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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영패에 갇히지 말고 영패를 가둬야 합니다”

등록 2016-02-26 20:05수정 2016-02-28 10:03

1990년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의 3당합당은 영남패권주의의 호남 고립을 고착화시킨 계기로 평가된다. 새로 등장한 거대 정당 민주자유당이 지방자치제를 연기하자 무기한 단식에 들어간 당시 평화민주당의 김대중 총재를 부인 이희호씨와 아들 김홍일씨가 서울대병원으로 옮기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90년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의 3당합당은 영남패권주의의 호남 고립을 고착화시킨 계기로 평가된다. 새로 등장한 거대 정당 민주자유당이 지방자치제를 연기하자 무기한 단식에 들어간 당시 평화민주당의 김대중 총재를 부인 이희호씨와 아들 김홍일씨가 서울대병원으로 옮기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특집
영남패권주의 논쟁, 박구용이 고종석에게
선생님은 저를 모르실 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불쑥 공개적으로 편지를 쓰는 것이 다소 열없습니다. 저는 2012년 10월5일치 <경향신문> 칼럼에서 당시 선생님의 절필 선언을 비관적으로 평했던 인연이 있습니다. 어쨌거나 선생님은 곧 돌아왔고, 경향에 <고종석의 편지>라는 이름으로 글을 써왔습니다. 그중 2월14일자, ‘홍세화 선생님께’ 드리는 편지글에 쓴 영남패권주의(이하 영패)에 대한 선생님의 비판이 오히려 영패를 공고히 하는 자양분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에 선생님의 지혜와 덕망에 대한 저의 굳건한 믿음 위에서 몇 가지 비판적 의견을 드리고자 합니다.

민주주의 퇴행시킨 영패

‘영남패권주의와 민주주의 퇴행’(<한겨레> 2016년 2월5일치 30면)에서 홍세화 선생님은 영패를 계급모순이나 민족모순과 등가 수준에서 비판하고 있습니다. 영패가 영남사람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지배할 수 있으며, 이 점에서 자기 자신도 예외일 수 없다고 토로합니다. 종교화된 영패에 투항하지 않고 버티기가 그만큼 어렵다고 진단한 것이죠. 여하튼 영패에서 벗어나려면 영남 내부의 민주적 역량을 키워가며 반-새누리, 반-영패 연합전선을 구축하자는 것이 홍세화 선생님의 제안입니다.

제가 읽은 바로 선생님은 홍세화 선생님의 영패에 대한 진단과 처방을 극화시키고 계십니다. 선생님은 영패를 인종주의나 파시즘과 동일시하고, 그 주범이 민주당의 ‘친노 패권주의’라고 진단하면서도 김대중 정권은 예외로 둡니다. 이러다 보니 영패의 주체는 오직 영남사람들이고, 호남사람은 그 영패를 무너뜨리기 위해 저항해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하지만 호남이 온갖 설움을 견디며 저항한 것은 영패가 아니라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유린하며 자국민의 목숨을 희생시킨 독재세력입니다. 물론 유신 이후 독재세력이 호남을 고립시키는 방식으로 영패를 확립해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따라서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져온 독재세력과 영패는 한 몸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아직도 독재자들의 영혼이 숨쉬고 있는 새누리당을 호남인들이 지지할 수 없는 이유겠지요.

반면 김영삼은 영패에 기생했지만 독재자는 아닙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김영삼 정부가 영패를 고착시켰다는 점에 몰두한 나머지 문민정부와 독재정부의 차이를 무시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영패에 대한 선생님의 지나친 적개심은 참여정부를 영패의 결정판으로 치부하며 독재정부보다 더 나쁜 세력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영패 개념에 매몰되어 김영삼과 노무현, 그리고 독재자들 사이의 차이를 무시하는 것은 영패를 완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강화할 뿐입니다.

이 나라에 지역감정이나 지역주의는 없습니다. 오직 영패만 있을 뿐입니다. 그 실체가 뚜렷하지 않은 영패는 두터운 장막 뒤에 숨어 한국 정치를 왜곡시키고 있는 극우 이데올로기입니다. <아주 낯선 상식>(개마고원 펴냄)의 저자 김욱 교수의 말처럼 영패는 ‘분열하면 진다’, ‘영남후보가 나서야 이긴다’, ‘호남색을 지워야 한다’, ‘호남은 개혁적이어야 한다’, ‘영남을 챙겨야 지역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와 같은 논리를 통해 작동합니다. 이처럼 그럴듯한 논리로 변장한 영패가 어느덧 수구 특권세력을 보호하는 방탄유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영패가 한국의 민주주의를 퇴행시킬 만큼 무서워진 진짜 이유는 영패에 대한 전면적이고 비타협적인 비판조차 영패를 키우는 영양소로 뒤바뀐다는 데에 있습니다.

심지어 영패를 인종주의와 동일시하는 선생님의 극단적 비판은 인종주의와 싸워온 수많은 소수자들의 절망조차 세속적인 것으로 몰아붙일 우려가 큽니다. 인종주의는 검은 피부색의 교수를 ‘흑인 교수’라고 부르지만 영패는 저를 ‘호남 교수’라고 부르진 않습니다. 프랑스 식민지 앤틸리스 제도 출신의 흑인으로 식민주의 심리학을 대변했던 프란츠 파농에 따르면 백인이 휘두른 가장 무서운 무기는 흑인들이 어느 순간 백인의 눈빛으로 자신을 감시하고 멸시하게 만드는 시선입니다. 지배의 굴레에 갇힌 흑인은 백인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백인이 되려고 합니다. 영패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과 적개심도 결국 영패의 노예로 전락할 위험이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에 지역감정은 없다
오로지 영남패권주의만 있을 뿐
그러나 호남이 저항한 것은
영패가 아니라 독재세력이었고
독재자 영혼의 정당 지지 안한 것

영패에 대한 비타협적 비판조차
패권 키우는 영양소 된다
흑인들이 백인 시선 갖듯이
과장하면 영패의 사슬에 묶이니
영패를 말하되 고립시켜야 한다

영남 진보개혁세력 분리해야

영패는 객관적 사실이나 사태에 기초한 실체가 아니라, 유신 이후 수구 독재세력이 만들어낸 허위의식일 뿐입니다. 영패는 영남사람들만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영남 권력의 항구화를 위해 호남을 고립시키려는 악마적 지배전략입니다. 그러니 어느 지역 출신이냐에 상관없이 영남 수구세력의 권력 재생산에 기여하는 모든 사람과 그들의 허위의식이 영패의 뿌리입니다. 이 뿌리를 뽑아내려면 무엇보다 먼저 영패에 기생하는 자들로부터 영남의 진보 개혁 세력을 분리시켜야 합니다(장은주, ‘영남 패권, 새누리당 고립으로 죽이자’, <프레시안> 2016년 2월15일). 그렇지 않고 영패를 독재와 동일시하며 호남의 독자노선을 부추기는 것은 결국 호남의 고립을 부추기는 영패의 노예로 전락해가는 과정입니다.

여러 가지 변주가 있지만 이 나라의 더불어민주당(더민주당)은 크게 세 가지 세력이 함께 만들어 왔습니다. 먼저 ①갑오농민전쟁에서 시작하여 3월 독립운동, 4월 시민항쟁, 5월 민중항쟁, 6월 시민혁명을 이끌어온 개혁 세력, 나아가 ②사회정의와 시장성장의 균형 속에서 자유의 최대화를 꿈꾸는 세력, 마지막으로 ③사회 각 분야에서 개인적 노력과 열정을 통해 성공적인 삶을 살아온 세력입니다. 그런데 세 세력 간의 수적인 관계가 계속 바뀌어오는 과정에서도 더민주당의 이념과 정책방향을 주도해온 것은 ①이었습니다. 김대중과 노무현은 처음 ③에 속했지만 점차 ②에서 ①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장하며 정권을 창출했습니다. 두 대통령의 공통점은 다른 세력의 이성과 감성을 배우는 놀라운 학습능력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더민주당을 이끌었던 그 밖의 다른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세 세력 중에 하나나 둘을 대변했을 뿐이며, 그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정동영과 문재인의 실패는 그들의 출신 지역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세 세력을 통합할 수 있는 능력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안철수를 비롯한 국민의당 주도 세력은 더민주당 내부에서 ①과 대결을 벌이다 실패하자 도태를 피하기 위해 딴살림을 차렸습니다. ①의 영혼을 이해할 학습능력이 부족했던 이들은 ①을 친노 패권주의로 치부하며 호남 정치의 복원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연일 친노가 독재세력만큼 나쁘다고 몰아붙이며 3당 체제를 운운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친노가 선생님에겐 영패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3당 체제보다는 4당 체제를 선호합니다. 정의당과 더민주당이 진보를, 국민의당과 새누리당이 보수를 대변하는 방식으로 경쟁하길 바랍니다. 그래서 국민의당이 호남에서 새누리당과 차별화된 합리적 보수를 대변하는 정당으로 성장하길 바라며, 무엇보다 호남을 벗어나 전국적인 보수정당으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국민의당이 호남의 상처를 볼모로 제3당이 되어 그 지지세력을 영패에 기생하는 새누리당에 바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새누리당 홀로 아무리 많은 의석을 차지한들 개헌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속적인, 너무나 세속적인 권력분점을 매개로 제3당과의 담합이 이루어진다면 그들의 권력을 지속시킬 개헌이 가능할 것입니다.

지역주의는 틀린 말이니 영패로 바꿔 써야 합니다. 그렇다고 영패를 보편적 정치 이데올로기로 격상시키는 것은 위험합니다. 오히려 영패를 ‘독재-수구-기득권-새누리-영남’을 연결하는 특수 프레임에 감금해야 합니다. 영패를 말하되, 그것의 일반화가 아니라 고립을 통해서만 영패를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오바마가 백인 인종주의가 판치는 나라에서 어떻게 권력을 창출할 수 있었는지를 되돌아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보편화가 필요한 것은 영패가 아니라 호남이 품은 민주, 인권, 평화, 그리고 정의입니다. 이런 인류의 보편적 이념 위에서 영패를 제외한 모든 정치세력이 연대할 때만 호남인의 세속적 욕망도 구체적으로 실현될 것입니다.

선생님과 마찬가지로 저는 호남인이며, 어디서나 호남인이라고 말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동시에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세계시민으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의 책임을 지금의 영남인들에게 묻고 싶지 않습니다. 그들의 가슴에서 끝없이 죄의식을 각성시키는 동안 저 자신이 독재자들이 만든 영패의 사슬에 묶이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세계시민적 관점을 가진 당당한 호남인으로서 저는 후손들의 어깨 위로 휘몰아치는 역사의 폭풍만이 아니라 보편적 이념의 강물이 넘쳐나길 바랍니다. 이를 위해 호남과 영남의 대결에 앞서 고귀한 삶을 살다 간 선조들의 정신으로 되돌아갈 것을 제안드리고 싶습니다. 이황과 함께 기대승을, 고경명과 함께 곽재우를, 전봉준과 함께 박학래를, 전태일과 윤상원을, 김대중과 함께 노무현을 떠올리면 안 되겠습니까?

김욱-장은주-홍세화-고종석 만나자

지금 한국의 야권은 패배주의에 젖어 있습니다. 기울어진 운동장 운운하다 보니 어느새 냉소와 허무가 난무합니다. 하지만 야권의 계속되는 패배는 영패가 만들어낸 기울어진 운동장 때문이 아닙니다. 패배의 진정한 뿌리는 민주주의 기초 위에서 사회적 정의를 지향하는 정치세력 사이의 이해와 소통의 부재에서 비롯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세 세력 모두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안철수는 아직 <해방전후사의 인식>조차 읽어보지 않은 것 같고, 문재인 역시 안철수가 추천한 <나를 지켜낸다는 것>에 다가서지 않은 듯합니다. 그러니 아직 희망보다 절망이 더 깊어 보이지만, 우리처럼 글 쓰는 사람들이 먼저 모여 이야기를 나누면 어떻겠습니까?

선생님도 잘 아시겠지만 최근 들어 호남의 신성화와 세속화를 둘러싼 논쟁이 뜨겁습니다. 김욱 교수와 장은주 교수가 맨 앞에서 펜을 들었습니다. 저는 홍세화 선생님과 함께 선생님 또한 각자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미 이 담론의 장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네 분과 함께 광주시민자유대학에서 정치담론의 장을 열어보고 싶습니다. 지금 서울은 정치나 경제만이 아니라 문화의 영역에서조차 담론 생산을 독점하고 있습니다. 지역은 호남이든 영남이든 상관없이 서울에서 생산된 담론의 소비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를 극복하려는 시도라 생각하시고 가능하면 광주에서 만나 서로를 이해하고 소통하며 연대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싶습니다. ‘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5월을 노래하지 말아라’ 부르짖던 김남주 시인의 말씀을 함께 받들고 싶습니다.

박구용 전남대 철학과 교수·광주시민자유대학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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