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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남편이 이학봉의 회유에 굴복했다면 용서할 수 없었을 것”

등록 2016-01-17 20:16수정 2017-01-09 10:46

1980년 7월4일 전두환 신군부는 계엄사령부 명의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을 발표했다. ‘5·17 쿠데타’와 동시에 연행된 김대중을 비롯한 24명의 민주인사를 ‘5·18 광주항쟁’의 배후 세력으로 조작한 사건이었지만 언론은 일방적으로 중계했다. 전두환은 ‘광주 학살’ 와중에 국가보위비상대책위를 설치하고 상임위원장을 맡아 ‘그림자 정부의 실권’을 장악했다. 80년 5월31일 국보위 현판식과 상임위 첫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전두환(맨 오른쪽)과 노태우(맨 왼쪽) 수도경비사령관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1980년 7월4일 전두환 신군부는 계엄사령부 명의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을 발표했다. ‘5·17 쿠데타’와 동시에 연행된 김대중을 비롯한 24명의 민주인사를 ‘5·18 광주항쟁’의 배후 세력으로 조작한 사건이었지만 언론은 일방적으로 중계했다. 전두환은 ‘광주 학살’ 와중에 국가보위비상대책위를 설치하고 상임위원장을 맡아 ‘그림자 정부의 실권’을 장악했다. 80년 5월31일 국보위 현판식과 상임위 첫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전두환(맨 오른쪽)과 노태우(맨 왼쪽) 수도경비사령관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길을 찾아서] ‘고난의 길, 신념의 길’ 이희호 평전
제4부 제5공화국-6회 내란음모 재판 상

이희호 평전 이전 글 보기
광주에서 동족살육의 광란을 벌인 전두환 신군부는 광주 진압이 “유례없는 성공적인 작전이었다”고 평가하고 특전사령관 정호용을 포함해 66명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1980년 5월31일 계엄사령부는 “광주사태로 민간인 144명, 군인 22명, 경찰 4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광주시민 가운데 이 발표 내용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 계엄군은 죽은 사람들을 보이는 대로 트럭에 싣고 가 아무도 알 수 없는 곳에 파묻었다. 사망자 수를 정확히 확인할 길이 없었다. 당시 광주에 있었던 목사 아널드 피터슨은 여러 자료를 종합해 광주항쟁에서 사망한 시민의 수를 800여명으로 추정했다.

80년 6월28일 수사단장 이학봉
“협조하면 대통령만 빼고 어떤 자리도”
신문 보고 ‘광주학살’ 알게된 김대중은
충격으로 의식을 잃었다

동교동 고립된 이희호는 1년 뒤에야
조아라 광주YWCA 회장 얘기에 ‘통곡’
“광주가 남편 목숨을 구했다” 생각

언론은 광주학살을 저지른 신군부를 찬양하고 시민들의 항쟁을 비방하는 데 지면을 아끼지 않았다. <조선일보>는 항쟁 중인 5월25일치 사설에서 “57년 전 일본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의 역사가 반교사적으로 우리에게 쓰라린 교훈을 주고 있다”고 썼다. 광주 시민을 일본인 폭도에 비유한 것이었다. <조선일보>는 도청 진압이 끝난 뒤 28일치 사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 오직 명백한 것은 광주시민 여러분은 이제 아무런 위협도, 공포도, 불안도 느끼지 않아도 될 조건과 환경의 보호를 받게 됐고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 비상계엄군으로서 군이 자제에 자제를 거듭했던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 때문에 신중을 거듭했던 군의 노고를 우리는 잊지 않는다.” 거짓으로 얼룩진 사설이었다.

 80년 8월14일부터 ‘김대중 사건’ 공판이 비공개로 진행됐으나 이희호는 ‘죄수복에 수갑 찬 남편’의 모습을 볼 수 없어 내내 방청하지 않았다. 실제로 8월15일치 신문 1면에 일제히 보도된 사진을 통해 연행 이후 처음 공개된 ‘김대중 사건’ 피고인들의 모습은 초췌하기 그지없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80년 8월14일부터 ‘김대중 사건’ 공판이 비공개로 진행됐으나 이희호는 ‘죄수복에 수갑 찬 남편’의 모습을 볼 수 없어 내내 방청하지 않았다. 실제로 8월15일치 신문 1면에 일제히 보도된 사진을 통해 연행 이후 처음 공개된 ‘김대중 사건’ 피고인들의 모습은 초췌하기 그지없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광주의 항쟁을 진압한 신군부는 6월에 육군본부 이름으로 ‘광주사태의 진상’이라는 공식 발표문을 냈다. 이 발표문에서 신군부는 “5·17조치 이후 서울에서 반정부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김대중 추종 세력을 포함한, 서울 학생 시위를 주도해온 서울대·고려대 등 재경 대학의 호남 출신 문제 학생들과 깡패들까지 합세해 광주로 진입하여 그 지역 깡패들과 어울려 현지 민심을 선동했다”고 주장했다. 김대중을 광주항쟁의 배후로 창작한 것이었다.

80년 7월4일 ‘내란음모 사건’ 발표
8월8일 육군교도소 김대중 첫 면회
8월14일부터 비공개 재판 진행
‘공소장 13만자’ 6명 6시간20분 낭독

“죄수복 남편 볼 수 없어” 방청 불참
1심 뒤에도 수사관 가택수색 샅샅이
“남편에게 유리한 증거 모두 없애려”

남산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 신문을 받던 김대중은 6월28일에야 광주학살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날 보안사 합동수사본부 수사단장 이학봉이 남산 지하실로 찾아와 김대중에게 말했다. “우리와 함께 간다면 대통령직만 빼고 어떤 자리라도 드리겠습니다. 협조하면 살고, 거부하면 죽는 것입니다.” 이학봉이 나가고 난 뒤 수사관이 신문 한 뭉치를 김대중에게 던져주었다. ‘광주사태’를 보도한 신문들이었다. 시민들이 100명도 넘게 사망했다는 기사가 보였다. 김대중은 너무나 큰 충격을 받고 의식을 잃었다. 김대중은 그때의 심정을 자서전에서 이렇게 밝혔다. “나도 그만 죽고 싶었다. 죽자. 죽어버리자. 광주에서 희생당한 사람들, 내 어찌 살아서 그들을 볼 수 있단 말인가.” 김대중은 사흘 뒤 찾아온 이학봉에게 “협력할 수 없다. 죽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말했다. 이희호는 “그때 남편이 신군부의 회유에 굴복했더라면 남편을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희호가 광주학살의 진상을 상세히 들은 것은 항쟁이 나고 1년이나 지난 뒤였다. “바깥세상과 완전히 격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1년 뒤에야 광주의 진상을 알았어요. 광주항쟁으로 구속됐다가 풀려난 조아라 선생님이 광주와이더블유시에이(YWCA) 김경천 총무와 함께 우리 집을 찾아왔을 때였어요. 조아라 선생님이 해주시는 이야기를 들으며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광주와이더블유시에이 회장을 지낸 조아라는 광주항쟁 기간 중에 있었던 일을 이렇게 증언했다. “5·18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관을 구할 수 없었어. 학생들이 두꺼운 베니어판을 구해다가 잘라서 그것으로 관을 만들고, 미처 수의를 못 만드니까 당목으로 둘둘 감아서 태극기 한 장씩 덮어서 묶고 한 것이 도청 마당으로 하나 가득이여. 나중에는 돈 나올 데가 없으니 관 살 돈도 없지, 당목 살 돈도 없지, 그래 교회에서 우선 30만원을 얻어서 감당해야 했지.”

1980년 8월14일 첫 공판에서 공개된 공소장에서 신군부는 김대중을 ‘광주항쟁을 통해 내란음모를 획책한 반국가단체 수괴’로 몰기 위해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과 총학생회장 박관현에게 시위자금을 줬다고 꾸몄다. 정동년은 88년 11월1일 광주특위 청문회에 출석해 ‘고문에 의한 거짓 진술’이었다고 증언했다.(왼쪽 사진) 80년 5월17일 도피해 광주항쟁 현장에 있지도 않았던 박관현(오른쪽 사진)은 2년 뒤 체포돼 40일 넘게 ‘5·18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하다 82년 10월 끝내 숨졌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0년 8월14일 첫 공판에서 공개된 공소장에서 신군부는 김대중을 ‘광주항쟁을 통해 내란음모를 획책한 반국가단체 수괴’로 몰기 위해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과 총학생회장 박관현에게 시위자금을 줬다고 꾸몄다. 정동년은 88년 11월1일 광주특위 청문회에 출석해 ‘고문에 의한 거짓 진술’이었다고 증언했다.(왼쪽 사진) 80년 5월17일 도피해 광주항쟁 현장에 있지도 않았던 박관현(오른쪽 사진)은 2년 뒤 체포돼 40일 넘게 ‘5·18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하다 82년 10월 끝내 숨졌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희호는 광주가 아니었다면 남편이 신군부에게 죽임을 당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광주가 남편의 목숨을 구했다고 생각합니다. 신군부는 광주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여 놓고 남편까지 죽일 수는 없었을 거예요.” 이희호는 1983년 김대중과 미국에 망명해 머물고 있을 때 광주항쟁을 기록한 영상물을 보았다. “처음에는 너무 떨려서 보지 못하다가, 용기를 내서 남편과 함께 항쟁 비디오를 봤어요. 너무나 기가 막혀서 말을 할 수가 없었어요. 어떻게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이희호는 27년이 지난 2007년 8월 광주항쟁을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았다. “그 영화도 남편과 함께 보았어요. 그때의 기억이 다시 떠올라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눈물이 또 흘러나왔어요. 그 영화를 보고 나서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킨 시민군 생존자들을 만났지요. 광주항쟁 기간에 광주시민들이 보여준 행동에 세계가 놀랐어요. 치안 공백 상태였는데도 약탈도 없었고 도둑도 없었고요. 광주는 위대한 항쟁의 도시로 역사에 남을 겁니다.”

광주에서 학살이 벌어지던 중 5월21일 국무총리 신현확을 비롯한 국무위원 전원이 사직서를 냈다. 대통령 최규하는 무역협회장 박충훈을 국무총리 서리로 임명하고 내각을 개편했다. 개각 다음날 전두환은 최규하에게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설치해야 한다고 압박해 재가를 얻어냈다. 국보위는 5월31일 대통령 자문기구라는 형식을 띠고 등장했다. 국보위 위원장은 최규하였지만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다. 전두환은 국보위 안에 상임위원회를 설치해 위원장은 자신이 맡고 12·12반란에 함께한 측근들을 위원으로 앉혔다. ‘보이지 않는 그림자 정부’의 탄생이었다.

1980년 7월4일 계엄사령부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을 발표했다. 극악한 고문으로 조작한 허구의 사건이었다. 계엄사는 김대중을 비롯한 24명을 내란음모 혐의와 계엄포고령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7월15일 김대중·문익환·예춘호·이문영·고은을 포함한 공동 피고인들은 육군교도소와 서대문구치소에 나뉘어 수감됐다. 이희호는 남편이 구속됐다는 소식을 7월 중순에야 접했다. 군사재판에 회부됐으니 변호인을 선임하라는 내용의 구속통지서가 집으로 날아왔다. 다른 구속자 가족들에게도 통지서가 전달됐다.

1980년 5월17일 밤 연행된 김대중은 6월28일 남산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 신문을 받으며 ‘광주학살’ 사실을 처음 알았다. 이희호는 1년 뒤쯤 광주항쟁 시민수습위원으로 구속됐다 풀려난 조아라 광주와이더블유시에이(YWCA) 회장을 통해 진상을 확인했다. 사진은 2007년 8월9일 서울 상암씨지브이에서 ‘광주항쟁’ 영화 <화려한 휴가>를 관람하고 있는 김대중(왼쪽)·이희호(오른쪽) 부부. '한겨레' 자료사진
1980년 5월17일 밤 연행된 김대중은 6월28일 남산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 신문을 받으며 ‘광주학살’ 사실을 처음 알았다. 이희호는 1년 뒤쯤 광주항쟁 시민수습위원으로 구속됐다 풀려난 조아라 광주와이더블유시에이(YWCA) 회장을 통해 진상을 확인했다. 사진은 2007년 8월9일 서울 상암씨지브이에서 ‘광주항쟁’ 영화 <화려한 휴가>를 관람하고 있는 김대중(왼쪽)·이희호(오른쪽) 부부. '한겨레' 자료사진
구속자 가족들에게 가장 급한 일은 변호사 선임이었다. 이희호가 동교동 집에 갇혀 있는 동안 문익환의 부인 박용길, 이문영의 부인 김석중, 이해동의 부인 이종옥은 3인1조가 돼 변호사를 구하러 다녔다. 처음에 찾아간 곳은 1976년 3·1민주구국선언 사건 때 변호를 맡아준 박세경의 사무실이었다. 박세경은 선뜻 응낙하고 변호인단 구성에 나섰다. 신군부는 박세경과 변호인단을 엉뚱한 죄목을 걸어 잡아들였다. 박세경은 구속되고 나머지 변호사들도 1년 동안 영업정지를 당했다.

가족들은 찌는 듯한 삼복더위에 서소문 일대 변호사 사무실을 돌고 돌았다. 100군데가 넘는 사무실을 찾아다녔으나 변호를 맡지 못하겠다는 말만 들었다. 너무 무서워서 못 하겠다고 솔직하게 이유를 밝히는 사람도 있었다. 구속자 가족들은 변호사 없이 재판에 임하기로 했다. 국선변호사가 형식적으로 변호인 자리를 메웠다. 변호사를 찾아다니는 사이 구속자 가족들은 군부가 김대중을 죽일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소문은 점점 더 분명해지더니 이듬해 1월6일 사형시킬 것이라고 날짜까지 박혀 나돌았다. 사람들은 울면서 거리를 헤매었다.

8월8일 이희호는 육군교도소로부터 다음날 면회를 할 수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남한산성 육군교도소로 찾아갔지요. 교도소 소장 옆방에서 테이블에 녹음기를 놓고 소장과 헌병이 지켜보는 가운데 남편을 만났어요.” 김대중의 몸은 반쪽이 돼 있었다. 석 달 만에 아내를 보는데도 김대중의 얼굴엔 반가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남편의 그런 모습을 보니 말문이 막히고 정신이 아득했어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시동생과 홍일이, 비서들이 어디에 갇혀 있는지 아직 모르고 홍업이는 수배중이라고 이야기했지요. 면회는 10분이었는데, 그 10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어요. 돌아오는 차 안에서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하고 기도를 드렸지요.”

1980년 8월14일 오전 용산 육군본부 군법회의 대법정에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계엄보통군법회의가 열렸다. 비공개 재판이었다. 국내 기자는 한 사람도 들어오지 못하고 외신 기자 두 명에게만 방청이 허용됐다. 가족들에게도 피고인 한 사람당 한 장씩만 방청권이 배정됐다. 이 사건에 엮인 피고인 24명은 그날 비로소 한자리에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김대중이 처음 보는 얼굴도 있었다. 27살의 고려대 학생 설훈이었다. 미국은 이 사건에 관심을 품고 국무부 고문변호사를 파견했다. 이희호는 재판정에 나가지 않았다. “구속자 가족들이 3·1민주구국선언 사건 때처럼 공판을 거부한다고 해서 그런 줄 알고 방청하지 않았어요. 후에 방청하기로 방침이 바뀌었는데 나한테는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나는 겁이 나서 밖으로 연락을 하지 못했고 다른 사람들도 우리 집에 연락을 하지 않았어요. 그 뒤에도 남편이 죄수복을 입고 수갑을 찬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어 공판정에 나가지 않았어요.”

공소장은 13만자에 이르렀다. 읽는 데만 6시간20분이 걸렸다. 검찰관 여섯 명이 교대로 낭독했다. 검찰이 김대중에게 씌운 혐의의 핵심은 ‘광주사태’를 배후에서 조종해 내란음모를 획책했다는 것과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 수괴로 활동했다는 것이었다. 내란음모 관련 공소장은 혐의 내용을 이렇게 나열했다. “김대중은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이 4월12일 자신을 방문했을 때 광주 지역 대학생들의 시위 상황에 대해 의논하고, (…) 그 후 5월5일 정동년이 다시 김상현과 함께 김대중 자택을 방문했을 때 광주 지역 학생 시위자금으로 500만원 지원을 요청하자 우선 300만원을 주고, 5월8일에 두 번째로 200만원을 주었다. (…) 정동년은 김대중 지시에 따라 광주로 내려와 5월6일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에게 270만원을, 5월10일 조선대 시위 책임자 윤한봉에게 170만원을 시위자금으로 주었다. 5월18일 광주사태의 발단이 된 전남대 가두시위를 배후 조종하고, 이어서 조선대 학생들도 전남대 가두시위에 합류시켜 광주사건의 도화선이 되게 했다.”

검찰의 공소장은 극악무도한 고문으로 만들어낸 허구였다. 정동년은 5월17일 밤 예비검속 대상으로 광주보안사 지하실로 끌려갔고, 그 뒤 동교동에서 압수한 방명록에서 이름이 발견되자 신군부의 각본에 엮이게 된 것이었다. 정동년은 서울의 합동수사본부가 광주로 파견한 수사관들에게 무자비한 고문을 당한 끝에 수사관들이 짜준 각본대로 진술서를 작성했다. 훗날 출옥한 뒤 정동년은 “처음에는 김대중에게 1천만원을 받은 것으로 했다가, 학생 신분에 1천만원이 너무 큰 돈이라고 생각한 수사관들이 500만원으로 낮추었다”고 폭로했다. 김대중은 미국 망명에서 돌아온 뒤인 1985년에야 동교동을 방문한 정동년을 처음으로 만났다.

검찰의 공소장은 김대중이 ‘광주사태’ 당시 무기반납을 방해하도록 지시하고 제2의 광주사태를 준비했다는 혐의도 열거했다. 공소장 내용이 사실이라면 김대중이 신군부에 연행돼 남산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 취조를 받던 중에 광주항쟁의 전개를 훤히 꿰뚫어보고 뒤에서 조종했다는 것인데, 검찰은 태연하게 그런 황당한 주장을 계속했다. 신군부는 처음에는 김대중을 내란죄로 몰려고 했으나 너무 억지스럽다고 판단했는지 내란선동죄로 죄목을 바꾸었다. 내란선동죄는 최고 형량이 무기징역이었다. 김대중을 죽이는 것이 목적이었던 신군부는 마지막 단계에서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 수괴’ 혐의를 추가했다. 김대중이 1973년 8월 도쿄에서 결성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 일본 본부 의장에 취임했다고 조작해 그것으로 반국가단체 수괴 혐의를 씌운 것이었다.

김대중은 한민통 일본본부 결성을 앞두고 1973년 8월 도쿄에서 납치당해 6일 뒤 서울로 끌려왔다. 한민통은 김대중이 서울에 끌려온 뒤인 8월15일에야 출범했다. “그때 도쿄의 한인들이 남편을 한민통 일본본부 의장으로 추대했어요. 남편의 뜻과는 상관없이 그렇게 한 거예요. 그 뒤 남편은 일본을 방문하는 야당 의원이나 이태영 박사를 통해 한민통 의장직을 수락한 바 없으니 지워 달라고 여러 차례 부탁했어요. 남편은 한민통 결성을 앞두고 일본의 민주인사들과 만날 때 ‘대한민국 절대 지지’, ‘친북인사 배제’라는 원칙을 강조했어요. 그래서 1976년 3·1사건으로 구속됐을 때도 한민통과 관련한 어떤 혐의도 받지 않았던 거예요.”

신군부에게 중요한 것은 김대중을 사형시킬 명분을 찾는 것이었다. “남편은 1심이 끝나기 전에 나에게 ‘집에 일본 잡지 <세카이>가 있는데 거기에 한민통에 관해 내 의견을 말한 대담 내용이 실려 있으니 증거물로 제출해 달라’고 했어요. 그 책을 찾아냈는데 전할 길이 없어서, 미국 국무부에서 파견한 변호사에게 보냈지요.” 김대중은 1심이 끝난 뒤 면회하러 온 이희호에게 “미국에서 한민통을 발족시킬 때 내가 한 말을 녹음한 테이프가 있으니 찾아서 변호사에게 보내 달라”는 말도 했다. “그 다음날 합동수사본부에서 여러 사람이 나와서 다시 가택수색을 시작했어요. 테이프란 테이프는 모두 쓸어 모아 하나도 남기지 않고 가져갔어요. 과거에 외국에서 온 편지들을 찾아내 샅샅이 뒤지고 남편의 양복 호주머니까지 뒤졌어요. 남편에게 유리한 증거가 될 만한 것은 무엇이든지 없애려는 것 같았어요.”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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