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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대통령의 독선, ‘정치’를 짓밟다

등록 2015-06-25 22:52수정 2015-06-26 11:38

박근혜 대통령이 25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국회와 여야를 비판하며 굳은 표정으로 국회법 개정안 거부권 행사 발언을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박근혜 대통령이 25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국회와 여야를 비판하며 굳은 표정으로 국회법 개정안 거부권 행사 발언을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여야 맹공 퍼부은 국무회의
국회법 거부권 행사하며
“정치가 국민 이용하고 현혹”
국정 장악·국면 전환용 분석
새누리당 재의 않기로 결론
박근혜 대통령이 25일 국회법 개정안의 재의를 요구하는 거부권을 행사했다. 박 대통령은 이에 그치지 않고, 이날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국회와 여야를 강도 높게 비난하는 발언을 쏟아냈다. 메르스 사태 부실대응에 대한 유감 표명이나 사과는 없었다. 야당은 국회 일정 중단을 선언했다.

박 대통령은 이날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입법부 전체를 구태 정치로 몰아세우고 여당 원내대표를 불신임하는 발언을 내놓았다. 이로 인해 여당에선 친박근혜계와 비박근혜계의 갈등이 깊어지고, 여야 관계와 당청 관계 등 정국 전반이 혼란과 갈등에 휩싸이고 있다.

박 대통령은 16분 정도 이어진 국무회의 모두발언에서 앞부분에 메르스 관련 정부 대응을 짧게 주문한 뒤, 나머지 12분을 국회와 여야 비판으로 모두 채웠다. 굳은 표정으로 국회법 개정안을 거부하는 이유를 설명했고, 이어 격앙된 목소리로 정치권과 여당을 차례로 비판하며 “선거에서 심판해 달라”고까지 말할 정도로 날을 세웠다. 정치권에서는 예상을 뛰어넘는 거친 발언 수위로 볼 때, 박 대통령이 국회법 거부권 행사를 메르스 정국 돌파를 위한 또다른 계기로 삼으려 한 것 아니냐는 분석마저 나온다.

박근혜 대통령 국무회의 주요 발언
박근혜 대통령 국무회의 주요 발언
박 대통령은 우선 국회법 개정안과 관련해 “행정업무마저 마비시키는 것은 국가의 위기를 자초하는 것이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거부권을 행사할 수밖에 없다”며 “삼권분립의 원칙을 훼손해, 과거 정부에서도 통과시키지 못한 개정안을 다시 시도하는 저의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정부를 압박하기 위해 충분한 검토 없이 서둘러 여야가 합의했다”고 주장했다.

박 대통령은 또 “정치가 국민들을 이용하고 현혹해서는 안 된다”며 작심한 듯 대국회 선전포고를 했다. 그는 “늘상 정치권에서는 언제나 정부의 책임만을 묻고 있고, 정부와 정부정책에 대해 끊임없는 갈등과 반목, 비판만을 거듭해 왔다”며 “일자리 법안들과 경제 살리기 법안들이 여전히 국회에 3년째 발이 묶여 있다. 정치권에서 민생 법안이 아닌 정치적 이해관계에 묶인 것들부터 서둘러 해결하는 걸 보고 비통한 마음마저 든다”고 말했다. 또 “국회가 꼭 필요한 법안을 당리당략으로 묶어놓고 있으면서 본인들이 추구하는 당략적인 것을 빅딜을 하고 통과시키는 난센스적인 일이 발생하고 있다”고 말하는 등 그동안 묵은 감정을 토해내듯 비판했다.

박 대통령의 이런 강공은 정치권에 대한 국민들의 비판 여론을 한껏 활용해, 메르스 사태 등으로 주춤했던 국정 장악력을 되찾겠다는 의도가 담긴 것으로 보인다. 임기 중반 이후 정국의 무게 추가 국회와 여당으로 쏠리며 조기 레임덕을 맞는 상황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앞으로 국회가 아닌 국민을 직접 상대하는 ‘나홀로 정치’를 선언한 것이기도 하다.

박 대통령은 여당에 대한 ‘충격과 압박 요법’도 썼다. 박 대통령은 “여당 원내사령탑도 정부·여당의 경제살리기에 어떤 협조를 구했는지 의문이 가는 부분”이라며 “민의를 대신하고 국민들을 대변해야지, 자기의 정치철학과 정치적 논리에 이용해서는 안 된다”고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직접 언급했다. 그러면서 그는 “저도 당과 후보를 지원하고 다녔지만 돌아온 것은 정치적·도덕적 공허함”이라며 배신감을 토로해 유 원내대표를 공개적으로 ‘배신자’로 낙인찍었다.

박 대통령은 나아가 내년 총선을 언급하며 여권에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던지기도 했다. 그가 새누리당을 향해 “오로지 선거에서만 이기겠다는 생각으로 신의를 저버리고 국민의 삶을 볼모로 이익을 챙기려는 구태정치는 이제 끝을 내야 한다”고 주문한 대목에선 새누리당을 보는 박 대통령의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여당이 내년 총선을 의식해 자신에 대한 신의를 버리고 국정에 제대로 협조하지 않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박 대통령이 몇 차례나 ‘선거’와 ‘심판’을 강조한 것도, 여전히 탄탄한 자신의 지지세력이 있다는 점을 여권에 환기하는 동시에 지지층을 향해 ‘어려움에 처한 나를 구해달라’고 호소하며 결집을 촉구한 것으로 풀이된다. 박 대통령은 “선거를 수단으로 삼아 당선된 후에 신뢰를 어기는 배신의 정치는 결국 패권주의와 줄세우기 정치를 양산하는 것으로, 반드시 선거에서 국민들께서 심판해 주셔야 할 것”이라고 말한 데 이어, “국민들께서 선거에서 잘 선택해 주셔야 새로운 정치문화가 자리잡을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뒤 새누리당은 오후 국회에서 의원총회를 열어 재의 표결에 응하지 않는 방식으로 박 대통령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유승민 원내대표는 사퇴하지 않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유 원내대표는 의총 직후 “나와 청와대 사이에 소통이 원활치 못했던 점에 대해 (의원들이) 걱정도 하고 질책도 했다. 매우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유창선 정치평론가는 이날 박 대통령 발언과 관련해 “메르스 사태에 대한 최고 책임자로서 책임을 통감하고 국민 앞에 고개 숙여도 시원치 않을 판에 국민이 보는 앞에서 국회와 정치권에 호통을 치는 것이야말로 삼권분립을 무시하고 국회 위에 군림하려는 것”이라며 “박 대통령이 유신독재 시절에나 통했던 리더십이 지금도 받아들여지리라 착각을 하고 있다. 국가적 난국 속에서 여당 원내대표와 비장하게 싸우고 있는 대통령의 모습은 국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석진환 기자 soulf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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