 조간신문을 읽어주며 주요 현안에 대한 생각을 나누기도 했다. 정부의 잘못을 지적해 아버지에게 건의하기도 했다. 부가가치세 도입에 대한 부정적 여론, 김영삼 신민당 총재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및 의원직 제명이 잘못된 것이라는 의견도 아버지에게 전했다고 한다. 그의 이런 ‘임무’는 어머니(육영수)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는 게 당시 청와대 관계자의 증언이다. 청와대 안의 ‘야당’이었던 어머니의 역할을 대신했다는 것이다. 박 당선인은 유신이 막바지로 치닫던 부마항쟁 시기엔, 진압에 투입된 공수특전단의 철수를 직접 아버지에게 건의하기도 한 것으로 전해진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피살당했다. 다음날 새벽, 박 당선인이 이 소식을 전해준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전방에는 이상이 없습니까”라고 말했다는 건 익히 알려진 얘기다. 9일장을 치른 뒤 박 당선인은 15년 만에 청와대를 떠났다. “핏물이 가시지 않은 아버지의 옷을 빨며 남들이 평생 울 만큼의 눈물을 흘렸다. 죽을 만큼 힘든 고통의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핏물 가시지 않은 아버지옷 빨며
남들 평생 울 만큼 눈물 흘렸다” 비극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새로 득세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신군부가 박정희 정권과의 차별화를 도모하면서, ‘박정희의 사람들’이 등을 돌리는 것을 보게 된 박 당선인은 권력의 쓴맛을 곱씹었다. 박정희 시대는 부정, 부패, 비리의 시대로 규정됐고, 박 당선인은 이를 아버지와 그 업적에 대한 폄하로 받아들였다. “퍼스트레이디 대행으로 있는 동안 나라 전체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권력 상층부에 있었지만, 아버지 사후에는 밑바닥까지 경험했다. 수많은 매도 속에 몇 년의 시간을 버티며 벼랑 끝에 위태롭게 서 있었다.” 전두환 정권 시기의 대외활동은 육영재단·영남재단·정수장학회 일에 초점이 맞춰졌다. 1979년 전두환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에게 받은 ‘청와대 금고에 있던 돈’ 6억원, 1982년 경남기업 신기수 회장에게 받은 성북동 집(300평) 등 재산이 생겼다. 6억원에 대해선 최근 방송 토론에서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전두환 정권 마지막 해인 1987년이 돼서야 국립묘지에서 아버지 추도식을 열 수 있었다. 그전까지는 집안 제사로 대신했다. 이듬해 노태우 정권이 들어선 뒤부터는 박정희·육영수 기념사업회를 발족(1988년)시키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업적을 담은 영화를 제작하고 책을 내는 등 아버지를 ‘재평가’하는 활동을 본격화했다. 그러나 이 무렵 다시 등장한 최태민씨의 전횡 논란에서 촉발한 육영재단 분란 끝에 박 당선인은 육영재단 이사장직을 내놓고 다시 공개석상에서 사라졌다. 외환위기뒤 박정희향수 타고 국회 입성…‘선거 여왕’ 승승장구 1997년 박 당선인은 세상의 주목을 받으며 화려하게 돌아왔다. 한나라당에 입당해 이회창 당시 대선 캠프의 고문을 맡으면서 정계에 입문한 것이다. 외환위기로 경제상황이 악화하면서, 박정희 정권 시기의 고도성장에 대한 사회적 향수가 널리 퍼졌던 시기다. 그의 정치권 데뷔는 ‘박정희의 딸’이었기에 가능했다. 이듬해 대구 달성 보궐선거에서 여권 실세였던 엄삼탁씨를 상대로 승리를 거둘 정도로 성공적이기도 했다. 이회창에 반기 들었다가 ‘참패’
유세중 피습 “남은 인생은 덤” 2002년엔 집단지도체제 도입 및 국민참여경선 실시 등 정치개혁을 요구하며 이회창 총재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다. 수용되지 않자 탈당해 한국미래연합을 만들었다가 지방선거에서 참패했다. 결국 그해 말 대선 직전 한나라당으로 돌아왔고, 대선 이후 ‘차떼기 정당’의 오명으로 휘청댄 당이 ‘탄핵 역풍’을 맞은 17대 총선(2004년)에서 구원투수로 나섰다. 당 대표를 맡은 그는 천막당사로 옮기고 연수원을 매각하는 등 당 쇄신을 통해 총선에서 121석을 확보했고, ‘예상외 선전’이란 평가를 얻었다. 2006년 지방선거 직전엔 서울 신촌 유세 중 피습을 당해 큰 수술을 받았다. 그는 “앞으로 남은 인생은 덤”이라고 했지만, 깨어난 직후 꺼낸 첫마디 “대전은요?”가 선거 판세를 역전시킨 것이 오히려 더 큰 화제가 됐다. 높은 대중적 인기를 바탕으로 치르는 선거마다 승리를 거두면서 ‘선거의 여왕’이란 명칭도 생겼다. 박 당선인에게 올해 대선은 두번째 도전이었다. 사실상의 대선이라 불릴 만큼 치열했던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선 이명박 당시 후보에게 불과 2천여표 차로 패해 고배를 마셨다. 당시 그는 “저 박근혜, 경선 결과에 깨끗하게 승복합니다”라는 승복 연설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후 이명박 정부 내내 ‘차기 대세론’을 형성해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발휘하며 이 대통령과 대립과 협력을 반복했다. 2008년 총선을 앞두고 측근들이 대거 낙천하자, 정당 사상 유례없이 개인의 이름을 당명으로 쓴 ‘친박연대’가 등장하기도 했다. 박 당선인은 당 공천에서 낙천한 뒤 무소속으로 총선에 나선 친박 의원들에게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 “살아서 돌아오라”는 말로 이들을 간접적으로 도왔다. 지난해 서울시장 보궐선거 패배 뒤 위기에 빠진 한나라당은 다시 그를 구원투수로 불렀다. 박 당선인은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당헌에 복지와 경제민주화를 도입하는 등 쇄신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결국 패배할 거란 전망이 우세했던 19대 총선을 승리로 이끌며 다시 한번 대세론을 확인시켰다. 이후 당내 대선 후보 경선에서 무난한 승리를 거뒀고, ‘100% 대한민국’, ‘준비된 여성대통령’ 등의 캐치프레이즈를 내걸며 대선 가도를 달려왔다. 선거전 초반, 인혁당 관련 발언 등 과거사 문제와 안철수 후보의 등장 등으로 한때 지지율에서 야권 단일후보에게 뒤지기도 했다. 그러나 보수층의 단단한 결집을 바탕으로 18대 대선 승리를 확정짓고, 대한민국의 첫 여성 대통령이 되어, 청와대로 돌아간다. 김외현 기자 oscar@hani.co.kr
박근혜 당선인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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