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박지원 의원(국민의당)이 이상민 위원장과 인사하고 있다. 전날 국민의당이 박 의원을 원내대표로 합의추대한 데 이어,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도 본격적으로 원내대표 경선 채비에 들어갔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토요판] 다음주의 질문
27일 국민의당이 박지원 의원을 원내대표로 선출한 것을 시작으로 새누리당이 3일, 더불어민주당이 4일 원내대표를 선출한다. 원내대표는 의원단의 대표이자 의사일정, 법안, 예산안 처리를 둘러싼 교섭단체 간 협상을 총괄하는 ‘의회정치의 꽃’이다. 4·13 총선으로 여소야대 3당 구도가 만들어지면서 원내대표의 정치력은 당대표만큼이나 중요해졌다.
첫 여소야대 국회였던 1988년 13대 국회 때를 보자. 당시 여당인 민주정의당은 299석 중 125석으로 과반 확보에 실패했다. ‘3김’이 이끌던 평화민주당(70석), 통일민주당(59석), 신민주공화당(35석)이 모두 교섭단체를 구성해 여소야대 4당체제가 만들어졌다. 당시엔 김종필 총재가 이끄는 신민주공화당의 노선이 민정당과 가까워 자칫하면 여대야소로 뒤집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의회권력이 교체된 상황에서 여당도 87년 6월항쟁이 이끈 민주화라는 시대적 과제를 거스를 수 없었다. 결국 제5공화국 정부 아래서 저질러진 비리와 5·18 광주민중항쟁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청문회가 개최되기에 이른다. 당시 국정을 주도한 건 민정당의 원내총무 김윤환, 평민당 원내총무 김원기 의원이었다. 증인·참고인 선정, 처벌 수위, 광주항쟁 희생자 명예회복과 보상 문제 등 난제가 쌓여 있었지만 이들은 밤을 새워 협상했고, 하나씩 문제를 풀어갔다. 미진한 점이 많았지만 과거 청산의 첫발을 떼는 계기가 됐다. 비록 1990년 3당 합당으로 다당제의 첫 실험은 좌초되고 양당구도가 복원됐지만, 당시의 다당제 경험은 소중한 자산으로 남아 있다.
양당체제 역시 협상과 타협이 중요하다. 그러나 일대일 구도에선 오직 상대방만 겨눠 각자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는 데 총력을 다할 가능성이 더 크다. 지지층·세력기반의 이질성 때문에 조율과 절충이 쉽지 않다. 그러나 3자가 개입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서로의 처지를 객관화시켜 바라볼 수 있는 구도가 만들어지고 조정의 공간이 생긴다. 협상의 룰이 좀더 정교해지고 치밀해질 수밖에 없다.
‘밀당의 달인’인 박지원 의원이 원내 3당인 국민의당 원내대표를 맡으면서 게임은 좀더 흥미로워졌다. 그는 캐스팅보터가 아니라 리딩 파티(선도하는 정당)를 이끌겠다고 한다. 18·19대 국회에 이어 20대 국회에서 다시 한번 야당 원내대표를 맡게 된 박 의원은 당장 국회의장 선출 등 원구성 협상부터 주도권을 쥐고 갈 태세다. 그는 원내대표 선출 직후 “박근혜 대통령이 솔직하게 지난 3년 국정 실패를 인정하고 남은 임기 2년의 성공을 위해 국회의장을 우리에게 협력해 달라고 요청한다면 국가와 국민을 위해 협의하겠다”고 운을 떼놨다. 새누리당 편을 들어주면서 상임위원회 위원장 배분에서 실속을 챙기겠다는 속내도 담겨 있다.
그러나 박 의원이 얻은 세 번째 원내대표 자리가 약이 될지 독이 될지 아직은 모른다. 국민의당 지지층은 호남, 새누리당 이탈자, 무당파 등 정체성이 다른 집단이 느슨하게 결합돼 있다. 여권에 지나치게 각을 세우면 발목잡기 세력이라고 비난받을 테고, 더민주보다 여당에 더 가까이 다가가면 ‘새누리당 2중대’라는 욕을 먹기 쉽다.
중요한 건 총선 민심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다. 새누리당은 일방적 당청 관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자각을 가져야 하고, 더민주와 국민의당은 정권의 실정에 맞서 어떻게 ‘협력적으로’ 경쟁할 것인가를 모색할 때다. 20년 만에 다당체제를 만든 유권자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길이 무엇인지 그들 역시 모르지 않을 테니까.
이유주현 정치에디터석 디지털데스크 edigna@hani.co.kr
이유주현 정치에디터석 디지털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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