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처형 이유는 뭘까
“장성택, 경제 장악·군 동원해
국가파국 내몬 뒤 권력장악 음모”
북, 판결문에 구체적으로 나열했지만
2인자 제거 명분일 가능성
“김정은 앞 오만불손” 강조하기도
“장성택, 경제 장악·군 동원해
국가파국 내몬 뒤 권력장악 음모”
북, 판결문에 구체적으로 나열했지만
2인자 제거 명분일 가능성
“김정은 앞 오만불손” 강조하기도
북한이 장성택 전 조선노동당 행정부장을 사형에 처하면서 내세운 근거는 북한 형법 제60조에서 규정한 국가전복 음모이다. 장 전 부장이 ‘사람·조직·돈’을 갖춘 뒤 국가를 혼란에 빠뜨리고, 이를 본인이 수습해 최고 권력을 차지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쿠데타를 모의했다는 것이다.
북한 사회의 폐쇄성과 장 전 부장이 이미 사망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사실 여부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장 전 부장에 대한 처형이 본질적으로 ‘정치적 숙청’이며, 따라서 그에게 적용된 혐의가 국가전복 ‘기도’가 아닌 ‘음모’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우리 정부 당국자도 “국가전복 움직임이 포착된 것은 없다”고 말했다.
13일 <조선중앙통신>에 실린 장 전 부장의 재판 기사에는 그가 꾸몄다는 국가전복 음모가 상세하게 담겨 있다. 장 전 부장은 오래전부터 국가권력 장악을 꿈꿨으며 2011년 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본격적인 행동에 나섰다. 이 통신은 “장성택은 제놈이 있던 부서가 나라의 중요 경제 부문들을 다 걷어쥐여 내각을 무력화시킴으로써 나라의 경제와 인민 생활을 수습할 수 없는 파국으로 몰아가려고 획책하였다”고 밝혔다. 내각이 맡아야 할 국가의 주요 경제 부문을 가로챈 뒤 국가를 혼란에 빠뜨리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 뒤 장 전 부장은 북한 사회가 혼란에 빠지면 본인이 나서서 수습하고 정권을 잡으려고 했다고 한다. 이 통신은 장 전 부장의 말을 인용해 “인맥 관계에 있는 군대 간부들을 이용하거나 측근을 내몰아 무력으로 (정변을) 하려고 했다. (정변 이후에는) 일정한 시기에 경제가 완전히 주저앉고 국가가 붕괴 직전에 이르면 내가 있던 부서와 모든 경제 기관들을 내각에 집중시키고 내가 총리를 하려고 했다”고 전했다.
그는 또 “내가 총리가 된 다음에는 지금까지 여러가지 명목으로 확보한 막대한 자금으로 일정하게 생활 문제를 풀어주면 인민들과 군대는 나의 만세를 부를 것이며 정변은 순조롭게 성사될 것으로 타산하였다”고 말했다고 이 통신은 전했다. 그는 외부 세계에 ‘개혁가’로 인식된 점을 이용해, 북한의 새 정권이 짧은 기간에 외국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북한이 장 전 부장의 국가전복 음모를 구체적으로 설명했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는 분석이 나온다. 2인자라 평가받던 정치세력을 찍어내기 위해서는 그 어떤 정치적 이유라도 갖다 붙일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1955년 박헌영 당시 당 중앙위 부위원장을 처형하면서도 그가 미제의 간첩이자 무장폭동 음모를 꾸몄다고 밝혔다. 그러나 실제로는 6·25 남침 실패에 대한 책임을 남로당계에 떠넘기고 김일성 주석의 1인 지배 체제를 공고화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받아들여지고 있다.
전 부장의 처형도 박헌영 부위원장의 경우처럼 일종의 ‘희생양’일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김정은 체제의 후견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장 전 부장에게 최근 몇 년 새 북한 사회에 나타난 여러 부작용들의 책임을 뒤집어씌우려 했다는 것이다. 북한은 사실관계가 불명확한 경제·사회·문화 전반의 여러 문제점을 장 전 부장의 책임으로 언급했다. 한 통일부 당국자는 “그가 실제 쿠데타 음모를 꾸며서 처벌당했다기보다는 정치적 희생양 역할을 강요받았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또 그의 처형엔 김정은 당 제1비서에 대한 ‘불경죄’가 상당히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이 통신은 그가 2010년 9월 열린 조선노동당 제3차 대표자회의에서 김 제1비서가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에 임명될 때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서서 건성건성 박수를 치면서 오만불손하게 행동”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또 “장성택이 위대한 수령님(김일성)과 장군님(김정일)이 생존해 계실 때에는 감히 머리를 쳐들지 못하고 눈치를 보다가, 혁명의 대가 바뀌는 시기에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고 비난했다. 장 전 부장이 조카이자 나이가 어린 김 제1비서를 이전 지도자들과는 다르게 대했다는 것이다. 김근식 경남대 교수는 “2007년 정상회담 때 장 전 부장을 봤는데 굉장히 자유분방한 스타일이었다. 조카가 지도자가 된 뒤에 조심성이 떨어졌을 수 있다”고 말했다.
최현준 기자 hao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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