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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대선 후보 김대중’ 소식에 박정희는 줄담배만…

등록 2015-08-02 15:33수정 2017-01-09 10:19

길을 찾아서 / 이희호 평전
제2부 만남과 동행-(10회) 신민당 전당대회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의 일생을 그리는 ‘이희호 평전-고난의 길, 신념의 길’은 <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19번째 이야기다.

이 이사장이 걸어온 길은 20세기 초 일제강점기부터 21세기 지금에 이르기까지 90여년에 걸쳐 있다. 이 일대기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해방 전후 대학 시절과 미국 유학, 사회운동 시절을 거쳐 정치인 김대중과 만난 뒤 현대사의 파란과 굴곡을 헤쳐 나오는 시기를 모두 아우를 예정이다. 그의 삶은 일찍이 사회문제에 눈뜬 여성운동가의 삶이었고, 흔들리지 않는 신앙으로 간난신고를 헤쳐 나온 종교인의 삶이었으며, 남편과 함께 불굴의 의지로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투사의 삶이었다. 이 일대기는 매주 한번씩 진행하는 육성 인터뷰를 바탕으로 삼아 김대중평화센터와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에 보관된 개인 문서와 구술 사료, 저서, 관련 책과 지인들의 증언을 참고해 집필한다.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1970년 9월29일 오전 서울 시민회관에서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 전당대회가 열렸다. 김대중 후보 진영은 한국 정당의 전당대회 역사상 처음으로 대회장 벽면을 후보 얼굴이 찍힌 포스터로 채웠다. 하늘에는 대형 풍선을 띄웠다. 시민회관 주위를 메운 지지자들은 피켓을 들고 ‘김대중’을 연호했다. 전례 없는 축제 분위기였다.

“1968년에 남편과 함께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를 참관한 적이 있었어요. 전당대회 전 과정을 지켜봤는데, 그쪽은 축제를 하듯이 대회를 치르더라고요. 그걸 본떠서 우리도 해보자는 아이디어를 냈어요. 피켓을 들고 플래카드를 걸고 포스터를 붙였지요. 상대 후보 쪽에서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그냥 대회장으로 들어갔어요. 그쪽에서는 다 이겼다고 생각하고 있었지요.”

지지자들의 열렬한 환호는 전당대회장을 압도했다. 김대중이 대세를 장악한 것 같았다. 신민당 원로이자 6선 의원인 정일형의 응원은 이희호를 감동시켰다. “정일형 박사가 ‘김대중 동지를 대통령으로’라고 쓴 피켓을 들고 응원하는데, 얼마나 고마운지 가슴이 뭉클했지요.” 정일형은 지지자들과 함께 “대통령 김대중!”을 외쳤다. 총재 유진산의 지원을 업은 김영삼 후보 진영은 사태를 낙관했다. 김영삼은 시민회관 2층 ‘그릴’에서 후보 지명 자축파티를 벌이기로 하고 맥주 200상자를 주문해 놓은 상태였다.

1970년 9월29일 신민당 임시전당대회에서 김대중 후보가 역전승을 거두는 데는 후보 얼굴 포스터와 대형 풍선 등으로 미국식 축제 분위기를 연출한 이희호의 선거전략 아이디어도 큰 몫을 했다. 그 뒤 71년 대선 유세 때도 김대중 지지 당원들이 앞장선 이런 홍보전략은 가는 곳마다 화제를 일으켰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70년 9월29일 신민당 임시전당대회에서 김대중 후보가 역전승을 거두는 데는 후보 얼굴 포스터와 대형 풍선 등으로 미국식 축제 분위기를 연출한 이희호의 선거전략 아이디어도 큰 몫을 했다. 그 뒤 71년 대선 유세 때도 김대중 지지 당원들이 앞장선 이런 홍보전략은 가는 곳마다 화제를 일으켰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전당대회 의장 김홍일이 개회를 선언했다. 유진산의 지명을 받지 못한 이철승은 후보 사퇴 선언을 하고 퇴장했다. 개표 결과를 발표하기도 전인 오전 11시 석간신문 한 곳은 ‘김영삼 압승’이라고 보도했다. 개표 결과가 발표됐다. “재석 885명 중 김영삼 421표, 김대중 382표, 무효 82표.” 이철승 지지자들이 단체로 백지 투표를 던졌다. 아무도 과반수를 얻지 못한 가운데 김대중의 표가 김영삼의 턱밑까지 쫓아왔다. 전당대회장은 뜻밖의 결과에 술렁거렸다.

김대중은 1차 투표 결과가 발표되자 손을 흔들며 앞으로 나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이번에는 내가 승리할 겁니다.” 1위와 2위를 놓고 2차 투표가 속개됐다. 개표 결과는 ‘재석 884명 중 김대중 458표, 김영삼 410표, 무효 16표’였다. 김대중의 장담이 현실로 나타났다. 김대중은 과반수를 확보했고, 김영삼은 표가 오히려 줄었다. 그날 아침까지 대다수가 예측하지 못한 이변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나는 남편이 후보로 지명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어요.” 이희호는 대의원이 아니어서 대회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남편의 승리 소식을 들었다.

개표 발표전 한 신문은 “김영삼 압승”
김영삼은 승리자축용 맥주 200상자
결선투표서 김대중 역전승 드라마
밤새 이철승 지지자 설득한게 주효

박정희, 빗나간 예측 김계원에 불벼락
일본있는 이후락 호출 대선총책 맡겨
김대중은 대중경제·향군폐지 등 공약
박 정권은 용공·이적행위로 몰아붙여

전태일 분신 충격…이소선 찾아 위로
움막집 안타까워 동대문에 새집마련
이듬해 방미…닉슨 부인과 만나
경찰, 사진 빼돌리고 거짓말이라 공격

이희호와 김대중의 확신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 김영삼 쪽이 느긋이 전당대회를 기다렸던 것과 달리 김대중과 이희호는 전당대회 전날 밤 통행금지 직전까지 청진동 여관을 돌았다. “지방에서 올라온 대의원들이 여관에 묵고 있었거든요. 여관마다 찾아다니며 인사를 드렸지요.” 당시 대의원들은 계파별로 무리를 지어 투숙했다. 어느 여관엔 유진산계 대의원들이, 또 어느 여관엔 비주류 대의원들이 진을 쳤다. 계보가 다른 사람들의 접근을 막으려고 여관마다 문 앞에 파수꾼을 세워두기까지 했다.

김대중 일행은 이날 밤 유진산계 대의원들과 이철승 쪽 대의원들이 묵고 있는 숙소를 공략했다. 장수가 단기필마로 적진 속으로 뛰어든 꼴이었다. 김대중과 이희호는 큰절을 올리고 대의원들과 마주앉았다. 김대중은 자신의 신념과 달변으로 대의원들의 표심을 흔들었다. 김대중이 그해 내내 전국을 돌며 박정희의 영구집권 음모를 공격하고 야당이 나아갈 길을 설파한 것도 대의원들의 마음을 얻는 데 힘이 되었다. 이희호가 대의원들을 찾아 산동네를 뛰었던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일이었다.

김대중은 이철승 쪽 대의원들에게 “이철승 후보가 불출마하면 그때는 나를 지지해 달라”고 설득했다. 그날 밤 사이 김대중 지지자는 김영삼 쪽과 선두를 다툴 만큼 불었다. 김대중은 이철승 지지자들의 표까지 확보함으로써 역전승의 발판도 마련했다. 김대중의 승리는 더 멀리 보면 1967년 목포 총선 때 박정희와 벌인 불퇴전의 대결과 그 뒤 쉬지 않고 계속한 삼선개헌 반대투쟁의 결과이기도 했다. 김대중의 투쟁은 대의원들의 심중에 ‘김대중을 후보로 세운다면 대통령 선거에 이길 수 있겠다’는 희망을 심어주었다.

1970년 9월29일 ‘40대 기수 3명’이 겨룬 신민당 임시전당대회에서 김대중은 예상을 뒤엎고 7대 대선 후보로 지명됐다. 사진은 애초 선두 후보였으나 2차 결선 끝에 패배한 김영삼이 당선자 김대중에게 축하의 악수를 건네는 모습.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70년 9월29일 ‘40대 기수 3명’이 겨룬 신민당 임시전당대회에서 김대중은 예상을 뒤엎고 7대 대선 후보로 지명됐다. 사진은 애초 선두 후보였으나 2차 결선 끝에 패배한 김영삼이 당선자 김대중에게 축하의 악수를 건네는 모습.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방송과 신문은 앞다투어 신민당 전당대회의 이변을 전했다. “남편은 마지막까지 득표에 모든 힘을 쏟아붓느라 후보 수락 연설을 준비하지 못했어요.” 대회장이 터져나갈 것 같은 함성 속에 김대중은 즉석연설을 했다. “바로 이 순간부터 새로운 시대가 열립니다. 대중이 주인이 되어 대중에 의한, 대중을 위한, 대중이 잘사는 시대를 만들 때입니다. 나는 새로운 시대의 선두에 서서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싸울 것입니다.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을 저지하고 건국 이래 국민의 숙원인 민주적인 정권교체를 실현하겠습니다.”

김대중이 승리했다는 소식을 들은 박정희는 재떨이가 수북해질 정도로 줄담배를 피웠다. 김대중이 후보로 지명될 가능성이 없다고 보고한 중앙정보부장 김계원에게 불벼락이 떨어졌다. 박정희는 주일대사로 나간 이후락을 불렀다. 그해 12월 제6대 중앙정보부장으로 이후락이 들어섰다. 박정희는 이후락에게 1971년 대통령선거 총지휘를 맡겼다. 이후락은 영남의 지역감정에 불을 지르는 지역분할 술책을 필승의 전략으로 내놓았다.

1967년 목포 선거가 전국 차원에서 재연될 상황이었다. 박정희가 떨어뜨리려고 그토록 애를 썼던 김대중은 목포 혈투에서 살아남아 박정희와 맞서는 자리에 섰다. 민심의 바다에 배를 띄운 김대중과 중앙정보부의 공작정치를 무기로 삼은 박정희의 대회전이 벌어질 참이었다. 김대중의 신념은 이런 것이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무기는 필요하지 않다. 무기가 있다면 국민에게 호소하는 변설(辯舌)이라는 무기다.” 김대중은 이 신념대로 변설로 무장하고서 중앙정보부의 암수에 맞섰다.

1970년 10월16일 김대중은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서 첫 공식 기자회견을 했다. 1950년대를 ‘암흑 전제시대’로, 1960년대를 ‘개발을 빙자한 독재시대’로 규정하고 1970년대를 ‘희망에 찬 대중시대’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남편은 선거를 인신공격이 아닌 정책 대결로 끌고 가겠다고 약속했어요. 정책으로 선거전을 주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지요.” 공약 중 ‘민족외교’ 항목은 커다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김대중은 남북의 화해와 교류를 통한 평화통일을 주장하고, 서신 교환, 기자 교류, 체육 왕래 같은 비정치적 접촉부터 하자고 제안했다. 이어 미국·소련·일본·중국이 한반도의 안전을 공동으로 보장하는 ‘4대국 안전보장’ 방안을 내놓았다. 박정희와 공화당은 김대중을 ‘용공’이라고 비난했다. “김일성이 피리를 불면 김대중이 춤을 추고, 김대중이 북을 치면 김일성이 맞장구친다”는 말도 했다.

김대중의 공약 가운데 유권자의 마음을 가장 크게 흔든 것은 향토예비군 폐지였다. 1968년 1·21 청와대 습격 사건 뒤 박정희가 만든 향토예비군은 생업에 바쁜 사람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 김대중의 공약에 민심이 출렁거렸다. 다급해진 정부는 “향토예비군 폐지 주장은 북한의 남침을 유도하고 촉진하는 이적행위”라고 윽박질렀다. 이희호는 남편의 공약이 박정희 정권의 총공격을 불러오자 무슨 일이 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저쪽에서 ‘용공이다’ 하며 덮어씌우니까 걱정이 됐지요. 속으론 불안했지만 그걸 내색하지는 않았어요. 누군가는 해야 할 말이라고 생각했지요.”

김대중의 공약 가운데 가장 많은 공이 들어간 것이 ‘대중경제’였다. 경영과 생산과 분배에 대중이 주체로 참여한다는 획기적인 경제정책이었다. 독일(서독)처럼 기업 경영에 노동조합 대표가 참여하고, 종업원이 기업의 주식을 나눠가짐으로써 이익을 공유하고 책임을 분담하며, 노사공동위원회를 만들어 능률 향상과 공평 분배를 이루어낸다는 것이었다. 요컨대,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하되 사회주의 정책을 절충하는 경제 대안이었다. 김대중의 대중경제론은 선거를 앞두고 급조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숙고를 거듭해 내놓은 독자적인 경제체제론이었다.

대중경제론의 뼈대는 김대중이 1955년 <사상계> 10월호에 쓴 논문 ‘한국 노동운동의 진로’에서 제시됐다. 여기서 김대중은 “사유재산과 개인의 창의를 존중하되, 자본만의 우위·지배를 배격하고 노동·자본·기술의 3자가 평등하게 협동함으로써 생산의 급속한 향상을 기하고 기업 운영과 이윤 분배의 사회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70년에는 대중경제를 핵심으로 하는 대중민주체제론을 <사상계> 1월호에 발표했다. 김대중은 이 글에서 대중경제를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지닌 모순을 대중민주주의와 산업민주주의로 극복하고 자유경제의 장점을 살려나가는 한국적 형태의 혼합경제체제”라고 규정했다. 김대중의 대중경제론은 1971년 <김대중씨의 대중경제 100문 100답>이라는 책자로 출간됐다. “남편은 국회에 들어간 뒤 한국내외문제연구소라는 개인 연구소를 세웠는데, 여기서 김병태·정윤형·박현채·최호진 같은 경제학자들과 일대일 토론을 거쳐 대중경제론을 다듬었지요.”

1971년 1월말 신민당 대선 후보 자격으로 미국을 처음 방문한 김대중은 워싱턴의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민주주의 신념’을 설파해 미국의 조야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사진은 박정희 정권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그의 방미 활동을 주선해준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왼쪽), 제롬 코언 하버드대학 교수와 함께한 모습.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71년 1월말 신민당 대선 후보 자격으로 미국을 처음 방문한 김대중은 워싱턴의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민주주의 신념’을 설파해 미국의 조야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사진은 박정희 정권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그의 방미 활동을 주선해준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왼쪽), 제롬 코언 하버드대학 교수와 함께한 모습.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대통령 선거운동이 막 본격화할 무렵인 1970년 11월13일 서울 청계천의 평화시장 피복노동자 전태일이 온몸에 석유를 끼얹고 분신했다. 스물두살 청년의 죽음은 온 나라에 충격을 주었다. 당시 평화시장엔 영세한 봉제공장이 1000여개나 들어차 2만7000여명의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었다. 10대의 여공들이 창도 없는 먼지투성이 작업장에서 하루에 15시간씩 중노동을 했다. 그렇게 일해 하루 일당으로 차 한 잔 값인 50원을 받았다. 전태일은 어린 여공들을 직업병과 과로사로 내모는 현실을 바꿔보려고 발버둥 치다가 스스로 자기 몸을 불살랐다. 전태일의 죽음은 이희호와 김대중에게도 충격을 주었다.

“나는 전태일이 분신했다는 소식을 종로 기독교회관에 있다가 들었어요. 뒤에 전태일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사는 집에 찾아갔지요. 집이 너무나 초라했어요. 움막 같은 집이었어요. 그런데 뒤에 이소선 여사를 강연장에서 만났는데 공부도 하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똑똑한지 놀랐어요. 그런 어머니에게서 그런 아들이 나왔구나 하고 생각했지요. 그 뒤로 이소선 여사가 돌아가실 때까지 가까운 관계로 지냈어요.”

이희호와 김대중은 수유리 근처에 살고 있던 이소선을 찾아가 위로했다. 움막집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어 동대문 근처에 새로 집을 마련해 주었다. 김대중은 1971년 1월 새해 기자회견에서 ‘전태일 정신의 구현’을 선거공약으로 내걸고 노동3권을 재정비하여 자유로운 노동조합운동을 보장하고 근로기준법의 잘못된 조항을 바로잡겠다고 밝혔다.

1971년 1월 이희호와 김대중은 미국을 방문했다. 하버드대학 교수 제롬 코언의 소개로 상원의원 에드워드 케네디, 윌리엄 풀브라이트와 만났다. 김대중은 워싱턴의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자신의 정책을 설명하고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실현될 것이라는 신념을 밝혔다.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 일행이 미국의 주요 인사와 만나는 것을 어떻게든 막으려고 했다. 이희호와 김대중은 대통령 리처드 닉슨을 만나려 했으나 주미 한국대사의 개입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닉슨 면담은 성사되지 못했지만, 이희호는 대통령 부인 퍼트리샤 닉슨과는 백악관에서 만났다. 이 만남은 당시 <문화방송> 워싱턴 특파원으로 있던 문명자가 다리를 놓았다. 박정희의 3선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한 문명자는 한국 정부의 방해를 뚫고 2월3일 이희호와 퍼트리샤의 만남을 성사시켰다. “문명자씨의 도움으로 퍼트리샤를 백악관 집무실에서 만났는데, 긴 이야기를 한 건 아니었어요. 서로 손잡고 인사를 주고받는 정도였지요.” 동행한 문명자는 퍼트리샤가 이희호의 손을 꽉 잡고 밝게 인사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

1971년 2월 신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과 함께 미국을 방문한 이희호(오른쪽)는 중앙정보부와 주미대사관의 철벽 방해를 뚫고 백악관 집무실에서 닉슨 대통령 부인 퍼트리샤(왼쪽)를 만났다. 박정희 정권이 ‘조작’으로 몰고 간 바로 그 장면이다. 당시 미국여기자협회 부회장으로 이 극적 만남을 주선했던 문명자는 저서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1999년)에서 ‘2월3일 백악관으로 들어갈 때 이희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71년 2월 신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과 함께 미국을 방문한 이희호(오른쪽)는 중앙정보부와 주미대사관의 철벽 방해를 뚫고 백악관 집무실에서 닉슨 대통령 부인 퍼트리샤(왼쪽)를 만났다. 박정희 정권이 ‘조작’으로 몰고 간 바로 그 장면이다. 당시 미국여기자협회 부회장으로 이 극적 만남을 주선했던 문명자는 저서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1999년)에서 ‘2월3일 백악관으로 들어갈 때 이희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김대중 후보 진영은 이희호와 퍼트리샤가 만나는 현장을 담은 사진을 보도용 자료로 만들어 공개할 예정이었다. “그 사진을 복사하려고 무교동의 한 사진관에 맡겼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경찰이 탈세 혐의로 사진관을 조사한다며 가택수색을 했어요. 그러고 나더니 사진이 사라져버렸어요. 우리가 항의를 하니까 공화당에서 ‘김대중씨 부인은 닉슨 대통령 부인과 만난 적이 없는데도 거짓말을 한다’고 우리를 공격했어요.” 졸지에 이희호가 거짓말쟁이가 될 판이었다. “그런데 실은 우리집에 문명자씨가 찍은 사진이 한 장 더 있었거든요. 그래서 사진 전문가를 집으로 불러 복사해서 공개했지요. 그랬더니 이번에는 단순 분실인데 정부에 덮어씌운다고 비난하는 거예요. 참 어처구니가 없었지요.”

인터뷰 녹취정리/유선희 인턴기자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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