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북한 주석의 사망 직후인 1994년 7월18일, 청와대에서 열린 김영삼 대통령과 14개 대학 총장의 오찬에서 박홍 당시 서강대 총장은 이렇다 할 근거 없이 “주사파 배후에 북한이 있다”고 말해 대대적인 주사파 색출 광풍의 계기를 제공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김일성 북한 주석의 사망 직후인 1994년 7월18일, 청와대에서 열린 김영삼 대통령과 14개 대학 총장의 오찬에서 박홍 서강대 총장이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김일성 주석은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을 코앞에 두고 그해 7월8일 돌연 심장마비로 숨졌다. 남한에선 안보 불안심리 증폭과 함께, 정부 차원의 조문을 해야 하는지를 놓고 뜨거운 논란이 불붙고 있었다. 청와대 오찬에서 대학 총장들은 일부 학생의 분향소 설치와 추모 대자보 게시 등을 우려하는 발언을 쏟아냈다. 박홍 총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주사파와 우리식 사회주의가 제한된 학생들이긴 하지만 생각보다 깊이 침투해 있다. 북한은 학원에 테러조직 등 무서운 조직까지 만들어 놓았다. 선량한 학생들은 사상적 방황을 하다가 주사파에 말려든다. 베이징에서 김일성대학 학생회장을 만난 일이 있는데, 남한 학생들의 공산화는 시간문제라고 호언했다. 일부 학생은 남조선 해방을 위해 가을에 또 이슈를 만들어 나올 것이다. 우루과이라운드 비준 반대와 미군기지 반납 서명운동을 벌일 것이다. 북에서 이미 지시를 했다. 내가 증거를 갖고 있다. 주사파 뒤에는 사노맹이 있고, 사노맹 뒤에는 북한 사노청, 그 뒤에는 김정일이 있다. 학생들은 팩시밀리를 통해 직접 지시를 받고 있다.”
“운동권, 팩스로 북 지시 받아”
이튿날 <경향신문>과 <동아일보> 등 주요 일간지 1면을 박홍 총장 발언이 장식했다. <경향신문>의 1면 머리기사 제목은 “일부 운동권 김정일 장악 아래 있다 - 팩스로 북 지시 받아”였다. 김일성 주석 사망과 맞물리면서 남한 사회엔 ‘주사파 색출 광풍’이 몰아쳤다. 정부는 공안수사기관 인력과 조직을 대폭 확대했다. 전국 대학 총장들은 박홍 총장 지지와 학원 내 친북세력 근절을 다짐하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한바탕 소동이 일었지만, 실질적인 성과물은 없었다. 애초에 박 총장 발언의 구체성이 떨어졌던데다 사실 관계도 정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령 주사파 배후로 지목한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은 사회주의 혁명을 추구하긴 했지만 북한식 사회주의와 주체사상엔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던 그룹이었다. 운동 노선으로 보면, 엔엘(NL)과 대립하는 피디(PD: People’s Democracy, 민중민주주의) 계열이었다.
하지만 여파는 컸다. 진보 진영 내부에서 ‘쉬쉬’하던 주사파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운동권, 특히 학생운동권 일부가 북한 주체사상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지만 이걸 어떻게 볼지 드러내놓고 얘기하려 하진 않았다. 역설적으로 박홍 총장의 무모한 발언이 운동권 내부에서 ‘주체사상과 주사파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했다. 더 중요한 건, 이 파문으로 ‘엔엘=주사파’라는 인식이 일반 국민에게 각인됐다는 점이다. 그 이전까지 ‘주사파’는 운동권 내부에서만 주로 언급하던 단어였다. 이제 ‘주사파(주체사상파)’는 1986년 이후 남한 사회운동을 주도했던 엔엘을 특징짓는 키워드로 많은 사람들에게 인식됐다.
그러나 ‘엔엘=주사(주체사상)’는 아니다. 주체사상의 혁명이론이 ‘엔엘피디아르’(NL-PDR: National Liberation People’s Democracy Revolution,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혁명론)이지만, 마치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되듯이 북한의 주체사상과 남에서 받아들인 엔엘 사조는 확연히 달랐다. 북한은 주체사상을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버금가는, 아니 그걸 더욱 발전시킨 새로운 철학체계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실제로 남한 운동권에서 힘을 발휘한 건 ‘철학과 사상으로서의 주체’가 아니라 운동가의 올바른 태도를 적시한 실천적 지침이었다. ‘품성론’이 바로 그랬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엔엘에 빠져들었던 학생들은 대부분 “품성론이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1986년 여름 서울에서 내려온 어느 학교 대표로부터 <강철서신>과 북한 방송 녹취록을 받아 처음 읽었다는 전남대 출신의 한 인사(84학번)는 “북한 방송 문건은 사실 내용 면에서 그리 큰 감흥은 없었다. 매력적이었던 건 품성론이었다. 혁명이론보다 의리와 헌신, 성실함이 더 중요하다는 품성론은 충격적이고 감동적이었다”고 말했다. ‘사투’라고 부르던 운동권의 극심한 사상투쟁(이론투쟁)이 학생들을 “고민 끝, 실천 시작”(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의 표현)의 품성론으로 급격하게 쏠리게 하는 단초를 제공했다.
1994년 여름 김일성 주석 사망 뒤
남한 사회 덮친 ‘주사파 색출 광풍’
‘주사파 어떻게 볼까’ 논쟁 계기
‘NL=주사파’ 대중 인식 굳어져
운동권 내부는 ‘품성론’ 영향 강해
주체사상 뿌리는 만주 항일투쟁
남한 운동 주도권 문제로 귀결
‘수령론’ 수용 여부가 최종 갈림길
주사파 범위 어디까지 볼지는 논란
“북한 노동당 추종 한정하면 소수”
‘80년대의 사회변혁 운동과 주체사상’(1989년)이란 논문을 쓴 김재기 경성대 교수(철학)는 ‘품성론’이 주체사상의 핵심이 아닌데도 너무 지나치게 강조되어 남한 운동권에서 받아들여졌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엔엘 사조를 따랐던 사람들이 주체사상의 철학적 체계를 제대로 이해했을까 하는 점엔 회의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1986년 (엔엘 그룹의 학생 투쟁조직이던) 자민투 기관지 <해방선언>을 보면, ‘사상이란 조국과 민중에 대한 뜨거운 사랑, 적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 운동 승리에 대한 강철 같은 신념, 그리고 백전 불굴의 투지로 표현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사상’에 대한 이런 식의 이해는 그 뒤에도 거의 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엔엘’은 1930년대 혹독한 항일 무장투쟁 과정에서 맹아를 틔운 주체사상의 초기 성격과 맞닿는 측면이 있었다.
남한 정권 정통성에 대한 회의
일제하 독립운동을 전공한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주체사상은 1930년대 김일성의 (항일 무장투쟁) 실제 경험과 고난에서 나온 건데, 1960년대 이후에 북한 정권이 너무 멋있게 포장해버렸다. 1930년대 코민테른은 ‘일국일당’(一國一黨) 원칙을 내세워 만주의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에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할 것을 요구했다. 중국공산당은 ‘중국 혁명을 하면 조선 혁명은 저절로 이뤄진다’며 조선 혁명의 독자성을 부정했다. 만주에서 항일 투쟁을 이끌던 김일성은 조선 혁명의 독자성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이게 ‘주체’를 탄생시킨 배경이라 할 수 있다. ‘자력갱생’이나 ‘사람 중심’이란 주사의 핵심 원리도 그 당시의 열악한 상황, 곧 돈도 물질도 자원도 없으니 믿을 건 사람밖에 없고 모든 걸 우리가 의지로 극복해야 한다는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난관을 극복하는 삶의 태도로 보면 훌륭한 것인데, 이걸 사상이나 철학체계로까지 격상시키려다 보니까 문제가 생겼다.”
김일성의 항일운동 전력은 ‘북한’이란 금단의 문을 여는 열쇠 구실을 했다. 1980년대 들어서 마르크스와 레닌의 저작들이 은밀하게 대학가에 퍼졌다고 해도, 여전히 뿌리 깊은 반북 이데올로기가 굳건하던 시절이었다. 초기에 엔엘을 받아들인 학생들은 공통적으로 “북한이 어떤 사회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최소한 남한 독재정권보다는 정통성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강철서신> 저자 김영환씨는 “강철서신을 쓸 때까지만 해도 주체사상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고 말하긴 어렵다. 다만, 북한 정권의 정통성이 이승만·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남한 정권에 비해선 더 있는 게 확실하다는 생각은 했다. 그리고 북한과 손을 잡지 않고서는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1986년 이후 남한 학생들이 접한 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에 의해 집대성된 ‘주체사상’이었다. 김정일의 <주체사상에 대하여>(1982년)는 주사를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문건으로 널리 읽혔다. 이 문건은 역시 김정일이 썼다는 <맑스-레닌주의와 주체사상의 기치를 높이 들고 나가자>(1983년), <주체사상 교양에서 제기되는 몇가지 문제에 대하여>(1986년)와 함께 ‘주사 3대 필독서’로 운동권 내부에선 꼽혔다. 물론 이 문건을 모두 김정일 위원장이 직접 썼는지는 의심스럽다. 1997년 남한으로 망명한 북한 노동당 비서 출신의 황장엽씨는 “이들 문건은 내가 기초를 해서 노동당 선전국에 넘겼다”는 취지의 진술을 했다고 한다.
1930년대 항일 무장투쟁 시절의 경험과 1960년대 이후 김정일에 의해 유일사상으로 격상된 주체사상이 수십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동시에 1980년대 남한 사회에 유입된 건 기묘한 현상이었다. 이 점이 수많은 논란과 비판에도 불구하고 ‘엔엘’이 남한 사회운동의 주류를 점할 수 있던 이유였고, 또한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대중으로부터 고립되며 교조화할 수밖에 없는 배경이기도 했다. 조국 서울대 교수(법학전문대학원)는 “주사와 비주사를 가르는 핵심 기준은 결국 남한 변혁운동의 주도권이 어디 있느냐, (남한 운동권이) 북한 조선노동당의 지도를 받아들이느냐 하는 문제였다. 엔엘 주사파는 북한 노동당의 지도를 따라야 한다는 입장인데, ‘식민지반봉건사회론’에서 드러나듯 한국 사회를 보는 시각이 정확했다고 보기 어렵다. 그런 (부정확한 인식의) 절대 권위를 인정하는 방식으론 세력을 확장해 나갈 수 없었다”고 말했다.
김일성 북한 주석은 역사적인 첫 남북 정상회담을 코앞에 둔 1994년 7월8일 심장마비로 돌연 사망했다. 7월9일자로 발행된 <한겨레> 호외. <한겨레> 자료사진
김정일은 <맑스-레닌주의와 주체사상의 기치를 높이 들고 나가자>에서 주체사상을 이렇게 규정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조선혁명을 령도(영도)하시는 과정에 주체사상에 기초하여 혁명과 건설에 나서는 모든 문제에 과학적인 해답을 주시었으며 주체의 사상, 리론(이론), 방법을 전면적으로 체계화하시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밝히신 사상, 리론, 방법은 모두 주체의 원리로부터 출발하고 그것을 구현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김일성 동지의 사상, 리론, 방법을 주체사상이라 말한다.”
혁명을 이끄는 방법이 바로 ‘영도’의 문제였다. 주체사상이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다른 점이 혁명 과정에서 ‘영도’의 중요성을 체계화했다는 점이라고 북한은 설명했다. 김정일은 <주체사상에 대하여>에서 “혁명운동, 공산주의 운동에서 지도 문제는 다름 아닌 인민대중에 대한 당과 수령의 영도 문제”라고 주장했다. “당의 영도가 수령의 영도로 되는 것은 수령이 근로인민대중의 지도적, 향도적 역량인 당의 최고 영도자로서 혁명과 건설에서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고 결정적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수령과 후계자의 유일적 영도를 받아들이는 게 주체사상의 핵심이었다.
‘주사’와 ‘비주사’의 갈림길
여기서 남한 운동권의 반향이 뚜렷하게 갈렸다. ‘품성론’만으로는 주체사상의 정수를 받아들인다고 할 수 없었다. 수령론을 받아들일 것인가, 북한 노동당을 남한 변혁운동의 지도부로 인정할 것인가가 엔엘 내부에서도 ‘주사’와 ‘비주사’를 가르는 선이 됐다. 김재기 경성대 교수는 “엔엘 가운데 ‘주사’(주사파)를 어느 범위까지 보느냐를 놓고 논란이 많았다. 주체사상에 포함된 넓은 의미의 민족문제에 대한 각성, 그걸 풀어가기 위한 전략전술과 통일 염원, 이런 정서와 논리까지 폭넓게 주사에 포함시킨다면, 주사파가 (엔엘 운동권의) 다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 노동당과 김정일을 추종하고, 그걸 명료하게 자각하고, 의식적으로 추구한 사람으로 한정한다면, 소수였다”고 말했다.
소수임에도 주사파는 엔엘 운동권 전체에 커다란 영향력을 끼쳤다. 그 영향은 1990년대를 관통해 2000년대까지 이어졌다. 이것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주사를 삶의 올바른 태도 정도로 받아들였으면 문제가 없는데, 그걸 (남한 변혁운동의 지도이념으로) 추앙하려다 보니까 비극이 생겼다”고 말했다.
박찬수 논설위원
pcs@hani.co.kr
▶ 박찬수 <한겨레> 논설위원. 1989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해 청와대 출입기자와 워싱턴 특파원, 정치부장, 편집국장을 지냈다. 저서로 청와대와 백악관의 권력작동 방식을 비교한 <청와대 vs 백악관>(2009년)이 있다. 82학번으로 5공 시절 군에 강제징집됐다 돌아와 보니 대학가가 온통 엔엘(NL) 열풍에 휩싸였던 기억을 갖고 있다. 사회부 신참기자 시절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를 취재하며 무엇이 수많은 학생들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의문을 가진 게 20여년이 지나 이 시리즈를 쓰는 계기가 됐다. 격주로 연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