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3월22일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장관 임명장 수여식에서 기념사진 촬영에 앞서 남재준 국가정보원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봉규 기자
[토요판] 박 대통령 ‘깨알 리더십’ 감안하면…
국정원이 또다시 정치 주체로 나섰다. 지난달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공개한 데 이어 지난 10일에는 회의록 내용에 관한 ‘대변인 성명’을 발표했다.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기밀 누설자”라는 별명으로는 성에 안 찼던 모양이다. 이번에는 아예 정치적 논란이 되고 있는 엔엘엘(NLL·북방한계선) 문제에 대해 국정원이 유권해석을 내렸다. 법제처 업무에 대한 월권이자 대선 때의 여론조작 못지 않은 정치개입이다.
게다가 국정원 성명의 내용은 사실과도 맞지 않는다. 회의록 어디에도 “남북정상이 수차례에 걸쳐 백령도 북방을 연한 엔엘엘과 북한이 주장하는 소위 ‘서해해상군사경계선’ 사이 수역에서 쌍방 군대를 철수시키고, 이 수역을 평화수역으로 만들어 경찰이 관리하는 공동어로구역으로 한다”는 합의가 없다. 국정원의 이러한 해석은 오로지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의 일방적인 주장이었을 뿐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명확하게 반박하지는 않았지만, 전체적인 맥락은 “옛날 기본합의서의 연장선에서 앞으로 협의해 나가”자는 것이었다. 실제로 정상회담 직후 열린 국방장관회담에서 우리 정부는 엔엘엘을 기준으로 등면적의 공동어로수역을 설치하자는 제안을 했다. 따라서 국정원 성명이야말로 북한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종북적’ 행위다.
음지에 있어야 할 국정원이 연이어 왜 이러는 걸까? 회의록 공개나 성명 발표처럼 외교안보적으로 중대한 사안을 국정원장이 정말 “독자적 판단”으로 한 걸까? 국정 최고책임자인 박근혜 대통령은 정말 몰랐을까?
박 대통령의 깨알 리더십을 감안하면 남재준 국정원장의 단독 플레이라는 설명은 납득하기 어렵다. 박 대통령은 며칠전 개성공단 실무 협상팀에게 “해가 지고 난 뒤에는 개성에 머물지 말라”고 지시할 정도로 모든 사안을 직접 챙기는 스타일 아닌가.
이런 의문을 품고 있던 차에 믿을만한 소식통한테 최근 “남 원장은 꺼렸지만, 박근혜 대통령의 종용으로 회의록을 공개했다고 한다. 두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고성이 나오기가지 했다고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정보기관장의 태도에 걸맞는 정보여서 당장 확인에 나섰다.
그러나, 청와대는 펄쩍 뛰었다.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12일 “100% 거짓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안보관계장관회의에서 한두차례 남 원장을 만난 것을 빼고는 지금까지 한번도 국정원장을 독대한 적이 없다. 만나지도 않았는데 무슨 종용이고 고성이냐. 회의록 공개나 국정원 성명은 청와대와는 전혀 관계없다. 국정원에서 알아서 한 일이다”고 말했다. 정보기관에 정통한 인사도 비슷한 답을 했다. 그에 따르면, 국정원 성명은 애초 박 대통령이 말한 국정원의 셀프 개혁과 관련된 부분만 준비했다고 한다. 그런데 남 원장의 지시로 엔엘엘 부분이 뒤늦게 성명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는 “엔엘엘에 대해서는 남 원장의 소신이 워낙 확고하다. 그는 최근 국정원 국정조사 문제 등으로 엔엘엘 문제가 묻히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성명에 담도록 했다”고 말했다.
권력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이들의 말인 만큼 ‘대통령 지시설’보다는 ‘남재준 거사설’이 사실에 가까울 가능성이 더 높다. 하지만, 이 경우 문제는 더 심각하다. 대통령을 돕는 보좌기관의 책임자가 정보 제공이라는 제한적 임무를 넘어 직접 판단하면서 정책 집행까지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름이 주인 허가없이 땅문서를 동네방네 흔들면서 주인이 팔지도 않은 옥토를 이웃 소유라고 주장하는 꼴이다. 그런 마름을 내쫓기는커녕 감싼다면 그에게 약점을 잡혔거나 아니면 둘이 짜고 속임수 연극을 하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국방부까지 국정원 주장에 장단 맞추는 것을 보면 진실은 아무래도 후자인 듯하다.
김종철 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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