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왼쪽)과 신진욱 중앙대 교수가 5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 식당에서 진보정당의 위기 진단과 진보정치의 활로 모색을 주제로 대담하고 있다.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심층 리포트] 진보정당 15년, 위기와 기회 ③ 미래 - 낮고 넓고 깊은 진보로
남재희 전 장관-신진욱 교수 대담
남재희 전 장관-신진욱 교수 대담
두 사람의 나이 차는 37년이다. 이력과 활동 영역도 다르다. 남재희 전 노동부장관은 언론계에서 시작해 정치권과 관계를 두루 거친 원로 지식인이다. 1990년대 학생운동권 출신의 신진욱 교수는 독일 유학을 다녀와 시민운동에 일찍부터 힘을 보탰다. 세대와 삶의 경로는 상이하지만 두 사람의 관심 영역은 여러 곳에서 겹친다. 한국의 진보정치 역시 두 사람의 공통 관심사 가운데 하나다. <한겨레>는 진보정치의 위기를 극복할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두 사람의 대담을 마련했다.
참석 요청을 받은 신 교수의 첫 반응이 재미있었다. “보수정권(박정희~김영삼 정권)과 보수정당에 몸 담았던 진보 성향의 80대 언론인과, 진보 학계에서 활동해왔지만 진보 진영의 현실에는 극히 비판적인 40대 연구자가 진보정치를 주제로 대담을 한다? 독자 시선을 잡아두는 효과는 확실하겠군요. 하하.” 지난 5일 서울 마포구의 한 음식점에서 시작된 대담은 3시간을 넘겨 마무리됐다. 1960년대 한국의 혁신정당운동에서 시작해 19세기 영국의 페이비언사회주의, 독일과 북구 사민주의를 거쳐 미국 리버럴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대륙을 넘나들던 대화는 다시 ‘보수패권이 심화되고 있는 지금 이곳, 한국의 진보정치’로 돌아왔다.
남재희
“사회경제 지표들 좋지 않다
진보 세력기반 강화된 것 진보정당이 세력 키워야
제1야당내 진보파 힘 커져 DJ와 노무현 같은
감동 주는 진보라야 한다” 신진욱
“20대~50대 초 진보 성향 늘어
이를 결집할 진보 역량이 문제 제1야당 리더십 발휘 못할땐
진보정당과 연합체제 가능 80년대 운동정치 벗어나라
신뢰를 얻는 게 중요” ■ 공멸 위기의 진보정당, 무엇이 문제였나
남재희(이하 ‘남’): 불난 집 앞에서 팔짱 끼고 훈수두는 것처럼 보일까, 아직도 통합진보당 해산에 대해 말하기가 조심스럽다. 다만 정의당·노동당 사람들한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이번 사태가 그들한테도 좋을 게 전혀 없다는 거다.
신진욱(이하 ‘신’): 원래 같은 당에서 한살림하던 처지다. 국민들은 통진당과 나머지 진보정당들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통진당 활동가들은 학생 때부터 조직·대중사업 경험이 많고, 부지런하고 헌신적인 데다 친화력도 좋다. 이른바 ‘평등파’ 출신들이 갖지 못한 강점과 미덕이다. 진보정당이 역대 선거에서 10% 안팎의 득표율을 유지해온 것도 상당 부분 이들의 공이다. 통진당 해산의 파장이 어디까지 미칠지 쉽게 가늠이 안 된다.
남: 원래 못 살던 집이 횡재하면 싸움 잘 날 없는 법이다. 정당투표가 처음 도입된 2004년 총선에서 국회의원 10석이 뚝 떨어지면서 사달이 났다. 당권만 쥐면 국회의원 열 자리를 쥐락펴락할 수 있는데, 어느 정파가 거기서 초연할 수 있었겠나.
신: 제도가 유리하게 바뀌면 진보정당도 자연스럽게 성장할 것이란 기대가 섣불렀다. 정치 주체들이 얼마나 성숙한 역량과 문화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제도는 약이 되기도 독이 되기도 한다. 자주파의 주류였던 ‘경기동부’의 조직문화는 1980년대 군부독재와 대결하는 과정에선 유효했는지 모르지만, 1990년대 이후엔 진보 혁신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됐다. 목적이 정당하면 수단은 무엇이든 괜찮다는 생각, 내부 성찰을 막는 과도한 피해자 의식 등이 대표적이다. 그게 결국 부정경선과 중앙위 폭력사태를 낳았다.
남: 이념과 노선 역시 1950~60년대 혁신정당들에 견줘 차이가 큰 게 사실이다. 자주파 주류가 미국·북한에 대해 갖는 태도는 국민들이 도저히 수긍하기 어렵다. 4·19 공간에도 반미 색채가 나타나긴 했지만, 1980~90년대만큼 격렬하지는 않았다. 당시의 통일 논의도 다소 급진적인 ‘남북협상론’과 온건한 ‘중립화론’이 양분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분단과 북한 문제로 넘어갔다. 학생 시절 ‘평등파(PD)’ 계열에서 활동했던 신 교수는 북한 문제와 관련한 ‘자기검열’의 딜레마를 지적했다. 북한체제에 비판적이지만, 보수 우익의 반북 대결주의에 힘을 실어주거나, 남북간 화해·협력에 장애가 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공개비판을 꺼린다는 것이다. 남 전 장관은 “미국과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과 태도의 불균형” 문제를 꼬집었다.
■ 정당은 지리멸렬한데, 진보 기반은 강화되는 역설
남: 미국은 산타클로스도 아니고 악마도 아니다. 때로는 좋은 일도 하고 때로는 과오도 범한다. 일방적 추종이나 배척의 대상이 아니란 얘기다.
신: 분단 문제를 남북이 주도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민족주의 관념이 너무 강하다. 미국이라는 ‘제도 설정자’를 배제하면서 양국간 문제로 해결하려다보니 감당하기 어려운 대외 변수들에 부딪치고, 결국 대내적 지지를 상실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거다.
남: 남북관계는 군사문제가 핵심이다. 군사 문제를 언급하지 않은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대박론’은 ‘만담’ 수준이다. 진보도 마찬가지다. 무작정 긴장완화·평화정착만 떠들 게 아니라, ‘가랑비에 옷 젖듯’ 세밀하고 점진적인 변화를 군사 분야에서도 만들어가야 한다.
신: 아무리 정당성 있는 주장이라도 그것이 실현되려면 국내에선 다수의 정치적 지지를 얻고 국제관계 속에서 최소한 용인받는 수준이 돼야 한다. 그런데 북한 핵을 옹호하면서 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자주파 노선은 어느 것도 얻기 어려웠다. 이게 보수세력의 역공을 불렀고, 헌법재판소는 그런 약점을 파고들었다.
논의는 돌고돌아 ‘진보의 위기 상황’으로 회귀했다. 이번엔 ‘진보의 성장 토양’ 자체가 존재하느냐가 쟁점이 됐다. 두 사람의 견해는 이내 수렴했다. 진보정당이 겪는 어려움과 달리 진보가 성장할 사회정치적 토양은 여전히 상존한다는 것이다.
남: 여러 사회경제적 지표들이 좋지 않다. 양극화는 심화되고 고용의 질도 계속 떨어진다. 모든 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하위다. 그런 점에서 진보의 정치적 토양은 더 강화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진보정당은 수난인데 진보의 세력기반은 강화됐다는 건 아이러니다.
신: 각종 사회의식 조사결과를 봐도, 20대에서 50대 초반 연령층은 민주주의에 대한 태도, 불평등에 대한 인식, 정치가 나가야할 방향 등과 관련해 다수가 진보 성향을 보인다. 문제는 이걸 정치적으로 결집하고 제도화시킬 주체들이 약화됐다는 거다.
남: 조건과 결과 사이에 괴리가 심각한 거다. 그런데 진보정치가 위기를 맞은 데는 주체 역량의 문제도 있지만 박근혜 정권의 속성도 일정부분 작용했다. 만약 이 정권이 독재나 파시즘이라면 저항이 불붙을테지만, 이건 아무리 봐도 ‘교주적 우편향 정권’ 이라고밖엔 보이지 않는다. 이와 함께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규정력이 강화되면서 진보의 선택지가 굉장히 협소해진 측면도 있다. 오죽하면 프랑스의 올랑드 정권도 부유세를 폐지하겠나.
신: 정책적 대안이 마땅찮다는 건, 전 세계 모든 진보세력이 겪는 어려움이다.
■ ‘중도·진보 빅텐트’냐 ‘연합 정당 체제’냐
비관적 대화 분위기를 반전시킨 것은 남 전 장관이었다. 그는 정권이 위로부터 조장하는 극우몰이는 효과가 오래가지 못한다는,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낙관론을 폈다. “개인적으로 종교계, 특히 가톨릭에 희망을 걸게 된다”고도 했다.
남: 어쩌면 ‘프란치스코 교황 효과’인지도 모르겠다. 제주와 광주교구 지도자들이 통진당 해산에 대해 용기있는 발언을 하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신: 유럽 진보정치의 주된 자원은 노조를 비롯한 진보적 이익단체다. 그런데 한국은 사회운동 세력과 진보언론, 종교인·지식인 그룹이 이를 대신해왔다. 문제는 이 세력 모두 2000년대 이후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다는 거다. 지금 시대에 걸맞는 주체의 혁신이 필요하다.
정당구도 재편 문제로 논의가 넘어가자, 남 전 장관이 억울함을 호소했다. 자신이 ‘빅텐트론’(중도·진보 통합정당론)을 지지하는 것처럼 부당하게 오인받고 있다는 토로였다. 그는 “중도 제1야당과 진보정당의 역할분담이 필요하다는 게 오랜 지론”이라고 해명했다.
남: 얼마전 ‘진보세력의 이상을 정책으로 구현하는 데는 미국 민주당 모델이 유리할 수 있다’고 <한겨레> 칼럼에 썼더니, 몇몇 인사들이 ‘진보정당이 필요없다는 것이냐’고 따지더라. 그게 아니다. 제1야당 내 진보 분파가 힘을 얻으려면 당 밖의 진보정당이 힘을 가져야 한다. 진보 정치인들이 당을 넘나들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그러면서 정치지형을 진보쪽으로 견인해갈 필요가 있다는 취지다.
신: 사실 미국 민주당원들을 일컫는 ‘리버럴’은 맥락에 따라 공산주의자, 여성주의자로까지 번역되는 경우도 있다.
남: 미국 민주당이 자유주의 정당이라고는 하지만, 실은 좌우 연합정당이다. 가깝게는 오바마·클린턴, 멀리는 루스벨트·존슨을 봐도 사민주의에 가까운 진보파 아닌가.
신: 가장 이상적인 구도는 2개 정도의 유력 정당과 이들에게 압박을 가할 수 있는 소수정당들이 함께 경쟁하는 구도다. 그게 이익을 대표하는 측면이나, 사회적 약자에 우호적인 정책을 펼치는 데 있어 가장 이상적이라는 연구결과도 나와 있다.
남: 그렇다고 내각제가 꼭 바람직한 것도 아니잖나.
신: 동의한다. 다만, 지금처럼 보수 패권이 유지되는 상황에서, 제1야당이 진보에 자기중심을 두고 중도층을 흡수·견인해간다면 진보정당들은 입지를 확보하기 어려워진다. 하지만 제1야당이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한 상태에서 소수 진보정당이 일정한 영향력을 확보하게 되면 실질적인 ‘연합 정당체제’로 갈 가능성이 있다. 진보에겐 최상의 시나리오다. 어느 방향으로 갈지는 누가 얼마만큼 정치력을 발휘하느냐에 달렸다.
■ 리더십·경제·국제정치… 진보의 공백을 메워라
대담이 시작된 지 2시간이 흘렀다. 주제는 진보정치의 ‘리더십과 전략’ 문제로 옮겨갔다. 남 전 장관은 ‘감동을 주는 지도자’를 신 교수는 ‘과거 운동정치와의 단절’을 주문했다. ‘진보의 싸가지’ 문제도 도마에 올랐다.
남: 진보정당이 전국적 수준에서 표를 얻으려면 종교성이랄까, 감동을 주는 뭔가가 있어야 한다. 김대중은 납치·사형선고 등 고난의 인생사를 걸었고, 노무현은 떨어질 줄 알면서도 부산에 계속 출마한 게 감동을 줬다.
신: 사람들을 자발적으로 따르게 하는 신뢰와 존경, 일종의 ‘카리스마’가 필요한 거다. 하지만 그에 못잖게 진보정치가 1970~80년대식 ‘운동 정치’에 머물러 있는 것도 문제다. 운동은 ‘옳고 그름을 나누고 그름에 맞서 옮음을 주장하는 행동’이다. 그런데 운동의 논리가 정치 영역으로 오면 부작용이 커진다. 재벌이 문제되면 바로 반재벌적 주장과 행동이 나가고, 미국과 마찰이 있으면 바로 반미적 행동이 나가는 식이다.
남: 국제적 관점도 중요하다. 사실 국제정치라는 건 매우 섬세한 게임이다. 일본의 극우화·군사대국화는 당장 박근혜 정부의 딜레마이자, 이후 정부도 풀기 어려운 문제다. 미국과 중국 사이의 패권 변동 문제도 마찬가지다.
신: 그동안 한국의 진보정치는 불평등이나 생존권 같은 사회경제적 이슈에 집중한 탓에 경제·외교 영역이 공백지대로 남아있었다. 그러다보니 국민은 진보가 국가를 통치할 책임있는 집단이라 신뢰하기가 어려웠던 게 사실이다.
남: 태도 문제에 대해 쓴소리 하나 해야겠다. 진보 정치인들 중에는 강준만 교수 말대로 ‘싸가지 없는’사람들이 너무 많다. 서양이야 넥타이 풀고 치받는 게 미덕일 수 있지만, 우리는 다르다. 진보청년들, 자기들만 정의의 투사인양 우쭐대는 못된 습성부터 버려야 한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남재희(1934년생)
조선일보 정치부장, 서울신문 편집국장
10~13대 국회의원(공화당·민정당·민자당)
11대 노동부 장관
호남대 객원교수
서울시 시정고문(현) 신진욱(1971년생)
독일 베를린대 사회학 박사
연세대·서울대 강사
참여사회연구소 부소장
시민정치행동 내가 꿈꾸는 나라 운영위원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현)
조선일보 정치부장, 서울신문 편집국장
10~13대 국회의원(공화당·민정당·민자당)
11대 노동부 장관
호남대 객원교수
서울시 시정고문(현) 신진욱(1971년생)
독일 베를린대 사회학 박사
연세대·서울대 강사
참여사회연구소 부소장
시민정치행동 내가 꿈꾸는 나라 운영위원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현)
“사회경제 지표들 좋지 않다
진보 세력기반 강화된 것 진보정당이 세력 키워야
제1야당내 진보파 힘 커져 DJ와 노무현 같은
감동 주는 진보라야 한다” 신진욱
“20대~50대 초 진보 성향 늘어
이를 결집할 진보 역량이 문제 제1야당 리더십 발휘 못할땐
진보정당과 연합체제 가능 80년대 운동정치 벗어나라
신뢰를 얻는 게 중요” ■ 공멸 위기의 진보정당, 무엇이 문제였나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
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