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박정희 체제’ 관 주도 국가관 주입 프로젝트 첫 분석
아버지의 새마을 운동에 보조 맞춰 새마음 운동 전개
20대 퍼스트레이디 “우리의 마음을 깨끗이 청소해야”
새마음봉사단 재건한 ‘근화 봉사단’ 1988년 출범
“우리 사회가 개판이 아니면 무엇이 개판이겠는가
박정희 대통령이 세종대왕과 같은 위치로 부각돼야”
박근혜 대통령이 24살이던 1977년 3월25일 인천에서 열린 새마음갖기 국민운동 궐기대회에서 격려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근혜 대통령은 ‘역사 국정교과서를 집필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왜곡할 것이라며 국론을 분열시키느냐’는 논리를 펼친다. 대통령은 지난 10월27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역사 국정교과서가 역사 왜곡과 미화를 시도한다면 “저부터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대통령이 특정 교과서 내용을 두고 “좌시”하지 않겠다는 것 자체가 정부의 통제 의도를 드러낸다는 얘기가 나오지만, 대통령은 역사학계의 논란이 거의 없는 국정교과서를 만들면 되지 않겠느냐고 항변한다. 그러면 되는 걸까?
유엔은 2013년 총회에서 “하나의 역사 교과서만을 승인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교사들이 다양한 교과서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권고했다. “국가가 역사 교과서를 하나로 줄이는 것은 퇴보적”이라고 유엔은 우려했다.
왜곡하지 않은 하나의 올바른 역사 교과서를 만들겠다는 방침(박근혜 대통령)과 왜곡 여부와 상관없이 하나의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것은 퇴행이라는 권고(유엔)가 충돌한다. 우리나라는 1991년 유엔에 가입했다. 박 대통령은 왜 국제 기준에서 멀어지는 길을 택했을까?
대통령의 국회 시정연설에서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우리가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역사를 바로 알지 못하면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을 수도 있다”며 “대한민국의 미래 세대가 확고한 국가관을 가지고 주도적 역할을 하기 위해서 역사교육을 정상화하는 것이 우리 세대의 사명”이라고 말한 부분이다.
국가가 주도한 역사 교과서를 통해 가치관·국가관을 올바르게 심어야만 “민족정신의 잠식”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 대통령의 확고한 생각으로 읽힌다. 정부가 가치관·국가관을 이식하고 역사관을 개조할 수 있다는 대통령의 확신이 엿보인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박 대통령이 이미 1970년대 후반 ‘새마음갖기 운동’(이하 새마음운동)이라는 정신개혁운동을 전국적으로 벌여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경험이 있다는 점이다. 당시 박 대통령은 불과 20대 중반이었다. 이제 박 대통령은 그때보다 정치적으로 한층 원숙한 위치로 올라섰다.
<한겨레21>은 새마음운동의 경험이 국정교과서를 통해 역사관을 바꿀 수 있다는 그의 자신감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등을 처음으로 살펴봤다. 1977~78년 새마음운동 궐기대회와 발대식에서 했던 그의 격려사를 수록한 단행본 <새마음의 길>(1979년 발행·저자 박근혜), 새마음운동의 주축이 된 구국여성봉사단(총재 박근혜)이 1978~80년 발행한 기관지 <새마음>, 그리고 당시 관련 기사 등을 분석했다.
“새마음이 가는 길에 사회정화 이어진다”
1977년 8월 당시 부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서예 연습을 받고 있는 24살 박근혜의 모습. 대한민국 정부 기록사진집
어머니가 1974년 세상을 떠난 뒤 박 대통령은 청와대 퍼스트레이디가 됐다. 그해 9월16일 일기에 젊은 박근혜는 “책임, 너무나도 무거운 책임”이라고 적었다. “지금 나의 가장 큰 의무… 국민으로 하여금 아버지는 외롭지 않으시다는 것을 보여드리는 것이다”(1974년 11월10일)라고 일기에 쓴 그는 아버지의 새마을운동에 보조를 맞춘 ‘새마음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만 24살인 1977년 3월부터 시작한 일이다. 전국에 ‘곳곳마다 새마을 사람마다 새마음’ ‘새마음이 가는 길에 사회정화 이어진다’와 같은 표어가 나붙었다.
그는 새마음운동이 “물질적인 발전과 정신 개발이 병행되도록 하려는 정신혁명운동”이라고 주한미군방송 (1977년 5월30일)에 출연해 정의했다. 그는 “충·효·예를 바탕으로 한 새마음은 ‘밝은 마음, 맑은 마음, 고운 마음, 깨끗한 마음’”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새마음운동의 구체적 실천 내용 자체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자연보호운동, 의료봉사사업, 불우노인돕기, 불우청소년 선도사업, 불량식품 줄이기 등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 하지만 관의 주도로 국민의 정신을 개조한다는 것이 이 운동의 핵심이었다. 그리고 20대 중반의 퍼스트레이디가 국민의 정신을 바꾸는 이 운동을 지휘했다.
당시 박근혜 총재가 이끄는 구국여성봉사단의 기관지 <새마음>은 신문의 사설 격인 ‘우리의 주장’에서 “우리는 역사적 기로에 서 있다”며 ‘정신 혁명’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새 역사를 창조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역사 속에 소멸되어버리느냐 하는 지대한 시대적 기점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민족 생존을 위한 새 각오를 다져야 할 때가 왔습니다. 이제는 우리도 정신과 마음을 새것으로 개조하고 회복해야 할 시대입니다. 이것만이 국가가 요구하고 민족이 희망하는 생명이요 광명인 것입니다. 새마음갖기 국민운동은 바로 국민 총화와 국가 안보를 굳건히 다지는 길입니다.”
같은 사설에서 <새마음>은 정신개조를 통한 민족운동을 강조했다.
“이 운동은 정신계발운동이요, 정신혁명운동이며, 역사적 민족운동인 것입니다. 우리 민족 고유한 정신문화를 되찾아 충·효·예를 바탕으로 한 새마음갖기 국민운동을 일으켜야 합니다. 민족의 전통문화를 이어받아 오늘에 되살려 새마음의 밭을 갈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뭉치자, 아끼자, 돌보자’는 단훈의 기치 아래 모여 국가 목표에 도움과 초석이 되는 역군이 될 것을 주장하는 바입니다.”
이러한 정신개조 운동을 박정희 대통령도 지원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7년 새해 기자회견에서 “새마음으로 자기 혁명을 이룩해야 한다”고 독려했고, 젊은 박근혜는 1978년을 새마음운동 결의·실천의 해로 정해 이 운동의 전국 확산을 꾀했다. 지역별 새마음갖기 궐기대회가 전국에서 열렸고, 20대의 박근혜는 머리카락이 희끗한 어른들과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충·효·예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격려사를 읽었다.
예를 들어, 1977년 5월11일 새마음갖기 경북도민 궐기대회에서 그는 “새마음운동은 사회 전체가 하나의 가정과 같은 풍토를 조성하는 데 기여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해 6월3일 열린 부산시민 궐기대회에선 “하늘의 뜻을 우리 마음 안에 모시려면 우리 마음을 깨끗이 청소해야 한다”면서, 충·효·예를 실천하지 않으면 “한국인조차 될 자격이 없을 것”이라며 부단한 실행을 주문했다.
최태민 목사의 딸 최순실씨와 손잡고
1977년 3월 서울에서 열린 새마음운동 궐기대회(가운데). 구국봉사단 명예총재를 맡던 시절인 그해 같은 달 최태민(오른쪽 사진 왼쪽)과 함께 경로병원 개원식에서 테이프를 끊는 사진이 보도된 당시 신문. 연합뉴스, 한겨레
아이들에게 새마음을 이식하는 전국대회도 확대됐다. 시·도별 중·고등학생 새마음갖기 결의 실천대회와 초등학생 웅변대회가 진행됐고, 학생들은 “밝은 마음, 맑은 마음, 고운 마음, 깨끗한 마음”이 적힌 어깨띠를 두르고 이 운동의 총책임자(박근혜)의 격려사를 들었다. 그는 이런 발대식에서 녹색 ‘새마음기’를 전달했고, 학생들은 새마음기를 들고 연단에 선 그의 앞을 지나는 의식을 진행했다. 학생들은 결의대회에서 “새마음”을 연호했다.
그는 부산시 새마음 중·고등학생 연합회 발대식(1978년 6월19일)에서 “우리가 새마음의 실천을 다짐하고 또 다짐하면서 우리 생활 곳곳에서 실천해나가고자 하는 노력은 우리 사회 안에 새마음이라는 새 도덕관과 윤리를 정착시키는 오직 유일한 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교육을 통한 ‘단일 가치관의 정착’을 강조하기도 했다. 같은 연설에서 “한번 정착된 가치관이 세대가 바뀌고 세월이 흘러도 계속 튼튼하게 자리잡고 발전해나가려면 우리는 교육을 통한 새마음갖기 운동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학생들에게 주지시켰다.
그해 6월21일 열린 서울시 새마음 중·고등학생 연합회 발대식에선 “가뭄에 물 한 방울 아끼는 마음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아낄 때 우리의 정신운동은 알찬 결실을 맺었다고 할 것”이라고 확고한 국가관을 강조했다. 1978년 6월22일 열린 서울시 중·고등학교 새마음 결의·실천대회엔 1만여 명의 학생이 참여 또는 동원됐다.
대학생 모임도 결성됐다. 1977년 2월 결성된 새마음 전국대학생연합회는 창단 목적을 “올바른 민족관과 확고한 국가관, 주체성 있는 가치관을 정립시키는 데 있다”고 정했다. 2015년 박 대통령이 국회 시정연설에서 역사 교과서를 국정화하는 이유로 밝힌 내용과도 연결된다. 당시 새마음 전국대학생연합회 회장이 지난해 국정 개입 의혹의 논란에 섰던 정윤회씨의 부인이자 구국봉사단 활동의 핵심 인사였던 최태민 목사의 딸 최순실(최서원으로 개명)씨였다.
중·고·대학생들을 한데 뭉친 전국 새마음 중·고·대학생 총연합회도 발족됐다. 정부는 이 총연합회의 지도위원장으로 문화교육부 차관을 임명하고, 시·도교육감들을 지도위원으로 위촉해 학생들의 정신 개혁을 전담시켰다.
대한노인회도 이 운동에 화답해 1978년 6월14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1350명이 모여 전국노인지도자 새마음갖기 결의 실천대회를 열었다. “전국의 300만 명 노인이 나라를 구하기 위한 새마음운동에 솔선 참여하겠다”는 결의가 이뤄졌다.
성균관 유림회도 1978년 새마음운동 총궐기대회에 참가해 전국의 직장과 학교에서 “충·효의 이념과 새마음 실천 방안을 강연하고 매월 2만5천 부씩 발행하는 유림월보와 기타 출판물을 통해 꾸준히 충·효 정신을 계몽할 것”이란 계획을 발표했다. 직장별로 새마음직장봉사단이 결성됐고, 동아건설 중동지역 새마음갖기 전진대회 등 국외에서도 이 운동이 전개됐다.
근화봉사단의 유신 역사 왜곡 주장
1978년 6월, 한국수출산업공단에서 열린 새마음 직장 봉사대 발대식에서 단기가 입장하는 모습. 한겨레
새마음운동에 대해, 경제 발전의 속도에 맞춰 국민의 의식을 끌어올리려는 시도였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이 운동이 유신헌법으로 장기 집권을 이어간 ‘박정희 체제’에서 정부가 단일한 국가관을 주입하려 한 정신개조운동이었다는 비판적 의견도 있다.
구국여성봉사단의 기관지 <새마음> 7월호에 실린 좌담 기사를 보면, “유신 이후 한국적 민주주의가 정착 단계에 들어섰다. 새마음운동은 정신문화를 근대화시키자는 것이며, 이 운동은 정신혁명·정신계발 운동이다”(한 신문사 편집국장), “새마음운동은 자주적이고 자립적인 우리나라의 위치를 세우는 유신운동과 직결된다”(한 서울대 교수), “이 운동으로 영혼을 흔들어놓아야 한다”(한 극작가)는 좌담 참가자들의 찬사가 기록돼 있다. 한국수출산업공단은 새마음직장봉사단 결단대회를 연 뒤 “새마음 정신으로 총력을 경주하여 유신 과업 실천에 최선봉이 된다”는 다짐을 언론에 밝히기도 했다.
젊은 박근혜는 1978년 11월 전북 새마음 중·고등학생 연합회 발대식에서 “이 운동이 범국민 운동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그가 24살부터 26살까지 전개한 범국민 정신 개조·혁명 운동을 통해 “확고한 국가관과 충·효·예의 가치관”을 심었다고 자평할 만한 경험이 축적된 것이다.
새마을운동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어느 역사학자는 이름을 밝히지 말 것을 요구하며 “1970년대 중반 이후 새마을운동의 동력이 이전보다 떨어지면서 정신 혁명, 정신 개조 쪽으로 정권 차원의 강조점이 옮겨간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1979년 10월 부친이 사망한 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 운동을 이끈 새마음봉사단(전신 구국여성봉사단)이 1980년 11월 해체됐다. 그는 이후 인터뷰에서 “(전두환 정권에 의한) 강제 해체”라며 불편한 심경을 내비쳤다.
그러나 새마음운동 조직은 87년 민주화 이후 부활했다. 1988년 ‘박정희 대통령·육영수 여사 기념사업회’가 발족하고, 이듬해 근화봉사단이 출범했다. 무궁화꽃을 일컫는 ‘근화’를 이름으로 내세운 봉사단으로, 1990년에는 회원이 40만 명으로 불었다. 국민의 정신 개혁을 목적으로 했던 새마음봉사단을 재건한 조직이다.
이 봉사단의 회장을 맡은 그가 1979년 이후 처음으로 언론과 인터뷰하며 공개 활동을 재개한 1989년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이 무렵 그는 “역사 왜곡”이란 말을 언론에 공개적으로 처음 거론했다. 그는 부친이 세상을 떠난 지 10주기를 맞은 1989년 한 해 동안 1960~70년대 역사를 바로잡는 일에 매진했다.
예를 들어 1989년 10월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하신 일에 대한 왜곡과 잘못된 인식을 바로 하는 일을 할 수 없다면 아무런 보람도, 의미도, 기쁨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는 그해 7월 발행인·편집인을 맡은 <근화보>를 한 달에 한 번씩 발간했다. 총 15회가 나왔고, 사설을 직접 썼다. 매체를 창간해 부친의 역사를 바로잡고 이를 확산하는 일에 나선 것이다. 새마음봉사단을 계승한 근화봉사단이 이런 그의 활동과 <근화보> 배포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근대사 가장 위대한 인물은 박정희”
<근화보>엔 “박정희 대통령이 근대사에서 국민을 구한 가장 위대한 인물이어야 한다. 조선시대 세종대왕과 같은 위치로 부각돼야 한다”는 글이 실렸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업적을 5개 분야(자주국방·자립경제 등)로 나눠 긍정적으로 평가한 시리즈가 5개월 넘게 실렸다.
<근화보> 1~15호에 실린 사설이나 1989년에 여성 월간지·신문·방송과 집중적으로 진행한 인터뷰를 보면 당시 역사를 바라보는 그의 인식을 읽을 수 있다. ‘현 사회는 병에 걸렸으며, 이는 박정희 시대에 대한 부정과 역사 왜곡에서 비롯됐고, 이것이 사회질서를 뿌리째 흔들고 있으며, 이렇게 되면 어린 세대들에게 국가에 대한 긍지를 심어줄 수 없다’는 논리로 흐른다. 역사 왜곡을 다시 언급하며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진행하는 2015년과의 상관성을 엿볼 수 있다.
그는 <근화보> 3호에 쓴 ‘역사에 대한 인식’이란 제목의 사설에서 “오늘날 우리 사회 양상이 개판이 아니면 무엇이 개판이겠는가. 이러한 우리 사회의 현실은 그동안 우리 스스로가 만든 결과일 뿐이다. 병도 제대로 치료하려면 우선 그 원인을 바르게 알아야 한다. 그 근본 원인은 (박정희 시대에 대한) 역사의 왜곡에 있었다”고 적었다.
이어 그는 “그 결과 역사에 긍지를 가질 수 없고 선배에 대해 존경심을 가질 수 없게 된 젊은 세대들은 정신적 공허함 속에서 북한을 찬양하는 데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역사에 대한 바른 인식을 정립하고 뿌리내리는 일은 이 사회를 다시 복되게 살리는 활력소이다”라고 주장했다.
그해 10월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선 “유신이 무슨 커다란 범죄처럼 됐다. 장기 집권을 위한 음모라는 등 나쁘게만 묘사됐다. 어느 한 시대 전부를 없애고, 모조리 잘못된 것으로 치부한다면 결국 이 땅에서 자라나는 세대들이 누려야 할 정신적 자산은 다 파괴되는 것 아니냐”며 유신 시대를 엄호했다.
1990년 <근화보> 15호에는 그가 <코리아 투데이>와 가진 인터뷰 전문이 실렸다. 이 인터뷰에서 그는 “지난 1960~70년대는 외국으로부터 한강의 기적이라든가, 새마을운동은 세계 개발도상국의 모범이라는 말들로 칭찬하는 평가를 들어왔다. 하지만 (이 역사에 대한) 왜곡은 단순히 역사의 왜곡이라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 아직까지도 나쁜 영향을 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또한 그는 아버지의 성과를 집대성한 <겨레의 지도자>란 책을 1990년에 내면서 1960~70년대를 독재로 바라보는 시선을 비판하는 서문을 실었다.
“‘만약에 모세가 위원회를 통해서 정치를 했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끝내 홍해를 건너가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구세군 창설자 윌리엄 부스는 말했다. 겨울에는 두꺼운 옷을 입고, 여름에는 얇은 옷을 걸치듯 국가의 위기시에는 그 위기를 감당하여 헤쳐나갈 수 있는 방도를 택함이 마땅한 일인데, 국난을 맞아 태평 시절의 방법으로 위기를 극복해야만 한다고 우긴다면 그것이 억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서문은 1990년 5월22일 일기에서 그가 “한 달 이상 걸려” 썼다고 할 만큼 심혈을 기울인 글이다. 그는 이 서문에서 “뿌리·줄기·가지·잎 등이 없는 나무란 상상할 수도 없듯이 이런 것들이 없는 열매는 존재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적었다. 박정희 시대를 폄훼하는 것은 “열매는 열매이고, 뿌리는 뿌리일 뿐이라고 우기는 것”과 같다고 그는 반박했다.
유엔, 역사교육으로 젊은이 길들이지 말아야
그가 대통령이 된 뒤 부친의 명예 회복을 위해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시도하겠다고 명시적으로 밝힌 적은 없다. 하지만 국정화를 반대하는 이들은 아버지 시대와 긴밀히 연결된 그가 직접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하면서 우리 사회를 이념적으로 양분시키고 있다고 우려한다.
특히 20대 중반에 새마음운동으로 정신 혁명에 나섰던 그가 다시 하나의 역사 교과서로 ‘올바른 국가관·가치관’을 심어주겠다고 나선 데 대해 걱정하는 목소리가 많다. 1970년대 그가 펼친 새마음운동이 2015년에 ‘새역사 새마음운동’으로 복원된 듯한 양상이 전개되고 있다.
2013년 9월 유엔은 “역사교육은 애국심 강화, 국가적 정체성 강화, (그 정부의) 공식적 이념이나 (그 사회의) 지배적인 종교가 이끄는 가이드라인에 맞춰 젊은이들을 길들이려는 목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고 각국에 권고했다.
국민 정신개조운동과 역사에 관한 박근혜 대통령의 과거 발언
1977년 6월 3일
“마음을 깨끗이 청소해야”
하늘의 뜻이 우리와 함께 하시도록 하려면, 또한 그 뜻을 우리 마음 안에 모시려고 한다면 우선 마음을 깨끗이 청소하고 아름답게 가꾸어 모실 준비를 해야 합니다.
-새마음갖기 부산시민 궐기대회 격려사
1978년 6월 19일
“새마음, 새 인간”
우리가 새마음의 실천을 다짐하고 또 다짐하면서 우리 생활 곳곳에서 실천해나가고자 하는 노력은 우리 사회 안에 새마음이라는 새 도덕관과 윤리를 정착시키는 오직 유일한 길이 될 것이며, 한번 정착된 가치관이 세대가 바뀌고 세월이 흘러도 계속 튼튼하게 자리잡고 발전해나가려면 우리는 교육을 통한 새마음갖기 운동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새마음은 매일매일 새로이 가져야 하고, 그러한 생활습관이 굳어질 때 비로소 새 인간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산시 새마음 중·고등학생 연합회 발대식 격려사
1978년 6월 21일
“가뭄의 비처럼 나라 사랑해야”
우리 모두가 한참 가뭄이 심할 때 비를 기다리는 간절하고 절박한 마음으로 나라의 소중함을 느끼며, 가뭄에 물 한 방울 아끼는 마음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아낄 때 우리의 정신 운동은 알찬 결실을 맺었다고 할 것이며 희망찬 조국의 장래는 보장된다고 하겠습니다.
-서울시 새마음 중·고등학생 연합회 발대식 격려사
1978년 7월 15일
“정신과 마음을 새것으로 개조해야 할 때”
우리는 역사적 기로에 서 있습니다. 새 역사를 창조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역사 속에 소멸되어버리느냐 하는 지대한 시대적 기점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민족 생존을 위한 새 각오를 다져야 할 때가 왔습니다. 이제는 우리도 정신과 마음을 새것으로 개조하고 회복해야 할 시대입니다. 이것만이 국가가 요구하고 민족이 희망하는 생명이요 광명인 것입니다.
새마음갖기 국민운동은 바로 국민 총화와 국가 안보를 굳건히 다지는 길입니다. 이 운동은 정신계발운동이요, 정신혁명운동이며, 역사적 민족운동인 것입니다. 우리 민족 고유한 정신문화를 되찾아 충·효·예를 바탕으로 한 새마음갖기 국민운동을 일으켜야 합니다. 민족의 전통문화를 이어받아 오늘에 되살려 새마음의 밭을 갈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뭉치자, 아끼자, 돌보자”는 단훈의 기치 아래 모여 국가 목표에 도움과 초석이 되는 역군이 될 것을 주장하는 바입니다.
-근화여성봉사단(총재 박근혜) 기관지 <새마음> 창간호에 실린 ‘우리의 주장’
1989년 8월 15일
“역사 바로잡아 민족의 얼 되살려야”
병도 제대로 고치려면 근원을 치료해야 하듯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기강을 바로 세우는 데에는 법과 경찰만으로 될 리가 없습니다. 실제로 우리 사회의 법 또는 질서의 경시풍조는 위험수위에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우리 민족의 얼이 깨끗이 되살아나야 하고, 그렇게 되려면 무엇보다도 역사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바로 잡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국민이, 특히 자라나는 세대가 자기나라 역사에 대해 애정과 긍지를 갖게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그럴 만한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근화봉사단(회장 박근혜) 결속대회 격려사
1989년 9월 15일
“북한을 찬양하는 젊은 세대들”
박정희 대통령·육영수 여사 기념사업회가 중점적으로 힘써온 것은 바로 지나온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우리 사회 안에 바른 인식이 정립되어 뿌리내려지도록 함에 있었다. (중략) 오늘날 우리 사회 양상이 개판이 아니면 무엇이 개판이겠는가. 이러한 우리 사회의 현실은 그동안 우리 스스로가 만든 결과일 뿐이다. 병도 제대로 치료하려면 우선 그 원인을 바르게 알아야 한다. 그 근본 원인은 (박정희 시대에 대한) 역사의 왜곡에 있었다. 더구나 오랜 전통과 유교 문화를 바탕으로 한 우리 사회에 있어 앞서 말한 선후배의 깊은 유대는 사회 기강과 질서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다. 이 근간을 지난 10년간 온갖 힘을 다해 뒤흔들고 파괴해왔으니 어찌 오늘의 사회 질서가 뿌리째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결과 역사에 긍지를 가질 수 없고 선배에 대해 존경심을 가질 수 없게 된 젊은 세대들은 정신적 공허함 속에서 엉뚱하게 김일성 주체사상을 쫓아다니고, 북한을 찬양하는 데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역사에 대한 바른 인식을 정립하고 뿌리내리는 일은 기념사업회의 일이면서 동시에 이 사회를 다시 복되게 살리는 활력소이다.
-박정희·육영수기념사업회가 발간한 월간 <근화보> 3호 사설(박근혜 근화봉사단 회장이 직접 집필)
1989년 10월 22일
“아버지 하신 일에 대한 왜곡 바로잡아야”
유신이 무슨 커다란 범죄처럼 돼버렸어요. 유신 하면 마치 아버지의 장기 집권을 위한 음모라는 등 나쁘게만 묘사되었던 거지요. 그런 것을 역사 속으로 집어넣고 바로잡아야 할 때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아버지가 하신 일에 대한 왜곡과 잘못된 인식을 바로 하는 일을 할 수 없다면 저한테는 아무런 보람도 없고 의미도 없고 기쁨도 있을 수 없어요. 어느 한 시대 전부를 없애고, 모조리 잘못된 것으로 치부해버린다면 결국 이 땅에서 자라나는 세대들이 누려야 할 정신적 자산은 다 파괴되는 것 아니에요?
-<국민일보>와의 인터뷰
1990년 9월 25일
“1960~70년 역사 왜곡이 한국 사회에 나쁜 영향을 주고 있어”
지난 1960~70년대는 외국으로부터 한강의 기적이라든가, 새마을운동은 세계개발도상국의 모범이라는 말들로 칭찬하는 평가를 들어왔다. 하지만 (이 역사에 대한) 왜곡은 단순히 역사의 왜곡이라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날의 한국사회에 아직까지도 나쁜 영향을 주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도덕이 무너졌다, 폭력이 난무한다, 노소의 질서가 없어진 세상이 되었다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이런 것들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견고한 국민 정신의 기반을 필요로 하는데 그 바탕은 과거의 민족 역사에 대한 국민의 올바른 인식에 있다. 그렇지 않으면 나라의 기반이 흔들리는 것은 물론 그 위의 줄기와 잎도 모두 흔들리게 되며 결국 오늘날과 같은 사회를 만들게 된 큰 원인이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근화보> 15호(<코리아 투데이>와의 인터뷰 내용을 <근화보>에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