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친절한 기자들
또 삐라(대북 전단) 갈등입니다. 죽지도 않고 또 왔습니다. 내년에도 반복될 겁니다. 해결도 잘 안됩니다. 8부 능선까지 갔다가 다시 1부 능선으로 되돌아오죠.
지난 10일엔 심각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남쪽 탈북자 단체가 띄운 ‘대형 삐라 풍선’에 북쪽이 기관총을 쏜 것입니다. 공중을 향해 사격했죠. 삐라에 대한 직접 사격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북쪽은 9월 들어 남쪽의 삐라 살포가 증가하자 ‘삐라 살포 원점(지점)을 타격하겠다’고 위협해 왔는데, 정말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날 저녁 뉴스 속보에는 ‘총탄’이 아닌 ‘포탄’으로 잘못 알려졌는데, 북쪽이 정말 남쪽 땅을 향해 포를 쐈다면 상황이 훨씬 더 심각했을 것입니다. 여하튼 공중에 쏜 총탄도 땅에 떨어졌고, 이 역시 생명을 위협한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재발을 막기 위해 잠시 복기해 보겠습니다. 북쪽이 사상 첫 ‘삐라 사냥’에 나선 이유는 상당히 우발적인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입니다. 이날 삐라는 두 단체에서 날렸습니다. 박상학 자유북한운동연합 대표와 이민복 북한동포직접돕기운동 대표인데요. 박 대표는 전날 대대적으로 예고를 했고, 이 대표는 조용히 날렸습니다. 그러나 예고를 한 박 대표는 10개의 풍선에 삐라 20만장을 날리는 데 그쳤고, 이 대표는 100여개의 풍선에 300만장 이상의 삐라를 날렸습니다.
남한 언론의 관심은 박 대표 쪽에 집중됐지만 실제 북쪽이 위협으로 생각하는 것은 이 대표 쪽입니다. 양이 많고 바람이 적절할 때를 골라서 날리기 때문입니다. 이 대표는 평소 예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날 경기 연천에서 이민복 대표가 날린 풍선 가운데 유독 낮게 날아간 풍선이 있었습니다. 보통 삐라 풍선은 고도 3000m 이상을 유지하며 날아가는데 이날은 육안으로 관측이 가능한 높이로 풍선 한 개가 날아갔다고 합니다. 이 대표는 기자와 만나 “오후 4시께 갑자기 총소리가 들렸다. 하나가 낮게 날았는데, 북한 병사가 풍선이 보이니까 총을 쏜 거 같다”고 말했습니다.
담담하게 들었지만, 머릿결이 쭈뼛해집니다. 만약 그가 북쪽 병사에게 관측되었다면 어땠을까요? 이 대표는 “그런 위험에 늘 대비한다. 그래서 북쪽에서 관측하지 못할 지점, 그리고 민가에서 떨어진 지점에서 풍선을 날린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몇 개의 우연이 겹친다면 어떨까요? 북쪽에 노련한 관측병이 근무를 하고, 경계의 강도가 세지고, 이 대표가 경계심을 풀고 노출된 장소에 갔더라면….
비슷한 사건이 2008년 7월 금강산에서 있었습니다. 금강산 관광에 나선 한 남한 관광객이 통제된 구역에 갔다가 북쪽 병사의 총격을 받고 사망한 것입니다. 관광객의 부주의도 있었지만 당시 북쪽 초병에 대한 군기가 강화된 것도 한 원인으로 알려졌습니다. 두 개의 우연이 겹친 것이죠. 개인적인 불행은 물론이고 그날 이후 금강산 관광은 남한 국민들에게 봉쇄됐습니다. 이런 우려를 하는 제가 너무 나약한가요? 북쪽에 저자세를 취하면 계속 밀리게 된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힘에는 힘으로 맞서야 한다고요. 우리 힘이 북쪽 힘보다 더 세다고들 하는데 말이죠.
이 대표는 “나는 남한 정부가 해야 할 일을 대신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바른’ 정보가 유통되지 않는 북쪽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말대로 북쪽에 정보를 들이고, 북쪽을 개방하도록 하는 일은 개인이 아닌 정부가 힘써서 할 일입니다. 다만 그 방식을 북쪽이 그토록 싫어하는 삐라를 통해서 할 일은 아닙니다. 교류와 협력으로, 인도적 지원으로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북쪽에서는 ‘초코파이’와 남한의 드라마·영화 디브이디가 삐라보다 더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 삐라에 대한 정부의 공식 입장은 “개인의 삐라 살포는 표현의 자유이므로 당국 차원에서 제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삐라 살포를 표현의 자유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실체적인 위협이 있다면 그 자유를 제한하는 게 헌법 37조2항의 내용입니다. 현재 이 대표뿐만 아니라 그가 삐라를 살포하기 위해 가는 경기 연천, 파주, 강원 철원, 인천 등지의 주민들도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남북간 교류·협력을 틀어막아 북쪽에 남쪽 정보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은 정부가 오직 삐라를 뿌릴 자유만 허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삐라 문제는 거칠게 요약하면 국민의 목숨이 달린 문제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대승적 결단이 필요합니다.
최현준 정치부 통일외교팀 기자 haojune@hani.co.kr
최현준 정치부 통일외교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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