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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항쟁 내내 광주 시민들은 “김대중 석방하라” 외쳤다

등록 2016-01-10 20:26수정 2017-01-09 10:46

1980년 5월21일 마침내 광주 시민들은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에 맞서 무장을 시작했고 이날 저녁 시민군은 계엄군이 물러난 전남도청에 진입했다. 그로부터 5월26일까지 광주는 철저한 고립 속에도 시민수습위원회를 중심으로 질서를 유지하며 자치공동체를 이뤘다. 시 외곽으로 후퇴한 계엄군과 대치하다가 희생되거나 다친 환자들을 실어나르는 시민군 차량이 도청으로 들어오고 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80년 5월21일 마침내 광주 시민들은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에 맞서 무장을 시작했고 이날 저녁 시민군은 계엄군이 물러난 전남도청에 진입했다. 그로부터 5월26일까지 광주는 철저한 고립 속에도 시민수습위원회를 중심으로 질서를 유지하며 자치공동체를 이뤘다. 시 외곽으로 후퇴한 계엄군과 대치하다가 희생되거나 다친 환자들을 실어나르는 시민군 차량이 도청으로 들어오고 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길을 찾아서] ‘고난의 길, 신념의 길’ 이희호 평전
제4부 제5공화국-5회 광주학살 (하)

이희호 평전 이전 글 보기
광주의 참상에 대한 보도를 막던 신군부는 1980년 5월21일 계엄사 발표를 내보냈다. 이 발표문에는 ‘광주 지역에 유포된 유언비어의 유형’도 들어 있었다. 대다수 신문이 발표 내용을 1면에 그대로 보도했다. 계엄사가 ‘유언비어’라고 내놓은 말들은 참혹했다.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에 와서 여자고 남자고 닥치는 대로 밟아 죽이기 때문에 사상자가 많이 난다. 18일에는 40명이 죽었고 시내 금남로는 피바다가 되었으며 군인들이 여학생의 브래지어까지 찢어버린다. 공수부대가 대검으로 아들딸들을 난자해버리고 브래지어와 팬티만 입게 한 후 장난질을 한다. 공수부대가 몽둥이로 데모 군중의 머리를 무차별 구타해 눈알이 빠지고 머리가 깨졌다. 학생들 50여명이 맞아 피를 흘리고 끌려 다니고 있다. 계엄군이 출동하여 장갑차로 사람을 깔아 죽였다. (…)”

1980년 5월21일 계엄사 발표문
실제 만행을 ‘유언비어’로 왜곡
30만 시위에 공수부대 철수 약속
오후들어 헬기 사격·집단 발포
시민들 인근 파출소 무기로 ‘무장’
저녁 시민군 도청 진입에 ‘함성’
22일 시민수습위 구성 ‘해방 자치’

외곽 후퇴한 공수부대 ‘학살’ 계속
끌려간 시민들 고문·학대도 ‘잔인’

25일 항쟁지도부 결성 ‘결사항전’
27일 재진입 계엄군 투항자도 사살

“광주의 피와 한으로 이룬 민주주의”

대부분이 광주 시내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이었다. 신군부는 ‘유언비어 유형’을 미리 유포함으로써 공수부대의 만행을 고발하는 말들의 힘을 빼앗고 진실이 퍼져나가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22일 계엄사는 김대중이 민중봉기로 국가전복을 기도했다는 ‘김대중 중간수사 결과’를 내놓았다. 언론은 이 내용을 일제히 보도했다. 광주 시민들은 항쟁 기간 내내 “김대중을 석방하라”고 외쳤다.

시민들은 22일부터 날마다 도청 앞 분수광장에 모여 항쟁 결의를 다지고 수습 대책을 토론했다. ‘김대중 석방’ ‘전두환 처단’ 등의 구호를 내건 팻말이 보인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시민들은 22일부터 날마다 도청 앞 분수광장에 모여 항쟁 결의를 다지고 수습 대책을 토론했다. ‘김대중 석방’ ‘전두환 처단’ 등의 구호를 내건 팻말이 보인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21일 오전 10시 30만명에 이르는 시민들이 광주 중심가로 운집했다. 전날 밤 최전방 20사단 병력이 서울을 출발해 21일 광주 지역의 공수부대와 합류했다. 광주는 2만명의 병력에 둘러싸였다. 사람들은 하나로 뭉쳐 싸우지 않으면 이 무서운 고립 속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고 느꼈다. 30만 시민은 공수부대 철수를 요구하며 금남로를 채우고 도청을 에워쌌다. 한 도시의 시민 전체가 일어나 완전 무장한 군대와 맨몸으로 맞선 것은 현대사에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시위대는 아침부터 버스와 트럭을 이용해 시민들을 금남로로 실어 날랐다. 여자들은 동마다 통반 조직을 가동해 쌀을 거두고 김밥과 주먹밥을 만들었다. 전 시민이 시위대를 성원하고 시위대와 일체가 됐다. 당시 시위에 참여해 차를 타고 시내를 돌았던 이세영은 이렇게 증언했다. “가는 곳마다 아주머니들이 힘내서 싸우라며 김밥과 주먹밥을 차에 올려주었다. 이 가게, 저 가게에서 음료수와 빵을 던져주었다. 물수건으로 최루탄 가스에 뒤덮인 얼굴을 닦아주기도 했다. 시민들의 격려와 보살핌은 어느새 나의 두 눈에 눈물이 고이게 했다. 아무리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해도 그러면 그럴수록 가슴은 뜨거워졌고 눈시울은 젖어 마침내 눈물은 볼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죽음마저도 각오했다. (…) 이것이 바로 운명공동체인지도 모른다.”

시민들이 수십만명으로 불어나자 계엄사는 정오까지 공수부대를 시 외곽으로 철수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는 중에도 광주 일원의 상공에선 헬리콥터가 땅을 향해 기총사격을 했다. 도청의 공수부대는 시민들 몰래 실탄을 분배받았다. 12시가 넘어도 계엄군은 철수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시민들은 술렁거리며 차량을 앞세워 도청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오후 1시 공수부대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집단발포였다. 앞쪽의 시민들이 총에 맞아 무더기로 쓰러졌다. 금남로는 순식간에 아비규환, 피의 바다로 변했다. 공수부대 집단발포로 적어도 54명이 죽고 500여명이 총상을 입었다. 비무장 시민에 대한 학살이었다. 박남선은 이렇게 증언했다. “공수부대는 아직 죽지 않고 아스팔트 바닥 위에서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시민들을 구하려고 뛰어나가는 시민들조차 사살해버렸다.” 공수부대는 도청과 주변의 건물에 숨어 보이는 사람들마다 쏘아 죽였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시민들은 울부짖었다.

1시30분께 한 청년이 장갑차 위에서 웃통을 벗고 태극기를 높이 휘날리며 도청을 향해 돌진했다. 청년은 “광주 만세!”를 외쳤다. 공수부대의 총격과 동시에 청년의 몸이 고꾸라졌다. 전율이 시민들의 가슴을 후벼 파고 지나갔다. 사태는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이르렀다. 나라의 군대가 시민을 학살하니 목숨을 지키려면 무장하는 수밖에 없었다. 시위대는 무기고로 차를 몰아 가장 가까운 나주 지역 파출소에서 총과 실탄을 가져왔다. 다른 지역에서도 무기를 거두었다. 오후 3시께 시민들은 광주공원에서 총과 실탄을 분배했다. 시민군이 등장했다. 후에 계엄사는 시민군에게 들어간 총이 5400정이었다고 발표했다. 시민들이 반격하자 공수부대는 서둘러 철수했다. 21일 저녁 시민군은 도청에 진입했다. 함성과 통곡이 뒤엉켰다. 5월25일 시민군은 ‘왜 우리는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라는 제목의 유인물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답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너무나 무자비한 만행을 더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너도나도 총을 들고 나섰던 것입니다.”

무장한 시민들은 계엄군을 광주에서 몰아냈지만, 광주의 해방은 외부와 단절된, 아무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고립무원의 해방이었다. 시 외곽으로 통하는 길은 모두 봉쇄됐고 전화마저 두절돼 밖으로 소식을 알릴 수도 없었다. 당시 광주에 거주하던 인류학자 리나 루이스는 그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여기 사람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다른 곳에서는 모른다는 것이다. 서울의 풀브라이트 담당관인 마크 피터슨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 정말 무서운 일이다. (다른 지역) 사람들은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5월27일 새벽 계엄군은 광주 시내에 재진입해 대대적인 도청 진압작전을 감행했고 윤상원을 비롯한 항쟁지도부는 죽음으로 맞섰다. 도청을 재장악한 계엄군이 유혈이 낭자했던 도심 곳곳을 소독하고 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5월27일 새벽 계엄군은 광주 시내에 재진입해 대대적인 도청 진압작전을 감행했고 윤상원을 비롯한 항쟁지도부는 죽음으로 맞섰다. 도청을 재장악한 계엄군이 유혈이 낭자했던 도심 곳곳을 소독하고 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광주시 외곽으로 후퇴한 뒤에도 공수부대의 학살은 멈추지 않았다. 도청 앞뜰로 주인 없는 주검들이 끝없이 실려 왔다. 관이 부족했다. 시민군들은 외부에서 관을 가져오려고 소형버스를 타고 화순 방면으로 나갔다. 그 소형버스에는 시민군 5명, 여고생 2명, 여공 2명을 비롯해 모두 11명이 타고 있었다. 버스가 지원동을 지날 무렵 공수부대가 버스에 총탄을 퍼부었다. 조선대에서 철수해 그곳 야산에 주둔해 있던 부대였다. 현장에서 8명이 즉사하고 남자 2명이 중상, 여고생 1명이 경상을 입었다. 공수부대 장교는 리어카에 실려 온 중상자를 보고 “귀찮게 왜 데려왔느냐? 사살하라”고 명령했다. 두 명이 그 자리에서 살해당했다.

공수부대의 학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24일 지원동 주남마을을 출발하여 야산을 타고 철수하던 공수부대는 진월동 저수지에서 멱을 감던 아이들에게 총탄을 퍼부었다. 놀란 아이들이 둑 너머로 달아나다가 그중 한 명이 머리에 총을 맞고 즉사했다. 공수부대는 또 진월동 동산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에게도 이유 없이 총질을 했다. 도망가던 중 고무신이 벗겨지자 그걸 집으려던 효덕초등학교 4학년 전재수가 공수부대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죽었다. 전재수의 몸에는 열 발도 넘는 총알이 박혔다. 공수부대는 송암동에서는 마을 주민들을 불러내 청년 세 명을 철로변으로 끌고 가 죽였다. 동네 하수구에 숨은 주부 박연옥을 발견하고는 빨리 나오지 않는다고 엠16 소총을 갈겼다. 박연옥은 총알을 여섯 발이나 맞고 죽었다.

공수부대의 총칼에서 살아남았다 해도 그것으로 죽음의 위기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잡혀간 사람들이 당한 고문과 학대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끔찍한 것이었다. 공수부대 장교들은 잡혀 온 사람들에게 “전라도 새끼 40만은 전부 없애버려도 끄떡없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김대중의 지령을 받았다고 자백하라고 사람들을 고문하면서 “김대중이가 네 애비냐?” “김대중이가 밥 먹여주냐?” “김대중이가 빨갱이인 줄 몰랐냐?” 따위의 말들을 수도 없이 퍼부었다. 공수부대는 정권 탈취에 눈이 먼 신군부의 하수인이었다.

공수부대원 중에는 월남전에 참가했던 하사관들이 적지 않았다. 5월20일 전남대 강의실로 끌려간 강길조는 거기서 목격한 것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공수대원들은 상당수가 월남전 얘기를 입에 올리기를 잘했는데 그중 한 명은 대검을 빼어들고 ‘이 대검은 월남에서 베트콩 여자 유방 40개 이상 자른 기념 칼이다’라고 자랑하며 그 대검으로 앞사람의 더벅머리를 탁 쳤다. 머리카락이 잘려 나가면서 스포츠머리처럼 되었다.” 공수부대가 보인 잔인함은 인간성을 의심케 하는 것들이었다. 공수대원들은 잡혀 온 사람들을 장난감 대하듯 짓이겨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눈동자를 움직이면 담뱃불로 얼굴이나 눈알을 지지는 ‘재떨이 만들기’, 발가락을 대검 날로 찍는 ‘닭발요리’가 공수대원들의 놀이였다. 잡혀 온 시민들을 트럭에 꽉 채워 넣은 뒤 차 안에 최루탄 분말을 뿌리고는, 사경을 헤매는 모습을 보며 시시덕거리기도 했다.

22일 도청에서 종교지도자들이 포함된 시민수습위원회가 꾸려졌다. 수습위원들은 계엄군과 협상을 벌였으나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했다. 특전사 지휘관들은 ‘폭도’를 소탕해야 한다고 큰소리쳤다. 시민들은 22일 오후 모든 병원 영안실에 안치된 시신들을 도청 앞으로 옮겼다. 가족을 찾는 사람들이 으깨어진 시신을 뒤지고 또 뒤졌다. 자식이나 남편의 주검을 확인한 여자들은 그 자리에 엎어져 오열했다. 이날 신군부 우두머리 전두환은 특전사 11여단장 최웅에게 ‘금일봉’ 100만원을 하사했다. 공수부대의 기세를 북돋우려는 것이었다.

도청에서는 수습파에 맞서 항쟁파가 형성되었다. 수습파는 더 큰 희생을 막으려면 총기를 회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계엄군은 정해진 시간까지 무기를 반납하지 않으면 탱크·장갑차·헬리콥터를 총동원해 진압하겠다고 위협하고 있었다. 윤상원·박남선·김종배를 포함한 항쟁파는 광주시민들이 폭도라는 누명을 벗고 명예를 회복하려면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맞섰다. 시민을 학살한 살인마들에게 무조건 투항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23일부터 도청 앞에서 열린 ‘민주수호를 위한 시민궐기대회’에서도 이 두 기류는 맞부딪쳤다. ‘더 큰 희생을 막느냐, 끝까지 싸우느냐.’ 어느 의견도 틀렸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러는 중에 22일부터 총기 회수가 시작돼 24일쯤에는 총 4000여정과 수류탄 1000여개를 거두었다. 무장한 시민군은 500여명으로 줄어들었다.

25일 저녁 도청에서 윤상원과 대학생 100여명이 중심이 된 민주시민투쟁위원회(항쟁지도부)가 결성됐다. 목숨을 걸고 학살자들과 싸우겠다는 결사대였다. 26일 시민수습위원회 일동은 대변인인 신부 김성용을 통해 ‘추기경께 드리는 호소문’을 전달했다. “저희는 계엄군에 의해서 짐승처럼 치욕과 학살을 당하고도 폭도요 난동분자요 불순분자로 지목되었습니다. 저희 80만 광주시민의 피맺힌 한과 응어리진 아픔을 함께해 주십시오.” 26일 광주 대주교 윤공희는 대통령 최규하에게 편지를 보냈다. “군인들의 만행에 대한 명령 책임자를 엄중히 처단할 것을 약속하셔야 우선 급박한 현사태의 수습이 가능할 것입니다.” 대답은 없었다.

계엄당국은 27일 0시 이후 도청을 공격해 진압한다는 작전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다. 26일 저녁 항쟁 지도부는 “최후까지 남을 사람만 남고 나머지는 집으로 돌아가라”고 알렸다. 시민군 500여명이 도청에 남았다. 윤상원은 이날 밤 이렇게 말했다. “그냥 도청을 비워주게 되면 우리의 투쟁은 헛수고가 되고 수없이 죽어간 영령들과 역사 앞에 죄인이 됩니다. 끝까지 싸우다 죽는 것이 우리가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 고등학생들이 남겠다고 했으나 윤상원은 “우리들이 싸울 테니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들은 역사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고 설득해 내보냈다.

27일 새벽 4시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이 도청을 향해 일제사격을 했다. 도청의 시민군들이 금남로의 계엄군을 향해 응사하는 동안 3공수여단 특공대가 도청 뒷담을 넘어 건물로 뛰어들었다. 공수부대는 총을 난사하고 방마다 수류탄을 던졌다. 시민군들은 눈앞에 나타난 군인들을 보고 차마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특공대의 총과 수류탄에 죽어갔다. 시민군 8명이 항복하겠다고 두 손을 올리고 도청 앞뜰로 나왔지만 특공대는 투항자들을 모두 쏘아 죽였다. 한 특공대 병사는 한쪽 발로 시민군 포로를 군홧발로 밟은 채 사살하면서 “어때, 영화 구경 하는 것 같지” 하는 농담까지 던졌다. 살아남은 시민군은 굴비처럼 엮인 채 버스 넉 대에 실려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갔다. 이날 진압작전에서 수백명의 시민군이 목숨을 잃었다. 시민군을 이끈 윤상원은 가슴에 총을 맞고 화염방사기로 까맣게 탄 주검으로 발견됐다. 도청을 점령한 계엄군은 학살의 흔적을 지우려는 듯 광주 시내를 소독했다. 짓밟힌 광주는 원한에 잠겼다.

언론학자 강준만은 5·18이 남긴 광주의 한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호남인들은 오직 말없이 김대중 지지를 통해 그 한을 풀고자 하였지만, 광주학살에 눈물 한 방울 흘린 적 없는 일부 한국인들은 그들의 그런 평화적인 선택에조차 경멸을 보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한국 현대사 산책>) 정치학자 최정운은 “5·18은 우리 현대사의 최대 사건이자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사건이었다”며 “우리 시대의 민주주의는 광주의 피를 대가로 하여 이루어졌다”고 썼다.(<5월의 사회과학>)

계엄군이 철수한 5월31일 밤과 6월1일 새벽 사이에 금남로를 비롯한 시내 곳곳의 전신주에는 ‘살인마 전두환’이라고 쓴 붉은색 글씨가 나붙었다. 6월2일 <전남매일신문>은 5·18 관련 시리즈 ‘무등산은 알고 있다’를 내보냈고, 같은 날 시인 김준태의 시 <아아, 광주여! 우리 민족의 십자가여!>를 실었다. <전남매일신문>은 폐간당했다.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맨 위 사진) 시민들은 22일부터 날마다 도청 앞 분수광장에 모여 항쟁 결의를 다지고 수습 대책을 토론했다. ‘김대중 석방’ ‘전두환 처단’ 등의 구호를 내건 팻말이 보인다.(가운데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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