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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오전 ‘사형’ 오후에 ‘무기’로…지옥과 천당 오간 ‘운명의 날’

등록 2016-02-14 20:14수정 2017-01-09 10:47

1981년 1월23일 오전 김대중은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 판결을 받았으나 오후 임시국무회의에서 ‘무기’로 감형됐다. 신군부는 김대중의 구명 탄원에 선처를 한 것으로 생색을 냈지만 실상은 ‘전두환의 미국 방문 초청’과 맞바꾼 거래였다. 81년 1월 말 청주교도소로 이감된 김대중은 단독 건물의 독방에 철저히 격리됐고 가족 면회도 한번에 겨우 10분씩만 가능했다. 사진은 3년 형을 확정받고 대전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맏아들 김홍일이 81년 5월 특멸사면으로 출감한 뒤 이희호·김홍업과 함께 청주교도소에서 김대중을 면회하고 있는 모습.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한겨레' 자료사진
1981년 1월23일 오전 김대중은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 판결을 받았으나 오후 임시국무회의에서 ‘무기’로 감형됐다. 신군부는 김대중의 구명 탄원에 선처를 한 것으로 생색을 냈지만 실상은 ‘전두환의 미국 방문 초청’과 맞바꾼 거래였다. 81년 1월 말 청주교도소로 이감된 김대중은 단독 건물의 독방에 철저히 격리됐고 가족 면회도 한번에 겨우 10분씩만 가능했다. 사진은 3년 형을 확정받고 대전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맏아들 김홍일이 81년 5월 특멸사면으로 출감한 뒤 이희호·김홍업과 함께 청주교도소에서 김대중을 면회하고 있는 모습.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한겨레' 자료사진
[길을 찾아서] ‘고난의 길, 신념의 길’ 이희호 평전
제4부 제5공화국-9회 청주교도소

이희호 평전 이전 글 보기
1981년 1월15일 김대중이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있던 때에 고등법원에서 4년6개월의 형을 선고받은 큰아들 홍일이 대전교도소로 이감됐다. 이희호의 시동생 김대현과 동교동 비서 김옥두·한화갑도 대전교도소로 옮겨졌다. 다음날 이희호는 큰며느리, 둘째아들 홍업, 막내아들 홍걸과 함께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서 김대중을 면회했다. 대법원 판결을 일주일 앞둔 날이었다. 이희호는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꿇어 엎드렸다. 두 아들과 며느리도 함께 꿇어앉았다. 이희호는 눈물로 기도했다.

“하느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그리고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도 사랑해 주시고 축복해 주시옵소서. 어느 누구도 정치적인 이유로 억울하게 생명을 잃는 일은 없게 하시며 고난받는 우리 형제들의 그 희생이 헛되지 않게 하시옵소서. 그리고 이 땅에 하느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도록 허락해 주시옵소서.” 그날의 일을 김대중은 후에 이렇게 되새겼다. “나는 그때만큼 아내를 존경하는 눈으로 본 적이 없다. 가족의 믿음과 사랑이 없었더라면 나는 20년 넘게 지속된 고난을 결코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 중심에는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내가 있었다.”

대법원 판결 1주일 전에야 첫 면회
이희호와 큰며느리·홍업·홍걸
육군교도소 바닥 엎드려 ‘기도’
“그때만큼 아내 존경스러운 적 없다”

81년 1월 23일 대법도 ‘사형’ 확정
그날 오후 임시국무회의 ‘무기’로
언론엔 ‘김대중의 감형 탄원서’ 공개
“남편을 매장하려고 했던 거죠”

레이건 당선자쪽 ‘구명’ 요청에
특사 정호용 ‘전두환 방미’ 거래
2월2일 전두환 부부 백악관 방문
김대중은 청주교도소 ‘옥중옥살이’

4월14일 대전교도소서 홍일 편지
“사랑하는 아버지께…”
며칠뒤 전달받은 김대중의 답장
“가슴이 메고 눈물이 앞을 가려…”

81년 1월28일 ‘김대중의 목숨값’으로 첫 미국 방문길에 오른 전두환 부부가 2월2일(현지시각) 레이건 대통령 부부와 백악관 발코니에 나란히 서서 손을 흔들고 있는 모습.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한겨레' 자료사진
81년 1월28일 ‘김대중의 목숨값’으로 첫 미국 방문길에 오른 전두환 부부가 2월2일(현지시각) 레이건 대통령 부부와 백악관 발코니에 나란히 서서 손을 흔들고 있는 모습.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한겨레' 자료사진
이희호는 1월18일부터 다시 둘째아들 홍업과 함께 사흘 동안 금식기도를 드렸다. “구약성서의 에스더와 같이 내 기도로 나라가 바로잡히길 열망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드렸어요. 에스더가 자기 백성 유대인들을 위해 3일 동안 금식한 뒤에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결심으로 페르시아 아하수에로 왕 앞에 나아갔을 때, 아하수에로 왕이 금홀을 내밀어 에스더를 받아들인 것처럼, 하느님께서도 나에게 금홀을 내밀어 내 청을 거절하지 말아 주시라고 빌었지요.” 1월23일 이희호는 새벽에 일어나 다시 오랫동안 기도했다. 그날 오전 대법원에서 김대중 사형 확정 판결이 났다. 대법원은 신군부의 수족이었다. 이날 오후 정부는 임시국무회의를 열어 사형을 무기로 감형한다는 결정을 했다. 이희호에게는 지옥과 천당을 오가는 하루였다.

이튿날 정부 대변인인 문공부 장관 이광표는 김대중의 형량을 무기로 낮춘 이유로 “김대중이 1월18일 전두환 대통령 앞으로 그간 국내외에 물의를 일으켜 국가안보에 누를 끼친 데 대하여 책임을 통감하며 국민 앞에 미안하게 생각해 마지않는다면서 특별한 아량과 너그러운 선처를 호소해왔다”고 밝혔다. 김대중의 감형은 미국을 비롯한 국내외의 끊이지 않는 구명운동의 결과였는데도 전두환 정권은 마치 김대중이 선처를 호소해 감형해준 것처럼 말을 만들었다.

1981년 1월 초 미국과 협상 끝에 ‘김대중 사형’을 포기한 전두환과 신군부는 김대중을 정치적으로 매장시키기 위해 갖가지 술수를 썼다. 81년 1월18일 안기부장 유학성의 회유에 비공개 조건으로 작성한 뒤 4차례나 취소 요청을 했으나 끝내 언론에 발표해버린 ‘김대중의 감형 탄원서’.  '한겨레' 자료사진
1981년 1월 초 미국과 협상 끝에 ‘김대중 사형’을 포기한 전두환과 신군부는 김대중을 정치적으로 매장시키기 위해 갖가지 술수를 썼다. 81년 1월18일 안기부장 유학성의 회유에 비공개 조건으로 작성한 뒤 4차례나 취소 요청을 했으나 끝내 언론에 발표해버린 ‘김대중의 감형 탄원서’. '한겨레' 자료사진
김대중은 면회하러 온 이희호에게 사태의 정확한 진상을 밝혔다. “1월18일 유학성 안기부장이 나를 안기부로 데려가 느닷없이 대통령에게 감형을 탄원하는 글을 써달라고 했다. 사흘이나 붙들고서 집요하게 나를 설득했다. 사형을 시켜야 한다는 강경파를 달래려면 구실이 있어야 하고, 또 내 일이 잘돼야 나로 인한 구속자들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했다. 유학성 안기부장은 자신도 가톨릭 신자라면서 탄원서를 쓰더라도 공개하지 않을 것을 하느님께 맹세한다고 했다. 결국 그쪽에서 요구하는 대로 써주었다. 쓰고 나서 다시 생각해보니 나를 교수대에 올려놓고 협박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다시 탄원서를 취소해달라고 했다. 네 번이나 취소했다는 다짐을 받았다. 육군교도소로 돌아올 때 탄원서를 돌려달라고 했더니 ‘깜빡 잊고 책상 위에 놓고 나왔다’고, ‘염려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약속을 깨고 내가 써준 글을 공개했다.” 김대중이 목숨을 구걸하는 것으로 비치게 하려고 교묘히 기획한 일이었다. 이희호는 신군부가 그런 치졸한 짓을 벌인 데 분노를 느꼈다. “어떻게든 남편의 인격을 훼손하고 매장하려고 했던 거예요. 그렇게 거짓말로 남편을 모독하는 걸 그 뒤로도 여러 번 겪었지요.”

김대중의 구명에 결정적인 구실을 한 것은 미국이었다. 1980년 12월 초 대통령 카터는 국방장관 해럴드 브라운을 서울로 보내 전두환에게 김대중을 사형시키면 안 된다고 경고했다. 전두환은 군부의 장성들이 김대중의 처형을 원한다고 대답했다. 카터 행정부의 관리들은 다시 레이건의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지명된 리처드 앨런과 접촉해 김대중 구명에 나서달라고 요청했다. 앨런은 워싱턴의 한국 중앙정보부 책임자 손장래를 통해 전두환에게 ‘레이건이 김대중 처형을 강력하게 반대한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앨런은 12월9일과 18일, 1월2일, 세 차례에 걸쳐 신군부와 협상을 벌였다.

80년 7월18일 이·취임식에서 당시 중앙정보부장 서리 전두환에게서 중앙정보부기를 넘겨받고 있는 유학성. '한겨레' 자료사진
80년 7월18일 이·취임식에서 당시 중앙정보부장 서리 전두환에게서 중앙정보부기를 넘겨받고 있는 유학성. '한겨레' 자료사진
전두환의 특사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한 정호용은 앨런을 만난 자리에서 “김대중은 남한의 국가안보를 위해하는 가장 위험한 인물이므로 법에 따라 반드시 처형해야 한다”고 강경하게 말했다. 앨런은 “김대중을 처형한다면 한·미 정부 사이의 거북한 관계를 청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될 것”이라고 답했다. 만약 김대중을 죽인다면 “벼락이 당신들을 치는 듯한” 미국의 반발이 있을 것이라는 말도 했다. 세 번째 회담에서 정호용은 레이건의 대통령 취임식 행사에 전두환을 공식적으로 초청해줄 것을 요청했고, 앨런은 김대중을 살려준다는 조건 아래 레이건의 대통령 취임 뒤 전두환이 백악관을 방문한다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레이건의 취임식이 거행된 바로 다음날인 1981년 1월21일 백악관은 전두환이 미국을 방문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전두환은 1월28일부터 2월7일까지 미국을 방문해 2월2일 외국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레이건의 백악관을 찾았다. 미국 국무부는 레이건에게 절제된 인사만 하라고 조언했지만, 레이건은 외교사절 출입구까지 나가 백악관에 들어서는 전두환을 따뜻한 포옹으로 맞이했다. 이어 레이건은 백악관 점심식사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오늘 이 자리에서 한국인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그것은 자유와 우의에 기초한 한·미 양국의 특별한 유대관계는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돈독하다는 사실이다.”

당시 주한 미국 대사였던 글라이스틴은 회고록에서 그때의 장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광주시민들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을 주도했으며 한국의 대통령직을 탈취한 인물을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레이건이) 그토록 무비판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정말로 잘못된 일이었다.” 레이건의 환대는 미국이 광주학살 원흉 전두환을 두둔한다는 느낌을 한국 국민에게 심어주는 데 일조했다. 전두환은 미국 방문 기간 중 재미한인들의 반대시위에 부딪혔다. 행사장마다 시위대가 나타나자 전두환은 행사를 취소하거나 사진만 찍고 서둘러 떠났다. ‘전두환 받들기’에 안달이 난 국내 신문과 방송은 이런 사실을 전하지 않았다.

신군부는 김대중 감형 조처를 취한 다음날인 1월24일 비상계엄령을 해제했다. 10·26 박정희 암살 사태로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456일 만에 나라가 ‘비상상황’에서 벗어났다. 이 기간은 전두환 신군부의 기나긴 권력 장악 과정이었다. 1월26일 이희호는 육군교도소로 김대중을 면회하러 갔다.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막 빠져나온 김대중은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모든 일이 전부 나쁠 수는 없다. 나쁜 일의 뒷면에는 좋은 일도 있다. 이제 감옥에 있게 되면 평소 내가 하고 싶었던 역사·철학·신학을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기게 된다. 경제·국방도 더 공부하고 싶다.”

전두환이 미국을 방문하러 떠나고 사흘이 지난 뒤인 1월31일 김대중은 청주교도소로 이감됐다. 정부는 김대중 내란음모 관련자들을 부산·공주·대구·원주·목포·진주·안동·마산·강릉·순천 등지로 뿔뿔이 나누어 이감시켰다. “정부에서 이감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날도 육군교도소로 면회를 하러 갔지요. 밤사이에 눈이 내려 미끄러웠어요. 면회 신청을 했더니 남편이 아침 일찍 청주로 옮겨갔다고 했어요.” 청주교도소에 도착한 김대중은 기결수가 돼 머리를 깎였다. 몇 달 사이 몸무게는 10킬로그램이나 빠져 있었다. 김대중은 그때의 상황을 자서전에서 이렇게 밝혔다. “다리가 불편해서 마루에 앉지 못했다. 교도소에서 의자와 책상, 나무 침대를 짜서 주었는데 매우 조악했다. 식사는 더 형편없었다. 거의 짜거나 매웠고 상한 음식이 나올 때도 많았다.”

2월2일 이희호는 면회가 되지 않는 줄 알면서도 무작정 청주로 찾아갔다. “내가 움직일 때마다 경찰과 정보원이 내가 탄 차에 동승했어요.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도 날카로운 눈길로 감시하는 통에 피로감을 느꼈지요.” 예상했던 대로 면회는 허락되지 않았다. “책이랑 담요랑 영치금을 넣고 그길로 대전교도소에 이감된 큰아들을 보러 갔지요. 동교동 식구들은 모두 계엄포고령 위반죄로 대전교도소에 수감돼 있었어요.” 홍일은 아버지가 무기로 감형된 사실을 알고 표정이 한결 밝아져 있었다. 이희호는 시동생 김대현도 면회했다. “다른 비서들도 면회를 하고 싶었는데 가족만 면회할 수 있다고 해서 구매물과 영치금만 넣고 돌아왔지요.”

이희호가 청주교도소에서 김대중을 처음으로 면회한 것은 2월10일이었다. 김대중은 감옥 속의 감옥에 있었다. 수속 절차가 유난히 까다로웠다. 이희호는 몇 시간을 기다린 끝에 교도관을 따라갔다. 복도 끝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 또 문을 거쳐서야 남편을 만날 수 있었다. 면회 장소는 특별하게 개조한 방이었다. 넓고 두꺼운 유리를 사이에 두고 세 사람이 감시하는 가운데 인터폰으로 이야기해야 했다. “할 말도 제대로 못했는데 10분이 되자 인터폰이 툭 끊겼어요. 면회라고 할 수도 없었지요.” 이희호는 청주교도소 소장을 만나 항의하고 법무부 장관에게 처우개선 건의서를 보냈다. 건의서 내용은 이랬다. “1개의 동을 전부 비우고 옆에 있는 타 동과의 사이는 벽을 쌓아 완전히 격리시켜 놓았다 하니, 마치 청주교도소 내에 또 하나의 단독 특별교도소가 마련되어 있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이와 같은 사례는 민주국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항의해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다섯명의 간수가 번갈아가며 밤낮으로 김대중을 지켰다. 운동시간에도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없었다. 철저한 격리 수용이었다.

김대중을 청주교도소에 감금한 신군부는 제5공화국을 출범시켰다. 먼저 1월15일 전두환은 민주정의당을 창당해 자신이 총재를 맡았다. 이어 유치송을 총재로 한 민주한국당과 김종철을 총재로 한 한국국민당이 창당됐다. 1980년 12월31일로 이름을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로 바꾼 중앙정보부가 개입해 만든 관제야당들이었다. 2월25일 대통령선거인단이 간접선거로 대통령을 뽑는 ‘체육관 선거’가 실시됐다. 민정당 후보 전두환이 전체 투표자 5271명 중 4755명의 표를 얻어 90.2%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유치송과 김종철이 야당 대통령 후보로 들러리를 섰다. 전두환은 3월3일 7년 임기의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어 3월25일 제11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지역구 92곳에서 184명을 뽑는 선거에서 민주정의당은 90명을 당선시켰고, 전국구 의석의 3분의 2인 61석을 확보해 최종 의석 151석을 차지했다. 이어 민한당과 국민당이 81석, 25석을 얻었다. 광주를 피로 물들이고 권력을 쥔 전두환 신군부는 다당제라는 민주주의 허울을 쓰고 의회까지 장악했다.

대전교도소로 이감된 큰아들 홍일과 동교동 식구들에게는 교도소 안에서 가장 나쁜 방이 배정되었다. 말썽을 일으킨 재소자들을 가두는 ‘벌방’으로 사용되는 곳이었다. 한겨울 감방은 찬 기운을 막지 못해 영하 15도까지 떨어졌다. 대변이 얼어붙어 고봉밥처럼 됐고 소변을 보면 그대로 얼음이 됐다.

2월25일 전두환이 대통령에 당선된 뒤 이희호를 압박하던 손이 조금 느슨해졌다. 둘째아들 홍업에게 바깥출입이 허락되었고, 이희호는 일요일에 교회에 갈 수 있었다. 4월14일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는 날 새벽 홍일은 마룻바닥에 꿇어앉아 청주교도소의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여러 차례 교도소장에게 간청한 끝에 겨우 허락이 떨어져 편지를 쓸 수 있었다. 대전교도소의 편지는 며칠 뒤 청주교도소로 전해졌다. 김대중은 큰아들의 편지를 받고 감정이 북받쳐 올라 바로 읽지 못했다. 전해 5월17일 이후 헤어진 뒤 거의 1년 동안 만나지 못하다가 편지를 받으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김대중은 밤이 되어서야 편지를 읽었다.

“사랑하는 아버지께. 꿈속에서도 간절히 만나 뵙고 싶었던 아버지께 편지를 쓴다고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지는군요. 먼저 저희 가족들과 많은 분들의 기도를 들어주어서 아버지의 생명을 지켜주는 주님의 큰 은혜에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 너무도 아버지를 그리워한 탓인지 저희 형제가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뒤 아버지 손을 양쪽으로 나란히 잡고 남산 팔각정에 올라가 사진을 찍으며 아버지께 사랑을 받던 생각이 나곤 합니다.”

홍일은 편지에 ‘추신’을 덧붙여 ‘편지를 취급하시는 분들’에게 호소했다. “이 편지를 아버지께서 받아보실 수 있도록 선처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검열에 걸리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김대중은 아들의 편지를 한자 한자 뚫어지게 읽고 또 읽었다. 편지를 가슴에 품고 누웠지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튿날 김대중은 아내에게 쓰는 엽서에 홍일에게 보내는 답장을 함께 적었다. “어제는 가장 기쁜 날이었습니다. 오후에 당신과 홍업이 편지와 더불어 뜻밖에도 홍일이의 편지가 전달되었던 것입니다. 너무도 벅찬 감격으로 가슴이 메고 눈물이 앞을 가려 몇 시간을 못 읽다가 잘 때 이불 속에서야 읽었습니다.”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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