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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책을 불태운 다음엔 인간을 불사르게 된다”

등록 2015-11-02 15:06수정 2015-11-02 17:16

[한겨레21] 시인 하이네 ‘야만의 역사’ 예언
1930년대 나치 독일의 ‘분서’는 ‘갱유’로 이어졌고
1960년대 박정희의 국민교육헌장은 유신의 전주곡
2015년 검정 역사 교과서 박멸 나선 박근혜 정권은…
독일 베를린 훔볼트대학의 베벨 광장은 국립 오페라극장과 옛 왕실 도서관에 둘러싸여 있다. 평범해 보이는 이 광장이 특별한 이유는 광장의 유리 바닥, 그 밑의 지하 공간 때문이다. 가로·세로 1m 정도의 유리 바닥 속을 들여다보면 지하의 어둠에 에워싸인 흰색 책장들이 보인다. 수천 권의 책이 들어갈 책장들에는 그러나, 단 한 권의 책도 꽂혀 있지 않다. 이 텅 빈 ‘도서관’에는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1797~1856)의 글귀가 새겨져 있다. “책을 불사르는 것은 오직 시작일 뿐이다. 결국 인간을 불태우게 된다.”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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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교육으로 확대된 인간 개조 운동

1933년 5월10일 밤, 나치당을 지지하는 극우파 대학생들이 횃불과 장작더미를 들고 베벨 광장에 모여들었다. ‘비독일적 사상’을 담은 책을 도서관에서 끌어내 불태우기 위해서였다. 에밀 졸라, 프란츠 카프카, 카를 마르크스, 지그문트 프로이트, 토마스 만 등 셀 수 없이 많은 작가들의 책 2만 권이 화염 속에서 불타올랐다. 대학생들이 나치 구호와 선동가를 부르며 환호했다. 나치당 선전 책임자인 요제프 괴벨스는 선언했다. “독일의 미래 세대에게 필요한 것은 책이 아니라 인격이다. 오늘 이곳에서 과거의 악령을 불태우는 젊은이들은 그 강인한 인격의 상징이다. 옛 지성은 잿더미로 사라지고 그 잔해 속에서 새 인격이 싹틀 것이다.”

1932년 7월 총선에서 나치당은 제1당을 차지했고 아돌프 히틀러는 이듬해인 1933년 1월 총리에 취임했다. 히틀러의 최우선 과제는 ‘독일 국민 계몽’이었다. “조국 독일의 민족적 재건에 대해 국민을 계몽하고 선전”할 제국선전부를 설립하고 그 장관으로 괴벨스를 임명했다. 괴벨스는 순수한 독일 정신과 인격을 일깨운다는 명목으로 유대인, 외국인, 공산주의자, 자유주의자 등의 작품을 불태우는 데 앞장섰다. 분서는 베를린의 베벨 광장뿐 아니라 독일의 여러 도시에서 이뤄졌다. 참혹한 나치 독일 역사의 서막이었다. “결국 인간을 불태우게 된다”는 하이네의 예언은 아우슈비츠에서 현실이 됐다. 당시 유럽에 살고 있던 약 1100만 명의 유대인들 가운데 절반이 넘는 약 600만 명이 학살됐다.

하이네의 예언은 한국 역사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는 평소 지론인 ‘인간 개조 운동’, 좀더 구체적으로는 ‘한국인 개조 운동’을 펼쳤다. 이 운동은 정규교육으로까지 확대됐다. 학생들은 ‘인간 개조’를 당하기 위해 우선 ‘(5·16) 혁명공약’을 달달 외웠다. “혁명공약 이루자”는 노래를 목청껏 불러댔다.

그 결정판은 개인에 대한 ‘국가의 절대 우위를 주장하는 파시즘의 속성’을 담은 국민교육헌장이었다. 1968년 12월5일 ‘대통령 박정희’의 이름으로 선포된 헌장은 학교 교과시간에 포함됐고 그림책·영화·음반 등으로 제작·배포됐다. 모든 학생은 393자의 헌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줄줄 외워야만 했다.

홍윤기 동국대 교수(철학)는 2001년 <역사비평>에 낸 논문 ‘박종홍 철학 연구: 철학과 권력의 퇴행적 결합’에서 국민교육헌장을 이렇게 평가했다. “헌장 선포자로서 박정희는 더 이상 정치나 경제에서 성공한 권력자가 아니라 국민교육의 지도자로서 정신적으로 내면화한 이미지를 요구할 수 있게 됐다. 이런 점들을 배경으로 놓고 볼 때, 역사적으로 헌장의 제정과 실현은 명백히 유신 쿠데타(10월 유신)의 정신적 전주곡이었다.”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는 “책을 불사르는 것은 오직 시작일 뿐이다. 결국 인간을 불태우게 된다”고 경고했다. 1968년 12월5일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국민교육헌장 선포식. 이 헌장은 “10월 유신의 정신적 전주곡”이라 불렸다. 정부기록사진집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는 “책을 불사르는 것은 오직 시작일 뿐이다. 결국 인간을 불태우게 된다”고 경고했다. 1968년 12월5일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국민교육헌장 선포식. 이 헌장은 “10월 유신의 정신적 전주곡”이라 불렸다. 정부기록사진집

패배주의·자학의 역사관 가르친다는 진단?

1972년 10월17일 대통령 종신제를 보장하기 위한 이른바 ‘10월 유신’이 선언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10월 유신에 반대하는 자들은 북한 공산당과 다를 바 없다고 공언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고문으로 ‘빨갱이’라는 실토를 받아냈다.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 소지죄’는 단골 메뉴였다. 그렇게 ‘빨갱이’로 낙인을 찍어 죽이거나 오랫동안 감옥에 가뒀다.

역사학자 최상천은 일제강점기와 박정희 정권을 비교했다. “일제가 악독한 짓도 많이 했지만 그래도 지킬 것은 지켰다. 독립운동가들도 거의 정식 재판을 받았고 길어야 2~3년 정도 감옥살이를 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인혁당 근처에 가보지도 않은 사람들을 잡아다가 족치고는 8명에게 사형, 8명에게 무기징역, 6명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하고 그 이튿날 번개같이 처형해버렸다. 국민 대표인 국회의원조차 무차별 고문하는 나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고 절규하며 분신자살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호소할 수 없는 나라, 유신 반대 유인물 뿌린 죄로 징역 5년을 사는 나라, ‘오적’ 시 한 수로 졸지에 빨갱이가 되어버리는 나라…. 일제시대에도 이런 야만은 없었다.”(<알몸 박정희>, 2001년)

19세기의 하이네는 분서와 그 이후에 “사람이 불태워지는” 야만의 역사를 예언했다. 그가 발언한 지 100여 년이 지나 독일에서, 한국에서도 그것은 적중했다. 섬뜩한 일이다. 1995년 조각가 미하 울만은 책 2만 권을 불태웠던 베를린의 베벨 광장에 분서 기념물 ‘도서관’을 세웠다. 사라진 책들을 기억하며 과거의 잘못을 되새김질하는 것이다. 어두운 역사를 드러내고 뼈아픈 교훈을 얻지 못하면 그 역사는 반복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또다시 책을 없애는 정책이 등장했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쟁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10월22일 “현재의 교과서는 우리 현대사를 태어나선 안 될 정부, 못난 정부로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는데 이렇게 패배주의를 가르쳐서 되겠느냐”며 “(국정화는) 이것을 바로잡자는 순수한 뜻”이라고 말했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원유철 원내대표,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이종걸 원내대표와 청와대 접견실에서 1시간48분간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서였다. 박 대통령은 “자라나는 세대에게 우리나라에 대한 자부심과 정통성을 심어줘야 통일 시대를 대비한 미래 세대를 올바르게 키울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도 “자학의 역사관, 부정의 역사관은 이 땅에서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9월2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

“패배주의” “자학의 역사관”이 한국 역사 교과서에 담긴 이유는 “특정 이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근대사·현대사 분야의 집필진으로 구성돼 있기 때문이라고 박 대통령은 진단했다. “검정 역사 교과서 집필진의 80%가 편향된 역사관을 가진 특정 인맥으로 연결돼 7종의 교과서를 돌려막기로 쓰고 있다. 결국 하나의 좌편향 교과서라고 볼 수밖에 없다. 국정교과서는 불가피하다.”

책이 사라지고 죽음의 행렬이 시작됐다

박근혜 정부가 “좌편향 교과서”를 박멸하려는 이유는, 1933년 독일 나치당이 “비독일적 사상”을 담은 작품을 불태우며 내세웠던 ‘순수성’과 잇닿아 있어 보인다. 불행히도 우리는 책이 사라지고, 그 이후에 펼쳐치는 ‘죽음의 행렬’을 경험했다. 다시 되풀이할 수 없는 암울한 역사였다. “절대 물러설 수 없는, 꼭 이겨야만 하는 역사전쟁이 시작됐다.”(김무성 대표, 10월17일 새누리당 중앙위원회 산악회 발대식에서)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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