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한·일 외교장관 회담 개최를 포함해 구체 사항이 결정되는 대로 밝히게 될 것임.” 24일 오후 8시34분 외교부 대변인실에서 담당 기자들한테 보내온 문자메시지의 한 구절이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4일 오후 도쿄 총리관저에서 기시다 후미오 외무상한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등과 관련한 협상을 하러 연내에 한국에 가라고 지시했다고 <엔에이치케이>(NHK) 등 일본 언론이 일제히 보도한 지 3시간 가까이 지난 뒤다. 그 사이 장차관을 비롯해 외교부의 대일 외교를 맡은 간부들은 기자들의 전화를 일체 받지 않았다. ‘할 말이 없다’는 무언의 답변인 셈이다. 한-일 관계 핵심 현안과 관련한 중대 전환의 계기에 외교부의 대응이 옹색하다.
두 가지 이유가 있는 듯하다. 첫째는 아베 정부의 ‘의도적 반칙’이다. 아베 정부는 한국 정부의 사전 양해도 없이 확정되지 않은 외무상의 방한 일정(28일)을 언론에 흘렸다. 일종의 ‘비공식 발표’다. 외교부로선 그 의도를 가늠하고 대응 방안을 검토할 시간이 필요했을 수 있다. 하지만 외교부의 3시간 가까운 ‘지연 반응’에는 그보다 더 심각한 내부 소통 문제가 있었다. 언론 발표문을 만들어 청와대의 감수와 재가를 받는 데 그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건 기자의 어설픈 추정이 아니라 복수의 취재원한테 확인한 사실이다.
이런 옹색한 상황을 두고 외교부에서조차 불만의 목소리가 크다. 그러나 모든 것을 틀어쥔 청와대는 25일 오전에도 담당 기자들의 관련 문의에 “외교부에서 얘기할 것”이라며 입을 닫았다. 청와대 승인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게 하면서, 자기네는 무대 뒤로 숨는다. 시민의 알권리와 투명한 행정은 안중에 없다. 새삼스럽지는 않다. 외교부만의 일도 아니다. 통일부 등 다른 부처도 흔히 겪는 일이다. 청와대는 통제하되 책임은 지지 않고, 일선 부처는 청와대 눈치만 보는 행태는 박근혜 정부의 일상사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의 별명은 ‘오병세’다. 박근혜 대통령과 함께 5년 임기를 다 채우리라는 예상이 담긴 별명이다. 21일 개각에서도 살아남았으니 이미 ‘삼병세’를 지나 ‘사병세’가 된 셈이다. 장관, 할 만큼 했다. ‘박근혜바라기’로 ‘오병세’를 꿈꾸기보다, 이제라도 한국 외교정책 책임자의 당당함과 책임감을 보여주면 좋겠다. 보도자료 문구까지 일일이 챙기는 장관의 유임 소식에 먼 산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는 직원이 많았다는 사실을 가슴에 새기기를 바란다.
이제훈 기자 nomad@hani.co.kr
이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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