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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민족주의, 거대한 블랙홀

등록 2016-07-22 19:50수정 2016-07-22 19:56

[토요판] 박찬수의 NL현대사
(7) NL과 주사파 - 2
1990년대엔 ‘자주’와 ‘하나의 민족’과 같은 단어들이 사람들의 민족주의 정서를 강하게 파고들었고, 1960년 4·19혁명 직후 나왔던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와 같은 감성적 구호들도 수십년 만에 부활했다. 1993년 6월12일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소속 대학생 3000여명이 연세대에서 ‘남북청년학생 자매결연 예비회담 출정식’을 열고 판문점으로 떠나기에 앞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1990년대엔 ‘자주’와 ‘하나의 민족’과 같은 단어들이 사람들의 민족주의 정서를 강하게 파고들었고, 1960년 4·19혁명 직후 나왔던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와 같은 감성적 구호들도 수십년 만에 부활했다. 1993년 6월12일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소속 대학생 3000여명이 연세대에서 ‘남북청년학생 자매결연 예비회담 출정식’을 열고 판문점으로 떠나기에 앞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1980년대는 군부독재의 폭압 통치가 마지막 기승을 부린 시대였다. 그에 맞서 학생운동권의 이론적, 실천적 대응 양식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기이기도 했다. 1984년부터 마르크스와 레닌 원전들이 은밀하게 나돌기 시작했다. <자본론>과 같은 마르크스 원전은 워낙 방대해서 쉽사리 접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무엇을 할 것인가>를 비롯한 레닌 저작들은 팸플릿 형태로 실제 운동에 필요한 실천적 내용을 담고 있어 학생운동권에 빠르게 확산됐다. <모순론> <실천론> 등 마오쩌둥 저작과 체 게바라나 프란츠 파농 등 제3세계 혁명가들의 활동을 담은 책도 출판물이나 복사물 형태로 이미 돌려보고 있었다. 김학준 선생은 <러시아 혁명사>에서 19세기를 ‘혁명이라는 단어가 젊은이들의 피를 끓게 하던 시절’이라고 했지만, 1980년대 한국의 대학가가 그랬다. 군부독재를 무너뜨리고 불합리하고 불평등한 사회를 완전히 뒤집어 엎겠다는 다양한 혁명론이 분출했다.

혁명론의 차이는 현실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했다. 한국 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 곧 한국 사회 성격 규정을 둘러싼 논쟁이 시작됐다. 1985년 10월 <창작과 비평>에 실린 두 논문이 1차 사회구성체(사구체) 논쟁을 촉발했다. 재야 경제학자 박현채 선생의 ‘현대 한국사회의 성격과 발전단계에 관한 연구’와 이대근 성균관대 교수의 ‘한국 자본주의의 성격에 관하여-국가독점자본주의론에 부쳐’였다. 박현채 선생은 한국 사회가 국가의 적극적 경제 개입을 특징으로 하는 국가독점자본주의 단계에 와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이대근 교수는 한국 사회가 세계자본주의 중심부에 예속된 주변부 자본주의라서 노동자 계급의 성장이 어렵다고 주장했다. 국가독점자본주의론 대 주변부자본주의론의 대립이었다. 논쟁은 1960년대 산업화 이후 노동자 계층의 급격한 증가가 실증적으로 확인되면서 ‘국가독점자본주의 이론’의 승리로 끝난 것처럼 보였다.

‘자주’와 ‘하나의 민족’

이 대립은 더 큰 논란과 실천적 대립을 담은 논쟁의 서막에 불과했다. 1986년 엔엘(NL: National Liberation, 민족해방) 사조의 확산과 함께, 엔엘의 사회구성체론인 ‘식민지반봉건 사회론’(식반론)을 둘러싼 2차 논쟁이 불붙었다. 1차 논쟁이 학계에서 발화했다면, 2차 논쟁은 운동 현장에서 점화돼 학계로 옮겨붙는 양상이었다. 한국 사회가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라 일제 강점기와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식민지반봉건 사회’라는 주장은 학계엔 충격이었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사사방) 저자)는 “식민지반봉건 사회론은 1930년대 동아시아 공산주의자들이 자국 사회를 보는 기본 시각이었다. 북한은 남한을 미 제국주의 식민지로 봤으니 자본주의 발전을 인정하기 어려웠을 테고, 또 남한 자본주의를 제대로 분석하지도 않았으니 반세기 전 이론을 그대로 남한에 적용했던 것이다. 이론적으론 설득력이 떨어지는 식반론이 힘을 발휘한 건, 실천적으로 반미-통일의 민족주의 경향과 맥을 같이했기 때문이다. 마치 윈도에 얹힌 (인터넷 웹브라우저) 익스플로러가 넷스케이프를 압도한 것과 같다. 그러나 너무 시대에 뒤떨어져 나중엔 엔엘 스스로 ‘식민지반자본주의론’으로 이름을 바꿔야 했다”고 말했다.

1985년 1차 사회구성체 논쟁의 주인공이었던 고 박현채 조선대 경제학과 교수. 당시 재야 경제학자이던 박현채 교수는 ‘현대 한국사회의 성격과 발전단계에 관한 연구’란 글에서 한국 사회가 국가의 적극적 경제 개입을 특징으로 하는 국가독점자본주의 단계에 와 있다고 주장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5년 1차 사회구성체 논쟁의 주인공이었던 고 박현채 조선대 경제학과 교수. 당시 재야 경제학자이던 박현채 교수는 ‘현대 한국사회의 성격과 발전단계에 관한 연구’란 글에서 한국 사회가 국가의 적극적 경제 개입을 특징으로 하는 국가독점자본주의 단계에 와 있다고 주장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그 무렵엔 이론의 취약함이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중요한 건 한국 사회의 인식이고, 실천이었다. ‘식민지반봉건 사회론’은 당시 운동의 방향과 과제를 명확히 설정하는 데는 매우 효과적이었다. 이 이론에 따르면 한국 사회는 미국의 경제적·군사적 이익에 종속되어 자본주의적 발전이 차단되고 민주주의 실현도 막혀버렸다. 따라서 반미 자주화 투쟁을 반독재 민주화 투쟁과 함께 전면에 내세워야 하며, 그 주체는 노동자뿐 아니라 학생과 농민, 소상공인, 소시민, 민족자본가까지를 모두 포괄한다고 주장했다. 레닌 이론을 쫓아 노동계급 중심의 혁명을 꿈꿨던 피디(PD: People’s Democracy, 민중민주) 그룹과는 완전히 다른 견해였다. 1980~90년대의 ‘민주대연합론’은 여기서 발아했다.

‘반미’와 ‘통일’은 동전의 양면처럼 엔엘의 성격을 드러내는 핵심 포인트가 됐다. ‘자주’와 ‘하나의 민족’은 민족주의의 또다른 표현이었다. 엔엘은 사람들의 민족주의적 정서를 강하게 자극했다. 1960년 4·19혁명 직후 나왔던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와 같은 감성적 구호들이 수십년 만에 부활했다. 민족주의는 엔엘 사조에 강한 파급력과 질긴 생명력을 불어넣은 가장 중요한 기둥이었다.

두번째 기둥은 대중노선이었다. 투쟁 수위와 방법, 슬로건을 대중 시선에 맞춰서 내놓았다. 일반인이 이해하기 힘든 ‘파쇼 타도’라는 용어 대신에 ‘독재 타도’라는 슬로건을 주창한 건 그런 사례였다. 1986년 고려대에선 전두환 정권의 본질을 ‘파쇼’로 표현할지 ‘독재’로 표현할지를 놓고 학생 지도부가 10시간 가까운 논쟁을 벌일 정도로, 슬로건은 매우 민감한 문제였다. 1987년 6월항쟁 시기에 학생운동권이 ‘개량주의’라는 비판에도 “군부독재 타도, 직선개헌 쟁취”라는 야당 구호를 받아들인 건 대중노선에 힘입은 바 컸다. 그때 피디 계열의 시에이(CA: Constitutional Assembly) 그룹은 1917년 혁명기의 러시아를 본뜬 ‘제헌의회 소집’을 슬로건으로 내걸자고 주장했다. 반미청년회 의장(1988년 결성)을 지낸 조혁씨는 “엔엘이 분명하게 운동권 주류로 떠오른 건 1987년 6월항쟁을 거치면서부터”라고 말했다. 그는 “엔엘이 (운동권의) 다수였기에 87년 시기를 주도했던 게 아니다. 정치력이 있고 유연했기에 가능했다. 엔엘은 야당을 개량주의적이라고 몰아세우지 않았다. 엔엘의 영향력은 대중운동 방식에 기반해 확산됐다”고 말했다.

현장에 울림 준 ‘품성론’

엔엘을 떠받친 세번째 기둥은 품성론이었다. 품성론은 엔엘 사조가 노동운동권에까지 급속히 전파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강철서신>의 하나인 ‘노동해방운동의 힘찬 전진을 위해-지금 당장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팸플릿엔 품성론에 관한 이런 설명이 있다. “(선진 노동자) 발굴, 선정에서 1차적 기준이 되어야 하는 것은 품성이다. 솔직, 소박, 겸손, 성실, 용감한 품성을 갖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소박한 품성이란 사치나 허영, 공명심에 빠져 있지 않은 품성을 말한다. (…) 겸손한 품성이란 거만하지 않은 품성을 말한다. (…) 성실한 품성은 나태, 방탕하지 않은 품성을 말한다. (…) 용감한 사람이란 비겁하지 않은 품성을 말한다. (…) 품성은 사상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으며 한 사람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당연한 얘기지만, ‘전위조직 중심의 노동운동’에 회의하던 수많은 현장 활동가들에겐 예상 밖의 울림을 줬다. 엔엘이 학생운동권을 뛰어넘어 진보 운동권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한 데엔 이론을 뛰어넘는 ‘품성론’의 영향이 컸다. 물론 비판도 적지 않았다. 피디 그룹에선 “‘품성’을 지나치게 강조해서 운동의 몰지성화를 가져왔다”고 비판했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는 “변혁이론을 얘기하다 갑자기 품성을 강조하는 건 분명 당황스런 일인데, 이게 받아들여진 건 거기(품성론)에 실린 ‘권위’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북한 노동당이 그렇게 해서 (항일 투쟁과 북한정권 수립에) 성공했다는 생각이 없었다면 ‘착한 일 하는 게 좋은 사람’이란 식의 품성론은 그렇게 힘을 발휘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그래도 남한에서 (1990년대 후반 이후 운동이 고립화하고 쇠퇴하는 과정에서) 일본과 같은 극단적인 적군파가 나오지 않은 건 품성론의 긍정적 영향이 작용한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1985년 ‘창비’ 지면의 ‘사구체 논쟁’
‘식민지반봉건사회론’ 2차 논쟁으로
취약한 이론 기반 한계 뚜렷했으나
민족주의 정서 강하게 자극하며
강한 파급력과 질긴 생명력 증명

대중노선·품성론은 또 다른 기둥
현장 영향력 키우는 데 핵심 역할
주체사상 이해 둘러싼 논란 커지고
수령론·후계자론도 NL 분화 촉발
“하나의 흐름 같지만 매우 중층적”

엔엘을 하나의 사조로 묶은 게 세 개의 기둥이라면, 마치 양파껍질처럼 엔엘 내부를 복잡하고 중층적으로 만든 건 북한과 주체사상, 그리고 수령론과 후계자론이었다. 북한과 김일성 주석, 김정일 후계자를 어떻게 볼 것인지는 단순히 엔엘과 피디를 가르는 기준만은 아니었다. 엔엘 내부의 다양한 인식 차이를 드러내는 리트머스 시험지이기도 했다. 익명을 요청한 진보정당 출신의 핵심 인사는 이렇게 설명했다.

“계급보다 민족을 앞세우는 게 엔엘이라 한다면, 엔엘 내부에선 북한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수령론과 후계자론을 어떻게 볼 것이냐가 논란거리였다. 그런데 이게 단순하지 않다. 수령론과 후계자론으로 가면, 반응은 미묘하지만 다양하게 갈린다. 후계자론까지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그룹이 있는가 하면, 주체사상은 인정하면서도 수령론과 후계자론엔 소극적인 그룹도 있다. 세습은 중국·쿠바와 같은 현존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전례 없는 일이니까, 이걸 받아들이는 농도는 사람에 따라 또 다를 수밖에 없다. 여기에 주체사상을 인정하지 않는 ‘비주사 엔엘’ 그룹도 있다. 엔엘 사조는 밖에서 보면 하나의 흐름 같지만 내부적으론 매우 중층적인 모습을 띠었다.”

1차 사회구성체 논쟁을 촉발한 논문이 실린 1985년 10월의 <창작과 비평> 통권 57호 표지.
1차 사회구성체 논쟁을 촉발한 논문이 실린 1985년 10월의 <창작과 비평> 통권 57호 표지.
권력 세습을 바라보는 시선들

권력 세습을 둘러싼 논란은 이미 1970년대 발표된 재일동포 작가 이희성씨의 소설 <금단의 땅>에 잘 묘사돼 있다. 이 소설엔 북한 노선을 따르는 통일혁명당(통혁당) 당원 나도경과 남한의 독자적 사회주의자 박채호가 벌이는 논쟁이 여러 차례 나온다.

박채호 “도대체 김일성은 왜 자기 아들을 후계자로 내세우려고 하는 겁니까? 혁명과 통일은 대를 이어서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더군요. (…) 하지만 그것과 자기 자식을 후계자로 내세우는 것이 어떤 논리적 필연성을 갖는단 말입니까?”

나도경 “중국의 예를 들어봅시다. 문화대혁명이 저렇게 수습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른 것은 마오쩌둥의 후계자를 미리 결정해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소련의 경우는 더 심각합니다. 레닌은 스탈린을 후계자로 선택했지만, 스탈린은 뚜렷한 후계자를 결정해두지 않았기 때문에 소련은 결국 수정주의 쪽으로 빠져 혁명의 성과를 기대할 수 없게 되지 않았습니까?”

박채호 “레닌이 스탈린을 후계자로 선택했는지는 의문입니다. 만년의 레닌은 오히려 스탈린을 경계했을 정도니까요. 스탈린은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려 했어요. 그 야심을 경계하여 그를 정치국에서 강등시키자고 제안한 것은 바로 레닌이었지요. 레닌의 유언을 읽어보면 그건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세습을 둘러싼 박채호와 나도경의 논쟁은 10여년이 흐른 뒤 남한에서 똑같은 논리로 고스란히 재현됐다. 1990년대 초반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에서 활동했던 한 인사는 “그때는 (김일성에서 김정일로의) 권력 세습이 현실화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막연한 믿음으로 (권력 세습에 대한) 고민을 유보해놓는 분위기가 강했다. 그런 유보된 믿음이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으로) 세습이 현실화한 이후 점점 침식되기 시작했다. 3대 세습이 이뤄진 뒤엔 더 말할 것도 없다”고 말했다.

혁명 사조로서 엔엘은 대중적으로 세력을 확산하는 데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었다. ‘식민지반봉건 사회론’이 그랬고 주체사상 핵심인 수령론과 후계자론이 그랬다. 그럼에도 비교적 오랫동안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1986년 처음 등장할 때 강렬한 인상을 준 세 가지 특징-민족주의와 대중노선, 품성론-이 엔엘 주변을 두텁게 감싸 안았기 때문이었다.

박찬수 논설위원 pcs@hani.co.kr

▶ 박찬수 <한겨레> 논설위원. 1989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해 청와대 출입기자와 워싱턴 특파원, 정치부장, 편집국장을 지냈다. 저서로 청와대와 백악관의 권력작동 방식을 비교한 <청와대 vs 백악관>(2009년)이 있다. 82학번으로 5공 시절 군에 강제징집됐다 돌아와 보니 대학가가 온통 엔엘(NL) 열풍에 휩싸였던 기억을 갖고 있다. 사회부 신참기자 시절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를 취재하며 무엇이 수많은 학생들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의문을 가진 게 20여년이 지나 이 시리즈를 쓰는 계기가 됐다. 격주로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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