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대선에서 세번째 패배한 김대중은 전격적인 정계은퇴 선언을 하고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객원교수로 ‘자진 유배’를 떠났다. 이듬해 1월26일 김포공항에서 민주당원을 비롯한 지지자들의 충격과 눈물에 둘러싸인 김대중이 출국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92년 12월15일 14대 대통령 선거를 사흘 앞두고 국민당 선거대책본부장 김동길이 ‘초원 복국집 사건’을 폭로했다. ‘초원 복국집 사건’은 나흘 전인 12월11일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날 아침 전 법무부 장관 김기춘이 부산 지역 기관장들을 모아 ‘지역감정을 일으켜 김영삼을 당선시키자’는 내용으로 선거대책모임을 열었다. 이 모임의 참석자는 김기춘 외에 부산시장 김영환, 부산경찰청장 박일룡, 안기부 부산시지부장 이규삼, 부산지구 기무부대장 김대균, 부산시교육감 우명수, 부산지검장 정경식을 포함한 아홉 명이었다.
김기춘은 그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 김대중이나 정주영이가 어쩌고 하면 부산·경남 사람들 영도다리에 빠져 죽자. 하여튼 민간에서 지역감정을 좀 불러일으켜야 돼.” 김기춘은 이런 말도 했다. “부산·경남·경북까지 요렇게만 딱 단결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 5년 뒤에는 대구 분들하고 서울 분들하고 다툼이 될는지, 그때 대구 분들 우리에게 손 벌리려면 지금 화끈하게 도와주고… 안 그렇습니까?” 그 자리에서 김기춘이 “노골적으로 해도 괜찮지 뭐. 우리 검찰에서 양해할 거야. 아마 경찰청장도 양해…”라고 말하자, 박일룡은 “양해라뇨? 제가 더 떠듭니다”라고 맞장구쳤다. 고위 공직자들이 특정 후보 선거운동을 하고 그것도 모자라 지역감정을 조장할 계략을 꾸민 것이었다.
김영삼은 12월17일 기자회견을 열어 이렇게 주장했다 “부산사건은 민자당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다. 이번 사건으로 인한 최대 피해자는 나 자신이다. 대화 내용을 녹음한 것 자체가 공작정치다. 불법적인 도청을 뿌리 뽑아야 한다.” 거대 언론을 등에 업은 김영삼은 사건의 본말을 뒤집어버렸다. 언론은 도청이 문제라고 국민당을 몰아세웠다. 선거는 지역감정을 일으키려는 사람들 뜻대로 흘러갔다.
대통령선거 투표일인 1992년 12월18일 이희호와 김대중은 아침 일찍 투표를 마치고 임진각 통일동산을 찾았다. 저녁에 시작된 개표는 지역대결 양상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초원 복국집 사건’은 여당의 바람대로 역풍을 불러일으켰다. 개표 결과는 김영삼 997만여표(42%), 김대중 804만여표(33.8%), 정주영 388만여표(16.3%), 박찬종 151만여표(6.4%)였다. 김대중은 세 번째 도전에서도 패배했다.
승부를 가른 건 경상도 지역의 몰표였다. 김영삼이 부산·경남과 대구·경북에서 얻은 표는 474만7184표, 김대중이 광주·전남과 전북에서 얻은 표는 281만4226표였다. 193만2958표 차이였다. 이 차이는 김영삼과 김대중의 전국 총득표 차이 193만5956표에 2998표가 모자라는 것이었다. “결국 지역감정이 선거 결과를 결정했지요. 사실 남편은 지역장벽을 극복하려고 이런저런 노력을 다했어요. 1990년 영광·함평 보궐선거에서는 이수인 영남대 교수를 후보로 공천해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시키기도 했어요. 그런 노력도 헛수고였지요. 선거가 끝난 뒤에 광주의 어느 신문은 ‘김대중씨가 강원도에서만 태어났어도 이미 대통령이 됐을 것’이라고 했어요. 허탈한 마음을 가눌 길 없었지요.”
12월18일 저녁 개표 윤곽이 드러나자 김대중은 11시쯤 당사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남편은 잠자리에 들었다가 새벽에 일어났어요.” 김대중은 잠을 못 이루는 이희호에게 말했다. “다시 국민의 마음을 얻지 못했소. 내가 할 일은 여기까지인 것 같소. 마음을 정리하려고 하는데 당신도 동의해줬으면 좋겠소. 이제 정계를 떠나려고 하오. 내가 말하는 것을 받아써 주시오.” 이희호는 할 말을 잃었다. “남편이 구술하고 내가 받아적었어요. 정서를 하는데 눈물이 주르륵 종이 위에 떨어졌지요.” 이희호가 계속 흐느끼자 김대중이 이희호의 손을 잡았다. “여보, 우리 사형 선고 받았을 때 생각하면 이 정도는 웃을 일 아니오?” 김대중이 오히려 이희호를 위로했다. “그래도 눈물이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내렸지요.”
1992년 12월15일 ‘초원복국집 사건’
지역감정 역풍탓 세번째 대선 고배
“디제이 강원도에서만 태어났어도…”
12월19일 김대중 정계은퇴 선언
93년 1월26일 영국 연수길에 올라
“남편은 공부 재미에 행복해 보였죠”
7월초 159일만에 귀국 수천명 환영
“유배지서 희망·자신 갖고 돌아왔다”
선거 다음날인 12월19일 오전 8시30분 김대중이 민주당사로 들어섰다. 당원들이 울음을 터뜨렸다. 김대중이 민주당 당적까지 포기하겠다고 하자 사무총장 한광옥, 비서실장 조승형이 “그것만은 안 된다”며 울었다. 김대중은 정계은퇴 성명을 읽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또다시 국민 여러분의 신임을 얻는 데 실패했습니다. 저는 이것을 저의 부덕의 소치로 생각하며 패배를 겸허한 심정으로 인정합니다. (…) 저는 오늘로써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평범한 시민이 되겠습니다. 이로써 40년의 파란 많았던 정치생활에 사실상 종말을 고한다고 생각하니 감개무량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그간 국민 여러분의 막중한 사랑과 성원을 받았습니다. 국민 여러분의 하해 같은 은혜를 하나도 갚지 못하고 물러나게 된 점 가슴 아프고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김대중의 은퇴선언은 당원과 지지자를 놀라게 했다. “집으로 편지와 전화가 쇄도했어요. 다들 서러워하고 분통을 터뜨렸지요. 그 뒤로 송별 모임이 여러 곳에서 열렸는데 그때마다 눈물이 쏟아졌어요. 그렇게 애를 썼는데 뜻이 이루어지지 않은 걸 생각하면 눈물이 나서 견딜 수 없었지요.”
이듬해 1월2일 추기경 김수환이 동교동을 방문했다. “추기경님이 우리를 위로해주셨지요.” 김수환은 대통령 선거에 승리한 김영삼이 당선 인사를 하러 찾아오자 솔직하게 말했다. “좀 섭섭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저는 다른 후보를 찍었습니다.” 김수환은 그 뒤 언론 인터뷰에서도 “김대중씨가 대통령이 된다면 지역감정 문제가 크게 완화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찍었다”고 밝혔다. 1월6일 김대중의 생일에 민주당 사람들이 마련한 점심 자리에서 김대중은 자기 안의 응어리를 털어놓았다. “남편은 감옥에 가고 정치적 박해를 받는 것보다 누명을 쓰는 것을 더 괴로워했어요. 사상이 의심스럽다느니 돈을 쌓아 두었다느니 하는 말을 수없이 들었지요. 그런 말에 현혹돼 국민들이 남편을 무작정 비난할 때마다 피눈물을 쏟았어요. 그날 남편은 그런 속마음을 다 이야기했지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초청장이 왔다. “처음에 남편은 미국으로 유학을 갈까 생각하기도 했는데, 조금이라도 더 국내 정치에서 떨어져 있으려고 영국으로 가겠다고 결심했지요. 영국에서 독일 통일과 유럽 통합을 주제로 삼아 연구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1월26일 김대중은 영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나는 살림 준비를 하려고 박금옥 비서와 함께 일주일 먼저 영국으로 떠났어요. 그 뒤에 남편이 케임브리지로 왔지요.” 케임브리지는 런던에서 북쪽으로 80여㎞ 떨어진 인구 10만명의 대학도시였다. 도시 가운데를 흐르는 캠 강을 따라 단과대학 31곳이 자리잡고 있었다. “우리는 남편의 연구실에서 가까운 2층 아파트 ‘파인허스트 로지’에 들어갔어요. 방이 세 개 딸려 있었어요.”
김대중은 클레어홀대학의 객원연구원으로 강의와 연구를 시작했다. 클레어홀은 숙소에서 오가는 데 10분가량 걸리는 곳에 있었다. 케임브리지대학 부총장은 “옥스퍼드에서는 빌 클린턴이 공부를 했고, 이제 우리 대학에는 김대중 선생이 왔다”고 환영사를 했다. “남편은 모스크바대학에서 평생 명예교수직을 받았는데, 그래서 다들 ‘김대중 교수’라고 불렀어요.” 김대중은 케임브리지에서 <제3의 길>을 쓴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 민주주의 연구의 권위자 존 던 같은 학자들과 교류했다. “남편은 여러 학자들을 만났어요. 정치 현장에 있을 때보다 훨씬 행복해 보였지요. 남편은 이렇게 유서 깊은 대학에서 공부해보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대통령이 됐으면 이런 곳에서 공부할 기회가 있었겠느냐는 말도 했어요.”
김대중은 케임브리지 말고도 옥스퍼드대학, 런던대학, 왕립국제문제연구소(채텀하우스)에서 강연했다. 옥스퍼드에서 강연할 때 일본 유학생 한 명이 김대중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2차 세계대전 때 점령당했던 프랑스는 독일과 잘 지내는데 왜 한국은 과거에 얽매여 아직도 일본과 화해를 하지 않는가?” 장내가 조용해졌다. 김대중이 대답했다. “독일이 일본처럼 프랑스의 말과 글, 성을 빼앗고 민족말살을 하려고 했는가? 일본처럼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사과를 회피했는가? 국민에게 과거의 잘못을 가르치지 않고 교과서를 왜곡했는가? 일본의 태도가 독일과 확연히 다른데 어떻게 과거를 덮을 수 있겠는가?” 김대중의 답변에 박수가 터졌다. “강의가 끝난 뒤에 그 일본 유학생이 남편에게 다가와서 사과했어요. 그런 역사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요.”
1993년 6개월간의 영국 케임브리지 생활 동안 김대중과 이희호는 마침 이웃에 살던 스티븐 호킹 박사와 가까이 지냈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이희호와 김대중은 케임브리지대학 석좌교수인 천체물리학자 스티븐 호킹과도 친구가 됐다. “우리가 사는 곳 복도 맞은편에 호킹 박사가 살았어요. 그래서 거기 사는 동안 자주 만났지요. 호킹 박사와 남편은 구면이었어요. 1991년에 호킹 박사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영국대사관 초청으로 남편과 한 테이블에서 이야기한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 남편이 우주의 생성과 미래, 우주와 인류의 관계 같은 질문을 많이 했는데, 호킹 박사가 강한 인상을 받았던가 봐요. 정치인이 그런 질문을 하니까요. 그래서 영국에 갔을 때 호킹 박사가 우리를 아주 반갑게 맞아주었지요.”
김대중과 호킹은 서로 집을 오가며 대화했다. “호킹 박사는 근육이 위축되는 루게릭병 때문에 손가락밖에 움직이지 못해요. 그 손가락으로 휠체어 앞에 붙은 컴퓨터 자판을 누르면 말이 나와요. 그런데도 항상 웃음 가득하고 사람들에게 친절했어요. 그런 몸으로 뉴턴·아인슈타인에 버금가는 물리학 업적을 이뤄낸 것에 우리는 감동했지요.” 김대중과 호킹은 생각이 잘 통했다. “남편이나 호킹 박사나 유머감각이 넘친다는 게 공통점이에요. 어려운 현실을 잘 이겨내는 낙관적인 사고방식도 비슷하고요.”
1993년 7월4일 김대중과 이희호는 대선 패배의 눈물과 회한을 안고 떠났던 영국에서 일정을 앞당겨 6개월 만에 귀국했다. 김포공항에 마중 나온 이기택(맨 오른쪽) 민주당 총재 등 지지자들의 환호에 김대중이 두 손을 들어 인사를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희호와 김대중은 영국에 있으면서 유럽 여러 나라를 방문했다. 2월에는 베를린사회과학센터가 주최한 ‘독일 통일 문제 토론회’에 참석해 ‘분단 한국, 통일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네덜란드 헤이그의 이준 열사 묘지를 찾아가 참배하기도 했다. “이준 열사는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해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고 을사늑약이 무효라는 사실을 알린 분이에요. 우리가 묘지에 찾아갔을 때 거기에 꽃이 놓여 있었어요.”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열린 24개국 지도자 회의에서 김대중과 이희호는 포르투갈 대통령 마리우 소아르스를 만났다. “소아르스 대통령은 열두 차례나 투옥당하고 프랑스 망명까지 갔던 분이지요.” 두 사람은 모스크바·헝가리·루마니아도 방문해 공산주의 붕괴 이후의 삶을 관찰했다.
김대중과 이희호는 독일도 여러 차례 방문했다. 독일 통일의 현장을 살피려는 것이었다. 동독 마지막 총리를 지낸 로타어 데메지에르는 이렇게 충고했다. “우리 동독은 통일을 너무 서두르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한국은 흡수통일이 아닌 단계적이고 점진적인 통일을 이루는 게 좋을 것입니다.” 독일 대통령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도 비슷한 충고를 했다.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지만 마음의 장벽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질성을 극복하려면 적어도 30년은 걸릴 것입니다.” 통일 독일 현장학습은 소득이 컸다. “독일은 통일이 됐지만 사실상 ‘1국가 2사회’였어요. 흡수통일로 후유증을 심하게 앓고 있었지요. 남편은 통일 독일이 겪는 어려움을 보면서 앞으로 무엇을 할지 확신이 섰다고 했어요.”
영국에 있는 동안 일본 <엔에이치케이>(NHK) 방송에서 김대중을 찾아와 일대기를 만들자는 제안을 했다. “홋타 긴고 피디가 그런 제안을 했어요. 남편을 설득해 결국 동의를 받아냈지요. 홋타 피디는 유럽 대륙 방문에 동행하면서 인터뷰를 했어요. 그 일대기는 1993년 9월에 나흘 동안 일본에서 방영됐는데, 1500만명이 시청했다고 해요.” 김대중은 영국에서 자전 에세이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도 집필했다. “출판사 김영사의 박은주 사장이 어느 날 영국으로 날아와서 책을 쓰자고 권했어요. 젊은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고요. 수학자 김용운 교수도 함께 와서 설득했지요. 그래서 구술을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남편이 원고를 직접 썼어요. 그 책은 우리가 귀국한 뒤에 출간돼 베스트셀러가 됐지요.”
케임브리지에 있던 시절 이희호와 김대중이 사귄 친구들 중에는 로빈이라는 새도 있었다. “남편은 동교동 집에 있을 때 날마다 참새들에게 모이를 주었어요. 영국에 와서도 빵부스러기나 쌀을 매일 뿌려 주었어요. 새들 중에 좀 큰 새가 한 마리 있었어요. 항상 혼자 와서 모이를 쪼아 먹고는 훌쩍 떠나요. 가슴에 붉은 털이 있는 새인데, 제네바에 들렀을 때 어떤 부인에게 그 새 이야기를 했더니 ‘로빈’이라고 알려주었어요. 영국을 떠날 때 그 새와 헤어지는 것이 참 아쉬웠지요.”
1993년 6월 부부는 영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길에 이스라엘에 들렀다. 요르단강 보트 위에서 김대중은 70년대 옥바라지 시절부터 관절염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이희호의 손을 주물러주었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93년 6월 말 학기가 끝났다. “남편은 처음엔 1년쯤 공부할 생각이었지만 북한 핵 문제가 떠오르고 한반도 긴장이 높아지자 돌아갈 생각을 했어요. 남편이 떠날 때 클레어홀대학에서 남편을 교수회의 평생회원으로 선출했어요. 또 우리가 묵던 아파트 이름을 ‘파인허스트 로지’에서 남편 이름을 따 ‘킴스 로지’(김대중의 집)로 바꾸었어요. 아파트 현판을 바꿀 때 엘리자베스 여왕 남편 필립 공이 참석했지요.” 1993년 7월4일 이희호와 김대중은 귀국했다. 영국으로 떠난 지 159일 만이었다. 서울 땅을 밟는 날 김포공항에는 수천명의 환영인파가 나와 두 사람을 맞았다. 김대중은 인사말을 했다. “6개월 전 이 공항을 떠날 때는 유배지로 가는 심정이었으나 이제 그런 고통은 없습니다. 남은 인생에 대한 확고한 설계와 희망과 자신을 갖고 돌아왔습니다.”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