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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대통령에 맞선 자’, 지인들이 말하는 유승민의 과거

등록 2015-07-10 20:47수정 2015-10-23 14:59

유승민 의원이 지난 8일 사퇴 기자회견 직전 회견장으로 가기 위해 국회 의원회관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모습. 사진 공동취재단
유승민 의원이 지난 8일 사퇴 기자회견 직전 회견장으로 가기 위해 국회 의원회관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모습. 사진 공동취재단
[토요판] 커버스토리/유승민을 말한다
개혁보수 아이콘으로 급부상한
새누리당 의원 유승민을 말한다
지난 13일 동안 압축적으로 펼쳐진 박근혜 대통령과 유승민 새누리당 전 원내대표 사이의 권력다툼은 사실상 유 전 대표의 승리로 돌아갔다. 대통령은 뜻하는 바를 이뤘지만 국민의 지지를 잃었고, 유 전 대표는 직을 내놓아야 했지만 국민의 지지를 얻었다. 156일 만에 원내대표직을 사퇴한 유 전 대표는 단번에 김무성 당 대표를 따돌리고 여권의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로 떠올랐다. 유 전 대표의 치솟는 인기는 야권 지지층에까지 확장됐다. 복지보단 성장을 우선시하는 시장주의자이며 ‘사드’(고고도미사일 방어체계) 도입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안보 보수주의자인 유승민을 야권 지지층까지 응원하는 지금의 현상은, 그만큼 한국 보수 정치계에 대화가 통하는 합리적 인물이 희소하다는 방증이 아닐까. 우여곡절 끝에 정치인 유승민은 더욱 면밀한 검토가 필요한 인물이 돼 버렸다. 유 전 대표의 어린 시절부터, 정치권에 발을 들인 이후 행보와 박 대통령과의 관계까지 짧은 시간 동안 가능한 그의 모든 것을 들여다봤다.

샌님? 쾌남? 보수주의 경제학자 출신의 반란

▶ 유승민 새누리당 전 원내대표가 13일 동안 청와대의 사퇴 압력을 이겨낸 과정에서 사람들은 유승민이란 정치인을 새롭게 알게 됐습니다. 이전까지 그는 대중의 주목을 이토록 크게 받은 적이 없는 정치인이었습니다. 짧은 시간 한국 보수의 희망으로 떠오른 유승민은 어떤 정치인일까요? 그의 측근과 가족, 친구들, 지역구인 대구 동구을 등을 찾아 인간 유승민과 정치인 유승민을 복기해봤습니다.

왜 그랬을까. 왜 그토록 오래 버텼을까. 국회법 개정안을 국회로 돌려보낸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달 25일 국무회의 모두발언에서 “여당의 원내 사령탑도 정부의 경제 살리기에 어떤 협조를 했는지 의문이 간다”며 유승민(57)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이하 유승민)를 지목해 공개 비난했다. 다음날 바로 90도로 허리를 굽힌 유승민은 “대통령께 진심으로 죄송하다”며 사죄했지만, 그의 납작 엎드린 듯한 사과는 뭔가 개운치 않았다. 도리어 유승민은 “(대통령이 언급한) 경제활성화법 30개 중 23개가 처리됐고 2개는 처리 예정이었다”며 “마음을 풀고 마음을 열어달라”고 주문했다. 듣는 이를 ‘옹졸한 인간’으로 만들어버리는 답이었다. ‘이미 해달라는 대로 해줬다. 문제는 당신이 속이 좁아 그런 것이니 이만 속을 풀라’는 것이다. 어쩌면 유승민은 이때 이미 대통령의 불신임을 오래도록 버텨내겠다고 예고했는지 모른다. 그는 결국 이 상황을 13일 동안 끌었고,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우리 헌법 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며 사실상 대통령의 언행이 헌법을 무시한 제왕적 행태라 일갈한 뒤 무대에서 사라졌다. 유승민은 단숨에 차기 대권주자로 뛰어올랐다. 그에 대한 유권자들의 지지율을 두고 뒷말이 무성하다. “고도로 계산된 정치적 행보”라는 비판부터 “여권이 개혁적 보수와 수구 보수로 나뉘는 단초를 만들었다”는 지지까지 나온다. 유승민과 대통령의 대립은 향후 한국 정치사에 어떤 의미를 갖는 일로 기록될까. 그러자면, 정치인 유승민을 조금 더 길고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전례 없이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운 집권 여당의 ‘개혁적 보수’는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유승민 새누리당 전 원내대표가 8일 오후 국회 정론관에서 원내대표직 사퇴 기자회견을 마친 뒤 인사하고 있다. 유 전 대표는 이날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우리 헌법 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고 해 사실상 대통령이 헌법을 무시한 제왕적 행태를 보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유승민 새누리당 전 원내대표가 8일 오후 국회 정론관에서 원내대표직 사퇴 기자회견을 마친 뒤 인사하고 있다. 유 전 대표는 이날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우리 헌법 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고 해 사실상 대통령이 헌법을 무시한 제왕적 행태를 보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친구찾아 가출

유승민은 특유의 ‘샌님’ 이미지 덕에 유복한 집안에서 귀족처럼 자란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상은 조금 다르다. 집안이 좋은 것은 맞지만 유복하진 않았고, 어린 시절 성격도 샌님보단 ‘쾌남’에 가까웠다. 유승민은 1958년 대구 중구 삼덕동에서 삼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유승민이 중학교에 다닐 때까지 아버지 유수호(84)는 판사였다. 배가 고파본 적은 없지만 넉넉하지도 않은 살림이었다. 지난 8일 <한겨레>와 만난 유승민의 가족 중 한 사람은 “어린 시절 가정 형편은 가난하진 않았지만 빠듯한 편이었다”고 했다. 유승민이 어렸을 때 중이염을 앓은 적이 있는데, 병원비를 마련하려고 어머니가 선물로 들어온 영화표를 팔다 암표 단속에 걸려 경찰 조사를 받은 일도 있었다.

유승민은 1958년생이지만, 1월에 태어나 한살 많은 이들과 같이 학교를 다녔다. 평준화로 바뀐 덕에 중학교는 무시험으로 입학했고 고등학교는 입시를 치렀다. 대구의 ‘명문’ 경북고등학교로 진학한 유승민은 1976년 대학에 입학하면서 나고 자란 대구를 처음으로 떠났다.

유승민은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75년 가출을 했다. 대입 압박에 시달리던 한 친구가 학교 선생님에게 부당한 이유로 맞았고 경남 합천에 있는 해인사로 가출해버렸는데, 이 친구를 찾아오기 위해 유승민도 집을 떠난 것이다. 유승민의 아버지는 1973년 판사를 그만둔 뒤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해 있었다. 친구의 가출 소식을 들은 유승민은 아버지의 사무장을 찾아가 돈 3만원을 꾼 뒤 그 친구를 찾아나섰다. 며칠 뒤 친구를 찾아 돌아온 유승민은 머리를 빡빡 깎은 채였다. “어쨌든 자신도 집을 나간 것이니, 걱정하신 부모님에게 사죄하는 뜻으로 머리를 깎은 것”이라 했다.

유승민과 고교 동기이고, 유승민의 결혼식 사회를 봤다는 박찬정 청주대 교수는 지난 7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고교 시절 이 친구는 모든 친구들과 두루 잘 지내는 특별한 재주가 있었다”고 했다. 그는 “당시엔 아무래도 성적순으로 끼리끼리 교제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 보통인데, 유독 이 친구만은 모든 친구들과, 특히 퇴학당한 친구들과 아주 가깝게 지내는 독특함이 있었다”고 했다.

유승민과 박 교수는 고교 때 ‘청록’이란 이름의 서클에서 활동했다. 당시 이 지역 명문으로 꼽힌 경북고 안에서도 성적이 좋은 이들이 모인 서클이었지만, 유승민은 청록 친구들 말고도, 흔히 말하는 ‘좀 노는’ 아이들과도 친했다. 유승민의 또 다른 고교 동창은 “승민이는 학교에서 정식으로 허가받지 않은 음성 서클인 ‘광풍’이나 내가 속한 문학 서클 ‘길동지회’ 친구들과도 잘 어울렸다”고 했다. 또 그는 “승민이는 30대 초반에 재경 동창회장이 돼 회칙을 바꿔 퇴학당한 친구들도 가입할 수 있게 했다”고 했다. 경북고 57회엔 10여명의 중도퇴학자가 있었다.

유승민이 고등학생일 땐 아버지가 판사 출신의 변호사였다. 세살 터울의 형은 서울대 법대를 다니고 있었다. 그야말로 ‘엘리트’ 집안이지만 유승민은 이를 주변에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고교 때 유승민은 “소탈했다”, “(주변 학교 학생들과 싸우고 다니는) ‘전투 요원’들과 친했다”, “술·담배를 좋아했다”, “의협심이 강했다”고 한다. 박 교수는 “본인은 공부도 잘하고 유복한 환경에서 다른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는 처지임에도 교우관계는 오로지 친구의 사람됨만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고 기억했다.

이즈음 유승민은 한겨울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버스정류장에서 술에 취해 있던 낯선 이를 업고 집에 들어오기도 했다. 키우던 개가 죽자 한달 동안 슬퍼하기도 했다. 가족 중 한 사람은 “승민이가 고3 때 집에서 키우던 조그만 개가 죽었는데, 한달 동안 울기만 했다. 어머니가 수험생이 공부는 안 하고 저러고 있다며 걱정했을 정도”라고 했다. 다사다난한 고3 시절을 보낸 유승민은 서울대 경제학과로 진학했다. 대학에선 “학생운동과는 거리가 먼, 조용히 공부만 하던 친구”였다. 유신정권 말 ‘부마항쟁’ 등 민주화운동이 한창일 땐 군대에 있었다. 졸업 뒤 미국 위스콘신대로 유학을 떠났다. 1987년 한국으로 돌아와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이 됐다. 이후 2000년 초 뜻하지 않게 연구원을 나오기까지 12년가량을 경제학자로 살았다. 국내 산업조직과 국제화에 관련된 공정거래제도 등 경쟁정책과 산업정책 분야를 맡았다.

작심한 듯한 대통령 ‘배신’발언은
이전부터 묵혀둔 구원 터져나온 것
헌법 언급한 유승민 기자회견은
대통령을 향한 선전포고 같았다
유승민에 관해 좀 더 알아보자

어린 시절 집안 좋았지만 살림 빠듯
중이염 앓는 아들의 병원비 위해
엄마가 암표 팔다 경찰조사 받기도
중고교땐 공부 잘하면서 소탈
퇴학당한 친구들도 잘 챙겨

친척까지 총동원된 아버지의 선거

유승민 새누리당 전 원내대표 약력
유승민 새누리당 전 원내대표 약력
정치인 유승민은 이따금 ‘권력의지가 없는 것 같다’는 얘기를 듣기도 한다. 그런 유승민이 정치권에 발을 들인 건 여러 우연이 작용한 결과에 가까웠다. 대통령 아버지를 둔 박근혜가 예정된 듯 정치권에 불려간 것처럼, 유승민의 정치 입문엔 아버지 유수호의 배경이 적지 않게 작용했다.

1931년생인 유수호는 평범한 농민의 아들이었다. 형제 중 유일하게 공부를 잘해 고려대학교 법대를 나와 판사가 됐고, 1971년 4월 대선에서 부정투표를 한 어느 지역 시장에 대해 실형을 선고했다가 정권에 밉보여 ‘시대사조에 맞지 않는 재판을 하는 자’로 찍혀 1973년 법복을 벗었다(<대구일보> 2006년 10월4일). 그 뒤 대구 지역에서 손에 꼽히는 유명 변호사로 일했던 유수호는, 유승민이 미국 유학을 가 있던 1985년부터 정치를 시작해 1988년과 1992년 총선에 여당 후보로 대구 중구 지역구에 출마해 당선했다. 당시 30대 초반이었던 유승민은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으로 있으면서 틈틈이 아버지의 선거를 도와야 했다. 아버지의 선거는 유승민과 비슷한 또래의 친척들이 총동원된 집안의 거대 행사였다. 두번의 선거를 겪으며 유승민은 현실정치를 일종의 집안일로 경험한 셈이었다. 정치인 아버지를 둔 이가 겪게 되는,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과정이었다.

정치권에 정식으로 입문하게 된 것도 뜻하지 않게 연구원에서 나온 탓이 컸다. 유승민이 40대로 접어든 1998년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가 출범했다. 헌정사 이래 첫 정권교체를 이뤄낸 공신 중 하나였던 이진순 당시 숭실대 교수(경제학)가 새로 연구원 원장으로 부임했다. 유승민의 위스콘신대 선배였다.

40대 초반의 혈기왕성했던 유승민은 김대중 정부의 재벌정책을 강도 높게 비난하고 나서 이 원장의 눈 밖에 났다. 당시 기사를 보면, 1998년 12월 한국생산성본부에서 열린 기업구조조정 세미나에서 유승민은 “정부의 재벌 빅딜정책은 자승자박의 상황에 이르렀다. 백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부가 경쟁력의 본질에 대해 얕게 이해하고 있고, 독점의 폐해에 무관심하다. 정부 강요에 의한 경영권 변동은 훗날 법정 시비를 유발할 수 있다”고 했다. 당시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 체제에서 벗어나려던 김대중 정부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이란 기치 아래 재벌과 금융기관을 대거 구조조정하던 때였다. 정부의 구조조정은 좌우 양쪽에서 ‘종속적 신자유주의’이거나 ‘관치경제의 부활’이라며 비판받았다. 유승민은 당시 정부의 재벌 구조조정을 관치경제로 보는 쪽이었다.

한국개발연구원 시절 유승민의 한 측근은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방한을 해 원탁 토론이 열렸는데, 유승민 연구위원이 정부의 재벌정책과 경제정책 전반에 대해 날 선 비판을 해 시끄러웠던 기억이 난다. 그런 일이 거듭되자 성과급 1등이었던 유 박사는 본봉이 반토막 나는 징계를 받았다”고 했다. 당시 기사를 보면 1998년 11월 방한한 클린턴 대통령은 어느 날 저녁 장하성 고려대 교수와 손봉숙 정치개혁연대 공동대표, 박용오 두산그룹 회장 등과 함께 원탁 토론을 벌였다. 그 자리엔 유승민 한국개발연구원 수석연구위원도 있었다.

이 측근은 “조그만 연구소에서 그 일로 연일 시끄러웠다. 만날 삼삼오오 모이고 난리였다”고 했다. 유승민의 가족 중 한 사람은 “연구원에선 아무래도 계속 있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곳에서 안정적 지위에 있었다면 정치를 안 했을지 모른다. 출구를 찾다 보니 그랬던 것 같다”고 했다.

연구원을 나온 그를 정치권으로 이끈 건 당시 한나라당 총재였던, 아버지처럼 법조계 출신 정치인인 이회창이었다. 이회창의 신임을 한몸에 받은 유승민은 만으로 마흔두살이던 2000년 2월 한나라당의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소의 소장을 맡으며 정치권에 정식으로 발을 들이게 된다.

‘박정희는 존경하고 박근혜는 좋아한다’

‘58년 개띠’인 유승민은 한국전쟁의 폐허가 어느 정도 정리된 뒤 태어난 ‘1차 베이비붐’ 세대다. 이 세대의 누구나가 그렇듯, 유승민의 자아가 형성되고 몸이 자라는 동안 한국의 대통령은 줄곧 박정희였다. 유승민이 육군 수도방위사령부에서 군 복무를 마친 게 1981년 4월이었으니, 대학을 다니다 군에 입대한 20대 초반이 되어서야 생애 처음으로 대통령이 바뀐 것이다. 전임은 비명에 갔고, 그나마 새 대통령도 전임처럼 쿠데타로 집권한 군인이었다. 대구라는 지역 기반과 머리 좋은 엘리트 집안의 배경, 주류 경제학을 전공한 경제학자라는 요소들은 자연스레 유승민을 박정희의 근대 산업화 과정에 대한 긍정으로 이끌었다. 유승민은 과거 “경북고 총동창회 소식지에 ‘박정희는 존경하고, 박근혜는 좋아한다’는 취지의 글을 싣기도 했다”고 한 고교 동창이 전했다. 물론 유승민은 2012년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 후보이던 시절 “5·16이 쿠데타라는 것은 상식이고, 유신이 헌정질서를 파괴했다는 것에 많은 분이 동의한다. 대선 후보로서 과거사를 평가하고 미래로 나아가는 게 맞다”고 했지만, 이때는 이미 박근혜 대통령과 틀어진 뒤였다.

사진으로 보는 유승민
사진으로 보는 유승민
정치인이 된 유승민이 박근혜를 차기 대선주자로 염두에 둔 것은 2002년 대선 패배 이후의 어느 시점이었다. 유승민보다 6살이 많은 박근혜는 유승민보다 3년 앞선 1997년 이회창 당시 대선 후보의 선거대책위원회 고문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이듬해 4월엔 대구 달성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돼 첫 의원 배지를 달았다. 유승민은 2000년 2월부터 2003년 6월까지 여의도연구소의 소장이었다. 2000년 총선과 2002년 대선 과정에서 유승민은 이회창의 핵심 정책 참모로 일했다. 유승민의 한 측근은 “당시 여의도 당사 안 연구소 소장 방 앞에서 부총재급 당 중진들이 비좁은 의자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던 모습을 자주 목격하곤 했다”고 했다. 같은 대구 출신이었던 ‘평의원’ 박근혜도 그런 유승민을 잘 알고 지냈다. 이후 박근혜가 당의 주요 대소사를 유승민과 의논하고 상의하게 된 건 자연스런 일이었다.

박근혜가 대선 주자로 본격 부각되기 시작한 건 2004년 3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 가결 이후였다. 탄핵의 후폭풍으로 당이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한 한나라당은 한달도 채 남지 않은 총선을 앞두고 본격적인 ‘박근혜 체제’로 재편됐다. 당사를 천막으로 옮긴 박근혜 당대표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121석을 확보하는 괴력을 발휘하며 ‘선거의 여왕’으로 등극하게 된다. 탄핵을 함께 주도했던 새천년민주당이 9석의 소수정당으로 전락하고, 열린우리당은 국회 과반인 152석을 점한 선거였다. 당시 당내 주요 대권주자인 이명박 전 대통령은 서울시장(2002~2006년)을 하고 있었다. 손학규를 포함해 한나라당의 대선가도는 2강1약 체제였다. 어느 쪽으로 줄을 서야 할지 쉽게 판단하기 어렵던 시절이었다. 이때부터 유승민은 주변 사람들에게 “박근혜를 다음 대통령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얘기했다고 한다. 당시 초선이었던 한 의원은 “의원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2004년 친이(친이명박)계의 공천으로 입당한 내게 유승민 의원이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야 하니 함께하자고 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원조 친박(친박근혜)’으로 분류되는 이들의 진용을 짜는 일을 유승민이 사실상 주도했다”고 전했다. 유승민은 2005년 1월 박근혜 당대표의 비서실장을 맡는다. 실장직 제의를 두번 거절한 뒤 수락한 삼고초려였다. 그해 10월 재보선에선 비례의원직을 버린 뒤 대구 동구을에 출마해 당선됐고, 2007년 당내 경선에서 박근혜 후보의 정책메시지 총괄단장을 맡아 ‘줄·푸·세’(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세운다) 공약을 함께 만들었다. 이 시기까지 유승민은 사실상 ‘친박’ 핵심 중 핵심이었다.

“재벌빅딜 백지화” 주장하며
김대중 정부 때 KDI 내부서 갈등
98년 클린턴 방한 원탁토론 때도
정부정책 날선 비판으로 시끌시끌
2000년 한나라당 싱크탱크로 옮겨

2004년부터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
‘원조 친박’ 진용 직접 짜기도
2011년 12월부터 박근혜와 균열
‘박근혜 비대위’ 위해 최고위원직
내던졌지만 이후 계속 소외당해

박근혜의 배신

당시 이명박이 아닌 박근혜를 선택한 유승민과 원조 친박들의 생각은 복잡하지 않았다. 정권의 탈환을 위해 2강 중 하나를 택해야 했고, 이명박은 전과자에다 부패한 인물이었다. 둘뿐인 선택지에서 “최악을 피해 차악을 택한 것”이다. 유승민과 함께 원조 친박 그룹에 속했던 한 여당 인사는 “이명박 전 대통령께 죄송하지만 당시 그는 부패한 게 너무 많았다. 철학과 가치가 실종된 분으로 여겨졌다. 국가 운영이 비즈니스가 아닌 바에야, 대한민국이 그리 갈 순 없다고 봤다”고 했다. 반면 박근혜는 사심이 없어 보였다. 애국심도 있었다. 여성이기도 했다. 그는 “본인의 가치관이나 철학, 양심 등이 괜찮으면 나머지 전문적인 부분은 우리 테크노크라트가 채울 수 있다고 봤다”고 말했다.

하지만 2007년 당내 경선에서 패배한 이후 한나라당 내 친박 그룹은 혼란스런 시기를 보냈다. 유승민도 이때부터 조금씩 박근혜에 대한 공개비판과 소신발언을 해나갔다. 나중의 일이지만 “2008년 금융위기 뒤 재정적자가 치솟는 것을 보고 (‘줄푸세’ 중) 감세 주장을 접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2009년 4월 재보선에서 한나라당이 0 대 5로 참패한 뒤 친이계가 친박계와 화합을 시도하며 새 원내대표를 친박계로 추대하려는 과정에서도 불협화음이 일었다. 박근혜는 애초 친이계가 제안한 ‘김무성 원내대표 카드’는 강경히 반대해놓고, 별다른 이유 없이 ‘황우여 원내대표와 최경환 정책위원장 카드’는 받겠다고 한 것이다. 불분명한 원칙에 친박계의 내부 결속이 무너졌고 당사자였던 김무성은 ‘탈박’을 선언했다. 이어 언론관련법이나 세종시특별법 등을 둘러싼 논란을 두고 “박 전 대표의 원칙이 뭔지 모르겠다”, “소통이 안 된다”는 회의와 불만이 터져 나왔다. 2010년 8월엔 박근혜의 당대표 재임 시기 ‘1호 비서실장’이었던 진영(전 보건복지부 장관)마저 친박계를 이탈했다.

유승민의 경우 박근혜와 본격적으로 갈라서기 시작한 계기가 2011년 12월에 찾아왔다. 유승민에겐 그해 7월4일에 치러진 전당대회가 매우 의미있는 기억이다. 정치권 입문 뒤 두번의 큰 패배를 맛보며 일종의 정치적 유배기를 보낸 유승민은 이 전당대회에서 다소 파격적인 ‘용감한 개혁’을 내세웠고, 당대표가 된 홍준표에 이어 2위 득표로 최고위원이 됐다. 유승민의 한 측근은 “공천권을 한꺼번에 쥔 2등 최고위원이었다. 본인으로선 정치인생 최고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누가 그걸, 어느 바보가 던지고 싶었겠나”라고 했다. 유승민은 그러나 4개월 뒤 최고위원직을 사퇴했다.

당시는 정치인이 아니었던 박원순이 서울시장에 당선되고, 역시 정치인이 아니었던 안철수가 대선 후보 여론조사에서 1위를 달리던 때였다. 박근혜는 안철수에게 10% 이상 지지율이 밀리고 있었다. 정권 재창출의 꿈은 날아간 것처럼 보였다. 박근혜가 다시 당의 구원투수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선거의 여왕’ 이미지를 쓰는 수밖에 없었다. 당을 살릴 구원투수를 내세워 넉달 앞으로 다가온 총선을 이기고 연말 대선도 이겨야 했다. 유승민은 사퇴 직전 이런 계획을 박근혜와 상의했다. 다음날 친박들의 만류에도 남경필, 원희룡을 설득해 가장 먼저 최고위원회를 나와 홍준표 체제를 무너뜨렸다. 이후 박근혜는 당의 비상대책위원장이 됐고 선거를 진두지휘했다. 새누리당으로 이름을 바꾼 한나라당은 2012년 4월 총선에서 과반인 152석을 가져갔고 그해 12월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박근혜 비대위의 공천심사위원장은 최경환 현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부위원장은 정종섭 현 행정자치부 장관이었다. 유승민은 총선 대선 과정에서 아무런 직함도 맡지 못했다. 오히려 유승민과 가까운 이들이 공천에서 탈락하기도 했다. 유승민의 한 측근은 “박근혜 비대위 체제에서 최경환, 유정복, 서병수 세 사람이 공천의 전권을 쥐었다. 자신을 위해 살신성인한 유승민에겐 아무런 일도 맡기지 않았고, 오히려 공천에서 탈락시키려는 시도도 있었다”고 했다. 그는 “황제가 보기엔 노예들끼리의 싸움은 별 관심 없고 의미 없는 일이다. 박근혜는 노예 중에서도 ‘입안의 혀’처럼 굴고 용비어천가를 부르는 노예만을 별생각 없이 쓰는 것”이라 했다.

유승민은 대안인가

이후 둘의 관계는 우리가 최근 집중적으로 보고 들어왔던 것과 같다. 유승민은 지난해 10월 국정감사에서 “청와대 알라들” 발언으로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렸고, 올해 2월 원내대표가 된 뒤 정부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해왔다. 대통령의 작심한 듯한 국무회의 발언은 이전부터 묵혀둔 구원이 터져 나온 것에 불과하다. 사퇴 기자회견에서 유승민이 헌법 1조 1항을 언급한 것은 대통령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전임 이명박 전 대통령과 세종시 문제를 두고 각을 세워 지지율을 끌어올린 것처럼, 유승민은 현직 대통령에 맞서고 있다.

일련의 사태 뒤 유승민은 실제로 김무성 당대표를 제치고 여권 내 지지율 1위(10일 리얼미터 조사)로 급부상했다. 복지보단 성장을 우선시하는 시장주의자에, ‘사드’(고고도미사일 방어체계) 도입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안보 보수주의자인 유승민을 야권 지지자들도 응원하는 이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정태인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 소장은 “유승민은 합리적인 인물이지만 기본적으론 보수주의 경제학자다. 여권 내에서 ‘중부담, 중복지’가 나온 것은 분명 발전이지만, 이때의 증세는 복지보단 재정건전성 때문에 나온 얘기로 복지보다 성장을 우선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 국가가 빚을 많이 져선 안 된다는 논리다. 최저임금을 올리는 등 현 시기에 필요한 소득주도성장에 대한 이해는 편협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새누리당은 어디로 향하게 될까. 유승민은 지금 이 시기 어떤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그는 침묵하고 있다. <한겨레>가 10일 유승민 의원실을 통해 원내대표직 사퇴 이후 계획, 박 대통령에 대한 견해, 본인의 정책 등에 대해 두루 물었으나 유 전 대표는 “현재의 정국 상황을 고려할 때 별도로 언론을 통해 발언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답했다. 그나마 단초가 되는 것은 무엇보다 유승민과 가까운 이들이 지금의 집권 여당을 내부 개혁조차 어려운,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라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그의 한 측근은 “소신있는 이들은 국회의원 자리를 주지 않는다는 게 지난 총선의 공천 기준이었다. 개혁은 사람이 해야 하는데, 지금 새누리당 내부엔 사람이 없다. 다 대통령에 굴종하는 새가슴 아니면 부패한 이들뿐이다. 외생적 변수에 의해 개혁되는 방법밖에 없다. 결국 다음 총선을 전후해 여러 변화와 격동이 일어야 한다”고 했다.

우린 지금 집권 여당에서부터 시작될 거대한 정계개편 드라마의 예고편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박기용 고나무 허재현 기자 xe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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