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권일 칼럼니스트
“일제 식민지배는 하나님의 시련”이란 신정론도 황당했지만 “위안부 문제는 사과받을 필요 없다”는 반인권적 시각, “게으르고 자립심 부족하고 남한테 신세지는 것이 조선인의 디엔에이(DNA)”라는 인종주의는 황당함을 넘어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다. 총리 후보자 문창극씨 얘기다. 국가정보원장 후보자로 ‘차떼기 전달책’ 이병기씨가 내정된 데 이르면 말문이 막힌다. 이런 자들이 후보로 올랐다는 것 자체가 참담한 일이다.
왜 이런 ‘인사 참극’이 계속되는 걸까. 따지고 보면 박근혜 정권의 이런 인선은 별로 노력하지 않아도 변함없이 ‘의리’를 지켜줄 지지층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로 ‘막 나가는’ 인선을 보고 있자면 이념 이전에 생래적 위화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박근혜 정권의 가장 놀라운 점은 이들에게 소위 마키아벨리적 의미에서의 권모술수, 즉 “여우의 지혜”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신 일관되게 보이는 건 어떤 종류의 천진난만함, 즉 아이가 자기 눈을 가리면 다른 사람들도 자신을 못 볼 거라 믿는 것과 유사한 종류의 무구한 확신이다. 이건 이념의 문제라기보다 ‘태도’의 문제다.
철학에서 유아론(唯我論·Solipsism)이라 부르는 관점과 비슷하다. 이를 ‘나 혼자밖에 없다’는 사고방식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엄밀히 말하면 다르다. 유아론은 ‘나에게 타당한 건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타당하다’는 사고방식이다. 유아론자는 자신과 동일한 규칙을 공유하는 타인만을 인정하는데 사실 그런 타자는 타자라기보다 동일자다. 유아론자에게는 자신과 다른 규칙으로 살아가는 사람, 진정한 의미에서 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유아론자에게 ‘대화’는 없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있다 해서 대화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일방적 선언, 설교, 명령에 대답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을 대화라고 할 수는 없다. ‘나’는 통치하는 사람이고 ‘말하는 사람’이라는 것. 국민은 통치의 대상이고 ‘듣는 사람’이라는 것. 그것은 차라리 기계장치에 입력이 잘되었는지 확인하는 절차에 가깝다. 대화(dialogue·다이얼로그)의 외피를 걸친 독백(monologue·모놀로그)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예전부터 토론을 기피하는 정치인으로 유명했다. “불통 정권”이라 그렇게 비난받던 이명박 전 대통령조차 박근혜 대통령에 비하면 ‘소통의 달인’으로 보일 지경이다. 핵심 권력집단 내부에서도 의견 조율이 안 되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 나올 정도로 박근혜 정권의 커뮤니케이션은 별나게 폐쇄적이다. 이건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이슈다. 근대 이후 정치권력의 최대 목표 중 하나는 이른바 ‘사회통합’이다. 사회통합이 중요한 이유는 사회가 원심력을 가지고 흩어지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고, 이를 방치할 경우 권력 재생산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유아론적 권력은 개념상 순혈화·동질화로 이어지기 때문에 결국 권력 생산의 기반 자체를 허문다. 누구보다 보수우파들이 나서서 박근혜 정권의 폭주를 막아야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럼 진보주의자 입장에선 좋은 일 아닐까? 그렇지 않다. “중국이 세계 1위 국가 되면 심각한 문제”라며 “중국을 하나님께서 터치하셔야 된다”고 주장한 극우파 장로가 국무총리가 되었을 때 벌어질 ‘외교적 재앙’에 진보와 보수가 따로 있을 수 없다. 더구나 급박한 현장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정권의 전향적인 태도는 당장 생사를 가르는 도움일 수도 있다. 독백만 일삼는 모놀로그 정권의 ‘귓구멍을 뚫는 일’에 이념을 떠나 모두 힘을 합쳐야 하는 이유다.
박권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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