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17 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한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은 이튿날 ‘5·18 광주항쟁’이 터지자, 김대중을 그 배후로 몰아 ‘내란음모 사건’을 조작했다. 특히 김대중이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에게 자금을 지원한 것으로 꾸미기 위해 동교동 의전 비서 김옥두를 60일간 고문했다. 1980년 5월15일 전남대생들이 ‘비상계엄 해제’ 구호를 내걸고 거리시위에 나서려다 교문 앞에서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5월17일 밤부터 연행되기 시작한 ‘김대중 사건’ 관련자들은 한계상황을 넘나드는 극악한 고문을 당했다. 아무것도 없는 백지상태에서 내란죄를 꾸며내야 하니 신군부가 할 수 있는 것은 고문을 통해 허위자백을 받아내는 방법밖에 없었다. 인간성을 난자하는 악랄한 고문이 지하 취조실에서 끝없이 되풀이됐다. 연행자들 가운데 동교동 사람들, 김대중과 가까운 정치인들, 진보적 지식인들이 특히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전라도 출신들은 아예 짐승 취급을 당했다. 영혼을 도륙하는 듯한 고문이 연행자들을 죽음 언저리까지 밀고 갔다.
1980년 5월17일 밤부터 연행 시작
‘김대중 사건’ 관련자들 줄줄이
남산 중앙정보부 지하 3층 ‘지옥’
‘내란죄’ 꾸며내려 극악한 고문 동교동 의전비서 김옥두 “악마 체험”
하지만 그는 끝내 ‘혐의’를 부인했다
‘김대중이 광주사태 배후’ 거짓 강요에
전남대생 정동년 두차례나 동맥 끊어
남산에 끌려가 고문받던 이문영은 어느 날 신학자 서남동과 화장실에서 마주쳤다. 서남동은 이문영을 보고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문영은 이렇게 기록했다. “서남동이 취조받는 방이 바로 화장실 옆방이었는데 서남동이 나를 보고도 못 본 체할 뿐만 아니라 눈알이 죽은 사람 눈같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았다. 서남동을 공산주의자로 몰고 있는 것을 직감했다.” 후에 교도소에서 서남동을 면회한 부인 박순리는 너무나도 변해버린 남편의 모습에 놀라 접견실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서남동은 고문실에서 나오고 4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이문영은 이런 고백도 했다. “중앙정보부에 55일 갇혀 있는 동안 끔찍한 비명 소리와 함께 조사관들이 누구를 어떻게 때렸다는 무용담을 많이 들었다.” 고문기술자들은 누가 더 잔인한지 경쟁을 하는 듯했다.
고문에 초주검이 된 소설가 송기원은 시인 고은한테서 공작금을 받았다고 거짓으로 털어놔야 했다. “고은태(고은)한테서 얼마 받았냐?” 수사관의 물음에 송기원은 기억을 더듬어 5000원을 받았다고 말했다. “5000원? 이 자식이 지금 장난을 하자는 거야, 뭐야.” 5000원을 받은 건 사실이었다. 송기원은 자세한 사정을 뒷날 기록으로 남겼다. “고은 선생이 언젠가 한번 내 집에 들렀을 때, 무슨 마음이 들었던 것일까, 딸아이 가은이의 손에 5000원을 쥐여주는 것이었다.” 그 5000원이 문제였다. 살점이 뜯겨나가고 다리뼈가 부러지는 것 같은 고문이 몇날 며칠 계속되면서 5000원이 10만원으로, 15만원으로, 나중에는 50만원으로 늘어났다. 사람의 살과 혼을 짓이겨대는 고문은 어린아이에게 준 과자값을 공작금으로 둔갑시켰다. 다른 방에 있던 고은도 50만원을 주었다고 거짓자백을 토해낼 때까지 고문을 받았다. 고은은 더 견딜 수 없어 자살을 결심했다. 그날 새벽 꿈속에 어머니가 나타나 “죽지 마라”고 했다. 고은은 자살을 포기했다.
김홍일 담당 6명 “살아 나갈 수 없다”
‘김대중 빨갱이’ 강요에 자살 시도
다친 상태로 계속 고문…파킨슨병 고통 연행자 가족들 생사 모른채 발동동
두달 뒤 구속통지서 받고서야 면회
동교동에 막내 홍걸과 갇힌 이희호
“고립무원 집에서 오로지 기도밖에” 동교동에서 끌려간 사람들 중에서 가장 심한 고문을 당한 사람은 김옥두였다. 남산 중앙정보부 지하 3층의 방으로 끌려간 김옥두는 팬티까지 벗고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군복은 고문복이었다. 옷을 갈아입자마자 수사관 네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이 빨갱이 새끼! 왜 잡혀 온지 알지?” 수사관들은 ‘빨갱이’를 입에 달고 살았다. 김옥두는 등 뒤로 수갑이 채워진 채 네 사람에게 한 시간 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도록 맞았다. 유신쿠데타 직후에도 고문을 당했지만 이번 고문은 그때보다 훨씬 더 잔인했다. 김옥두는 사흘 동안 무작정 맞기만 했다. 이유도 설명도 없었다. 사람을 먼저 개처럼 만들어놓자는 계산임이 분명했다. 직사각형 모양의 고문실엔 야전침대와 캐비닛 하나와 책상 하나가 전부였다. 시계가 없으니 낮인지 밤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고문 사이사이 가져다주는 밥으로 시간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김옥두가 버티자 더 험악한 수사관들로 교체됐다. 수사관들은 김옥두의 몸을 짓이기며 김대중과 관련된 항목을 하나씩 들이밀었다. 수사관들이 실토하라고 제시한 항목은 열다섯 가지에 이르렀다. 1. 김대중은 빨갱이다. 2. 김대중의 지시로 이북에 몇 번 갔다 왔느냐. 3. 이북에 가서 김일성을 몇 번 만났느냐. 4. 김대중과 관련 있는 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명단을 대라. 5. 군부 내 김대중 인맥이 누구냐. 6. 김대중이 학생 선동 자금으로 누구에게 얼마를 주었느냐. 7. 경제인 중에서 김대중에게 돈 준 사람이 누구냐. 8. 김대중이 재야의 누구에게 운동자금을 얼마나 주었느냐…. 항목 하나하나를 신문할 때마다 고문이 빠지지 않았다. ‘김대중은 빨갱이다’라는 자백을 받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인 것 같았다. 김옥두는 윽박지르는 수사관에게 “왜 김대중 선생님이 빨갱이란 말이냐” 하고 대들었다. 그러자 수사관들은 빨갱이를 선생님이라고 부른다면서 더 혹독하게 매질을 했다. 김옥두는 “차라리 죽여라” 하고 소리 지르며 의자를 집어 들었다. 수사관들이 야전침대를 해체하더니 받침목을 빼내 패기 시작했다. 야전침대는 침대라는 이름의 고문도구였다. 받침목에 맞아 김옥두의 머리통이 터져 핏물이 솟구쳐 올랐다. “그래도 그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더러운 걸레 조각으로 내 머리를 대충 닦고는 의자에 앉혔다.” 수사관들은 김옥두의 두 팔을 뒤로 묶어 다시 수갑을 채웠다. “야, 빨갱이 새끼야. 너 오늘 죽여 버리겠어. 너 같은 놈 하나 죽여서 한강 지하 통로에 내버리면 쥐도 새도 모른다. 네 마누라도 지금 잡혀와 있다.” 수사관의 입에서 ‘마누라’라는 말이 나오자 김옥두는 놀랐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여기서 너희들한테 맞아죽어야겠다.” 김옥두는 죽어도 좋다는 심정으로 다시 소리를 질렀다. “김대중 선생님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오직 이 나라 민주화를 위해서 일해오신 분이다. 지금 전두환이가 정권 잡으려고 이러는 것 아니냐?” 수사관들은 군홧발로 김옥두의 정강이뼈를 내갈겼다. 그러고는 두 무릎을 꿇린 뒤 각목을 무릎 안에 끼워 넣고 허벅지를 군홧발로 짓밟았다. 뼈가 으스러지는 것 같은 고통을 못 이기고 김옥두는 비명을 질렀다. 원하는 답을 받아내지 못한 수사관들은 보안사 최고 고문기술자라고 하는 마산 출신의 ‘전 대위’를 불렀다. 전 대위라는 사람은 인간의 탈을 쓴 악마였다고 김옥두는 회고록에 썼다. 치욕과 고통을 줄 수 있는 온갖 폭력이 너덜너덜한 몸뚱이에 창날처럼 꽂혔다. 5월 말쯤 수사관들이 ‘동교동 방명록’을 가져오더니 김옥두 앞에 펼쳤다. 한 면에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이라는 글씨가 크게 쓰여 있었다. 수사관이 말했다. “야! 네가 정동년이를 김대중에게 소개해서 김대중이가 안방에서 정동년이에게 500만원 주는 것 봤지? 여기 와 있는 사람들한테 물어보니까 네가 총무 겸 의전 비서라서 너한테 물어보면 다 안다던데 사실대로 말해라! 이건 절대로 그냥 못 넘어간다!” 김옥두는 의전 비서로서 기본 수칙을 이야기했다. ‘첫째, 김대중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초면인 사람은 절대로 면담을 시키지 않는다. 둘째, 학생들은 일절 면담을 시키지 않는다. 셋째, 단독 면담을 시키지 않는다.’ 김옥두는 “이건 김대중 선생님의 지시사항이라 내가 어길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또다시 주먹과 각목이 날아왔다. 수사관들은 정동년의 조서를 가지고 와 김옥두에게 보여주었다. “여기 봐라. 김대중이한테 500만원 받았다고 쓰여 있잖아! 이래도 거짓말할 거야?” 김옥두가 완강하게 부인하자 수사관들은 정동년 문제 하나를 놓고 5일 동안 고문했다. 김옥두는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 보니 팔뚝에 링거 주사기가 꽂혀 있었다. 이마가 찢어져 일곱 바늘이나 꿰매져 있었고 왼쪽 고막이 터져 진물이 흘렀다. 팬티와 셔츠는 핏물에 젖어 걸레 조각 같았다. 수사관들이 보여준 조서는 정동년이 고문에 못 이겨 쓴 거짓 진술이었다. 허위자백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 정동년은 교도소로 송치된 뒤 플라스틱 숟가락을 갈아 동맥을 끊는 방식으로 두 번이나 자살을 기도했다. 김대중이 정동년에게 돈을 주어 ‘광주사태’를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각본을 짜 맞추려고 관련자들에게 그토록 끔찍한 고문을 한 것이었다. 정동년은 1980년 4월에 동교동을 방문해 방명록에 이름을 남겼다는 이유 하나로 터무니없는 죄를 뒤집어썼다. 김대중은 그날 밖에 있어서 정동년의 얼굴도 보지 못했다. 김옥두는 그 지옥의 한가운데서 60일을 버텼다. 볼펜 열다섯 자루가 닳았고 쌓아놓은 진술서의 높이는 15센티미터에 이르렀다. 수천 장의 진술서를 쓰는 동안 김옥두는 신군부가 김대중에게 씌운 혐의를 한 가지도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몸이 만신창이가 됐다. 김옥두는 고문의 상처 때문에 세수를 할 수도 없었고 이를 닦을 수도 없었다. 관절이 상해 걸음을 옮기기도 어려웠다.
김대중의 큰아들 김홍일이 당한 고문도 끔찍하기 이를 데 없었다. 김홍일은 5월17일 밤 신반포아파트의 집에서 아내와 딸들을 두고 연행됐다. 김홍일을 태운 차는 한강 다리를 지나 남산에서 멈추었다. 김홍일은 방음장치가 된 지하실로 끌려 들어갔다. 수사관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계급장 없는 군복을 입고 있었고, 마치 수인사를 나누듯 나에게 다가와 두말없이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군용 야전침대에서 빼낸 몽둥이로 사정없이 후려쳤다. 나의 비명은 두툼한 스펀지에 물이 빨려들듯 방음벽으로 빨려들어 갔다.” 스물네 시간 동안 김홍일은 맞기만 했다. 정신을 잃었다.
김홍일을 담당한 수사관은 여섯 명이었다. “네가 김대중이 아들이냐? 너는 절대로 여기서 살아나가지 못해. 어차피 송장으로 나갈 테니까 피차 힘들게 하지 말고 우리가 묻는 말에 대답해.” 수사관들은 먼저 5월15일 서울역 집회 배후조종자임을 인정하라고 김홍일을 닦달했다. “이 빨갱이 새끼야, 우리가 다 알아냈어!” 수사관들은 김홍일이 관여하던 연청(민주연합청년동지회) 사무실에서 찾아낸 메모지를 ‘난수표’라고 주장하며 시인하라고 각목을 휘둘렀다. 김홍일이 “모른다”고 하자 군홧발로 온몸을 짓밟았다. 김홍일을 혼절을 거듭하며 외마디 소리를 내뱉었다. “그냥 죽여주시오.” 김홍일이 죽여 달라고 소리치자 수사관들은 군홧발로 상처 난 부위를 정확하게 짓누르며 말했다. “죽여 달라고? 이 새끼야, 여기서는 죽는 것이 가장 호강하는 것이야. 너 좋으라고 죽여줘?” 고문기술자들은 김홍일의 몸을 거꾸로 매달아놓고 팼다. 짜놓은 각본대로 말이 나올 때까지 때렸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으면 다시 군홧발이 날아들었다.
김홍일을 가장 비참하게 만든 것은 김대중이 빨갱이임을 시인하라는 것이었다. 수사관들은 김대중이 밤마다 이북 방송을 듣는다고 자술서에 쓰라고 했다. 견딜 수 없는 고문이 계속됐다. 이대로 가다간 아버지를 공산주의자로 모는 신군부의 올가미에 걸려들고 말 것 같은 공포감이 밀려왔다. 김홍일은 취조실에 들어온 지 열흘쯤 지난 뒤 죽기로 마음을 먹었다. 죽어야 이 지옥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수사관들이 잠시 방을 비운 사이 김홍일은 책상 위로 올라가 고개를 아래로 박고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딱딱한 타일이 깔린 시멘트 바닥에 머리통이 부딪혔다. 죽어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다. 몸통의 중량으로 목이 꺾였다. 머리를 들 수 없었다. 돌아온 수사관들은 너부러진 김홍일을 보자마자 온몸을 짓밟았다. 김홍일은 그때 목과 허리를 상했다. 그 후로 목을 제대로 가누기 어렵게 됐고,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파킨슨병으로 악화했다. 나중에는 걷는 것도 어려워졌다. 파킨슨병은 고문이 만들어낸 병이었다. 김홍일은 목을 다친 상태에서 그 후로 50일을 더 조사받았다. 조사받을 때마다 고문이 뒤따랐다.
남산의 지하실에 끌려간 사람들은 대다수가 살아 있는 주검이 됐다. 인간성이 말라버린 듯한 고문기술자들은 사람을 정육점의 고기처럼 매달았다. 잡혀간 사람들이 영혼과 육체를 난도질당하는 동안 연행자의 가족들은 고립과 공포 속에서 발만 굴렀다. 하소연할 곳도 소리칠 곳도 없었다. 목사 이해동의 부인 이종옥은 남편이 잡혀가던 때의 일을 이렇게 기록했다. “그날 밤의 살벌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밤 11시경 네 사람이 집에 들이닥쳐 권총을 빼들었다. 만약 불응하면 목이라도 빼가야 한다는 위협 속에서 나는 남편을 납치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거의 60일이 지나도록 우리들은 (잡혀간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세상은 온통 동토였고 암흑천지였다. 박용길 장로(문익환 목사 부인), 김석중 사모(이문영 박사 부인)와 함께 속옷을 싸들고 군부대들을 찾아 한여름 더위 속을 발이 부르트도록 헤매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헛수고였다. 가족들은 두 달이 지나서야 구속통지서가 집으로 배달돼 끌려간 사람들이 육군교도소와 서울구치소로 나뉘어 수감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첫날 면회를 하고 나서 모두가 하나같이 아연실색했다. 사람의 몰골이 어떻게 저런 꼴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얼마나 고문을 당했으면 저토록 피골이 상접할 수 있단 말인가.”
남편과 아들, 시동생과 비서들이 남산의 지옥에 있던 그 시절 내내 이희호는 동교동 집에 갇혀 꼼짝도 하지 못했다. “홍일이와 비서들이 무서운 일을 당했을 거라고 짐작만 했지 실제로 얼마나 당했는지 알 수 없었지요. 집에서 일을 도와주는 아주머니와 기도하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요.” 자고 일어나면 머리숱이 한 움큼씩 빠졌다. 그 공포의 두 달 동안 이희호는 최소한의 먹고 자는 시간을 빼놓고 모든 시간을 기도와 찬송에 바쳤다. <구약성서>의 ‘이사야서’를 수백 번 읽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니, 떨지 말라. 내가 너를 도와주고, 내 승리의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 주겠다.” 어둠이 압착기처럼 짓누르는 고립무원의 집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밖에 없었다.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김대중 사건’ 관련자들 줄줄이
남산 중앙정보부 지하 3층 ‘지옥’
‘내란죄’ 꾸며내려 극악한 고문 동교동 의전비서 김옥두 “악마 체험”
하지만 그는 끝내 ‘혐의’를 부인했다
‘김대중이 광주사태 배후’ 거짓 강요에
전남대생 정동년 두차례나 동맥 끊어
1980년 5월17일 밤 김대중과 큰아들 홍일, 비서들이 줄줄이 연행된 이후 이희호는 생사조차 모른 채 동교동 집에 갇혀 오로지 기도만으로 버텨야 했다. 사진은 그해 9월에야 중앙정보부에서 서대문구치소로 이감된 홍일을 면회 가는 모습으로, 늘 감시 기관원들이 동행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김대중 빨갱이’ 강요에 자살 시도
다친 상태로 계속 고문…파킨슨병 고통 연행자 가족들 생사 모른채 발동동
두달 뒤 구속통지서 받고서야 면회
동교동에 막내 홍걸과 갇힌 이희호
“고립무원 집에서 오로지 기도밖에” 동교동에서 끌려간 사람들 중에서 가장 심한 고문을 당한 사람은 김옥두였다. 남산 중앙정보부 지하 3층의 방으로 끌려간 김옥두는 팬티까지 벗고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군복은 고문복이었다. 옷을 갈아입자마자 수사관 네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이 빨갱이 새끼! 왜 잡혀 온지 알지?” 수사관들은 ‘빨갱이’를 입에 달고 살았다. 김옥두는 등 뒤로 수갑이 채워진 채 네 사람에게 한 시간 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도록 맞았다. 유신쿠데타 직후에도 고문을 당했지만 이번 고문은 그때보다 훨씬 더 잔인했다. 김옥두는 사흘 동안 무작정 맞기만 했다. 이유도 설명도 없었다. 사람을 먼저 개처럼 만들어놓자는 계산임이 분명했다. 직사각형 모양의 고문실엔 야전침대와 캐비닛 하나와 책상 하나가 전부였다. 시계가 없으니 낮인지 밤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고문 사이사이 가져다주는 밥으로 시간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김옥두가 버티자 더 험악한 수사관들로 교체됐다. 수사관들은 김옥두의 몸을 짓이기며 김대중과 관련된 항목을 하나씩 들이밀었다. 수사관들이 실토하라고 제시한 항목은 열다섯 가지에 이르렀다. 1. 김대중은 빨갱이다. 2. 김대중의 지시로 이북에 몇 번 갔다 왔느냐. 3. 이북에 가서 김일성을 몇 번 만났느냐. 4. 김대중과 관련 있는 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명단을 대라. 5. 군부 내 김대중 인맥이 누구냐. 6. 김대중이 학생 선동 자금으로 누구에게 얼마를 주었느냐. 7. 경제인 중에서 김대중에게 돈 준 사람이 누구냐. 8. 김대중이 재야의 누구에게 운동자금을 얼마나 주었느냐…. 항목 하나하나를 신문할 때마다 고문이 빠지지 않았다. ‘김대중은 빨갱이다’라는 자백을 받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인 것 같았다. 김옥두는 윽박지르는 수사관에게 “왜 김대중 선생님이 빨갱이란 말이냐” 하고 대들었다. 그러자 수사관들은 빨갱이를 선생님이라고 부른다면서 더 혹독하게 매질을 했다. 김옥두는 “차라리 죽여라” 하고 소리 지르며 의자를 집어 들었다. 수사관들이 야전침대를 해체하더니 받침목을 빼내 패기 시작했다. 야전침대는 침대라는 이름의 고문도구였다. 받침목에 맞아 김옥두의 머리통이 터져 핏물이 솟구쳐 올랐다. “그래도 그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더러운 걸레 조각으로 내 머리를 대충 닦고는 의자에 앉혔다.” 수사관들은 김옥두의 두 팔을 뒤로 묶어 다시 수갑을 채웠다. “야, 빨갱이 새끼야. 너 오늘 죽여 버리겠어. 너 같은 놈 하나 죽여서 한강 지하 통로에 내버리면 쥐도 새도 모른다. 네 마누라도 지금 잡혀와 있다.” 수사관의 입에서 ‘마누라’라는 말이 나오자 김옥두는 놀랐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여기서 너희들한테 맞아죽어야겠다.” 김옥두는 죽어도 좋다는 심정으로 다시 소리를 질렀다. “김대중 선생님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오직 이 나라 민주화를 위해서 일해오신 분이다. 지금 전두환이가 정권 잡으려고 이러는 것 아니냐?” 수사관들은 군홧발로 김옥두의 정강이뼈를 내갈겼다. 그러고는 두 무릎을 꿇린 뒤 각목을 무릎 안에 끼워 넣고 허벅지를 군홧발로 짓밟았다. 뼈가 으스러지는 것 같은 고통을 못 이기고 김옥두는 비명을 질렀다. 원하는 답을 받아내지 못한 수사관들은 보안사 최고 고문기술자라고 하는 마산 출신의 ‘전 대위’를 불렀다. 전 대위라는 사람은 인간의 탈을 쓴 악마였다고 김옥두는 회고록에 썼다. 치욕과 고통을 줄 수 있는 온갖 폭력이 너덜너덜한 몸뚱이에 창날처럼 꽂혔다. 5월 말쯤 수사관들이 ‘동교동 방명록’을 가져오더니 김옥두 앞에 펼쳤다. 한 면에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이라는 글씨가 크게 쓰여 있었다. 수사관이 말했다. “야! 네가 정동년이를 김대중에게 소개해서 김대중이가 안방에서 정동년이에게 500만원 주는 것 봤지? 여기 와 있는 사람들한테 물어보니까 네가 총무 겸 의전 비서라서 너한테 물어보면 다 안다던데 사실대로 말해라! 이건 절대로 그냥 못 넘어간다!” 김옥두는 의전 비서로서 기본 수칙을 이야기했다. ‘첫째, 김대중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초면인 사람은 절대로 면담을 시키지 않는다. 둘째, 학생들은 일절 면담을 시키지 않는다. 셋째, 단독 면담을 시키지 않는다.’ 김옥두는 “이건 김대중 선생님의 지시사항이라 내가 어길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또다시 주먹과 각목이 날아왔다. 수사관들은 정동년의 조서를 가지고 와 김옥두에게 보여주었다. “여기 봐라. 김대중이한테 500만원 받았다고 쓰여 있잖아! 이래도 거짓말할 거야?” 김옥두가 완강하게 부인하자 수사관들은 정동년 문제 하나를 놓고 5일 동안 고문했다. 김옥두는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 보니 팔뚝에 링거 주사기가 꽂혀 있었다. 이마가 찢어져 일곱 바늘이나 꿰매져 있었고 왼쪽 고막이 터져 진물이 흘렀다. 팬티와 셔츠는 핏물에 젖어 걸레 조각 같았다. 수사관들이 보여준 조서는 정동년이 고문에 못 이겨 쓴 거짓 진술이었다. 허위자백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 정동년은 교도소로 송치된 뒤 플라스틱 숟가락을 갈아 동맥을 끊는 방식으로 두 번이나 자살을 기도했다. 김대중이 정동년에게 돈을 주어 ‘광주사태’를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각본을 짜 맞추려고 관련자들에게 그토록 끔찍한 고문을 한 것이었다. 정동년은 1980년 4월에 동교동을 방문해 방명록에 이름을 남겼다는 이유 하나로 터무니없는 죄를 뒤집어썼다. 김대중은 그날 밖에 있어서 정동년의 얼굴도 보지 못했다. 김옥두는 그 지옥의 한가운데서 60일을 버텼다. 볼펜 열다섯 자루가 닳았고 쌓아놓은 진술서의 높이는 15센티미터에 이르렀다. 수천 장의 진술서를 쓰는 동안 김옥두는 신군부가 김대중에게 씌운 혐의를 한 가지도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몸이 만신창이가 됐다. 김옥두는 고문의 상처 때문에 세수를 할 수도 없었고 이를 닦을 수도 없었다. 관절이 상해 걸음을 옮기기도 어려웠다.
1980년 ‘5·17 쿠데타’로 김대중과 두 아들 홍일·홍업까지 연행당하면서 이희호는 또다시 죽음보다 더한 고난에 놓였다. 사진은 그해 2월 말 사면·복권 뒤 김대중의 프로필 촬영을 위해 동행한 사진관에서 함께 한 삼부자의 모습이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80년 5월17일 밤 자택에서 연행된 김홍일은 남산중앙정보부 지하에 끌려가 고문을 견디다 못해 자살시도까지 했다가 평생토록 후유증을 겪어야 했다. 사진은 그해 9월 수감된 서대문구치소에서 김홍일이 직접 링거줄과 칫솔을 갈아 만든 십자가.
사진 김홍일 자서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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