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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너는 해방전사, 음주와 흡연을 절제하라

등록 2016-08-05 19:27수정 2016-08-15 14:44

1986년 3월 결성된 ‘구국학생연맹’
4·19 뒤 첫 반미·통일 학생운동 조직
‘반전반핵·양키고홈’ 구호 대중화
경찰 수사로 잇단 지도부 구속·수배
결성 뒤 6개월도 못돼 조직 무너져

품성 강조한 ‘생활수칙 5개 항’ 눈길
엔엘 운동 특성 극명하게 드러나
당국, 운동권에 ‘망원’ 심던 시절
‘프락치 사건’ 터지며 재건 물거품
서울대생 배○○가 의혹의 중심
1988년 8월30일자 <경향신문> 3면. 검찰은 ‘민민투’ ‘자민투’의 배후조직과 관련한 수사 결과를 발표하며, 이례적으로 엔엘계 학생운동조직 구국학생연맹(구학련)의 조직과 강령, 생활규칙 등을 언론에 상세하게 소개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8년 8월30일자 <경향신문> 3면. 검찰은 ‘민민투’ ‘자민투’의 배후조직과 관련한 수사 결과를 발표하며, 이례적으로 엔엘계 학생운동조직 구국학생연맹(구학련)의 조직과 강령, 생활규칙 등을 언론에 상세하게 소개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박찬수의 NL현대사

⑧ ‘구학련’과 프락치 - 1

봄볕이 나른한 1986년 3월29일 오전 9시30분 서울대 자연대 건물 22동 404호. 학생들이 하나둘씩 들어와 빈 강의실을 채우기 시작했다. 안내를 맡은 학생은 참석자들에게 소속과 학번을 물은 뒤 앉을 자리를 지정하고 “보안관계상 대회 시작 때까지 눈을 감으라”고 지시했다. 강의실은 금세 100명 가까운 학생들로 가득 찼다. 사회자가 강단에 올라 말했다. “조직의 생명은 보안이다. 눈을 뜨더라도 동료의 얼굴을 확인하지 말라.” 아무리 그래도 눈을 떴는데 주변을 살피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이병호(서울대 국문 83학번)씨는 얼핏 봐서도 교내의 웬만한 고학년 활동가들이 거의 망라돼 있다는 걸 느꼈다. 조유식(서울대 정치 83학번)씨는 ‘아차!’ 싶었다고 했다. 주최 쪽이 그렇게 ‘보안’을 강조했는데, 참석자 중엔 운동노선이 다른 친구들도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앞에 나와 ‘결성취지문’을 낭독했다. “한반도는 19세기 말부터 분단을 거쳐 지금까지 미, 일 제국주의에 의해 강점 지배를 당해왔다. 이들의 억압과 독점에 항거하여 분연히 투쟁하다 산화한 선배 순국영령들의 빛나는 전통을 계승하고 (…) 열혈 애국청년학생들의 민주적 역량을 총집결하여 투쟁할 목적으로 ‘구학련’을 결성한다. 구학련 조직원은 첫째 한반도의 분단과 민중을 억압 착취하는 원흉으로서의 미제와 그 괴뢰정권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과, 둘째 불요불굴의 투지와, 셋째 필승불패의 신념을 갖고 힘차게 전진하자!”

내부 결속과 보안 취약 한계 뚜렷

첫 엔엘(NL)계 학생운동조직 ‘구국학생연맹’(구학련)은 이렇게 모습을 드러냈다. 1960년 4·19혁명기 이후 처음으로 남한에서 ‘반미’와 ‘통일’을 전면에 내건 대중적인 학생운동조직의 탄생이었다. 또한 반독재 투쟁에 주력했던 기존 운동과는 다른 새로운 사조가 학생운동권의 주류로 떠올랐음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구학련 결성을 주도한 건 서울대 법대 82학번 동기인 정대화와 김영환씨였다. 정대화씨가 구학련 총책인 중앙위원장을 맡고, 김영환씨가 뒤에서 돕기로 했다.

구학련은 ‘혁명적 대중조직’(RMO, Revolutional Mass-Organization)을 표방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위상이 모호했다. 그날 강의실에 모인 학생들은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인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우선 ‘구국학생연맹’이란 이름 자체가 주는 압박이 상당했다. ‘민주’나 ‘민족’을 내건 기존 학생조직과 달리, ‘구국학생연맹’이란 이름엔 금기를 뛰어넘는 듯한 뭔가가 있었다. 그렇게 이름을 정한 건 김영환씨였다. 정대화씨는 “처음엔 민학련(민주학생연맹)으로 조직 이름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김영환씨가 ‘구국의 소리’ 방송(많은 학생들은 그때까지 남한 통혁당 출신 인사들의 망명조직이 ‘구국의 소리’ 방송을 진행한다고 생각했다)에서 힌트를 얻었다며 구국학생연맹이 어떻겠느냐고 해서, 그러자고 동의했다”고 말했다. 나중에 구학련 투쟁부장을 지낸 조유식씨는 “그 당시만 해도 국가보안법 위협이 대단했다. 질적으로 새로운 조직이라고 하고 북한 얘기도 하고 그러니, 구학련에 가입하면 국가보안법에 걸릴 거란 생각을 누구나 했다. 마치 예전의 지하 전위당을 한다는 느낌, 그런 긴장감이 강했다. 그러니 굉장히 조심해야겠구나 생각을 했는데…, 실제로는 괴리가 컸다”고 말했다.

사실 그날 모인 학생들 가운데엔 ‘구학련’이 어떤 조직인지 모르고 참여한 이도 적지 않았다. 익명을 요청한 한 참석자(인문대 84학번)는 “새로운 기구가 뜨니 참가하라고 선배가 말해서 참석했는데, 구학련이란 이름은 현장에서 처음 들었다. 물론 그때 대세인 엔엘에 찬성하는 입장이긴 했다. 학생회 집회에 가듯이 참석했는데 막상 가서 보니 그게 아니어서 솔직히 혼란스러웠다”고 말했다. 이건 그나마 나은 경우였다. 참석자 중엔 엔엘 사조에 비판적인 학생들도 눈에 띄었다. ‘혁명적 조직’을 추구하면서 가장 기본적인 노선 통일을 이뤄내질 못했으니 내부 결속과 보안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결성대회 현장에서도 그런 부분에 대한 지적이 제기됐다. 강령과 규약을 채택한 뒤 간단한 질의응답을 했다. 조직 위상과 성격에 대한 비판적인 질문이 잇따랐다. ‘조직의 보위라는 측면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 대표자회의를 치르는 게 적절한가.’ ‘구학련은 전위적인 투쟁조직인가, 아니면 대중조직인가.’ 구학련의 모호한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우려했던 ‘보안 문제’는 결국 구학련의 발목을 너무 쉽게 잡아버렸다. 구학련은 그해 8월 경찰 수사로 조직이 와해될 때까지 채 반년도 활동을 이어가지 못했다. 그 기간 동안 최고 지도부인 중앙위원회는 핵심 활동가들의 잇단 구속, 수배로 무려 7차례나 개편에 개편을 거듭했다.

그럼에도 구학련은 기존 학생 조직과 지향점을 달리하며 엔엘 운동의 확산에 뚜렷한 영향을 끼쳤다. 그 뒤를 이어 고려대의 애국학생회, 연세대의 반미구국학생동맹, 전남대의 반미구국투쟁위원회 등 엔엘 노선을 따르는 학생운동 조직들이 잇따라 결성됐다. 구학련은 엔엘 사조를 전국 대학가에 퍼뜨리는 화수분이었다. 전남대의 엔엘 조직 결성에 관여했던 인사(84학번)는 “그해 6월쯤인가 구학련에서 연대사업을 담당하는 학생이 광주로 내려와 엔엘 문건을 한보따리 전해줬다. 내가 문건을 전달받아 전남대 내부에 돌렸다. 구학련은 엔엘 확산에 매우 적극적이었다”고 말했다.

반미 운동이 대학가에서 본격화한 것도 구학련의 공이었다. 구학련은 전두환 정권 배후에 미국이 있다고 규정하고 반독재 투쟁과 함께 반미 투쟁을 운동의 전면에 내세웠다. 대학생들의 교련과 전방입소 훈련을 ‘양키의 용병교육’이라고 규정해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를 조직했다. ‘반전반핵 양키고홈’이란 구호가 대중화한 게 이 무렵이었다. ‘엔엘’(NL)이란 단어의 기원인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혁명’(NL-PDR)이란 말이 본격적으로 쓰인 것도 구학련 기관지 <해방선언>을 통해서였다.

‘반미’와 ‘품성’이 핵심 심사기준

그러나 구학련이 이른바 ‘주사’(주체사상)를 지도이념으로 하는 단계까지 나간 것은 아니었다. 1986년 8월30일 ‘용공이적성이 농후한’ 구학련을 적발했다고 발표한 최환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장은 “조직원 모두가 이적사상에 완전히 물든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핵심 조직원들에 대해서만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구속했다”고 밝혔다. 핵심 조직원에게도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 구성 혐의가 아니라 그보다 한 단계 낮은 이적단체 구성 혐의가 적용됐다. 구학련 투쟁부장을 지낸 조유식씨는 “그때 구학련 내부에서 가장 치열하게 논쟁이 붙은 사안 중 하나는 ‘주한미군 철수’를 주 슬로건으로 내걸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이걸 내걸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숱한 고민과 논쟁 끝에 결국 ‘주한미군 철수 투쟁’은 하지 않기로 결론을 내렸다. 구학련의 성격을 보여주는 결정이었다”고 말했다.

엔엘 조직으로서 구학련의 새로운 성격은 결성대회에서 채택한 강령과 규약, 생활수칙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구학련 중앙위원장이었던 정대화씨는 “새로운 조직이니까 구학련 가입 심사는 특별히 철저하게 하질 않고, 원하는 사람은 가능한 한 다 받아들이려고 했다. 가장 중요한 기준은 ‘반미’와 ‘품성’이었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구학련은 규약 3조에서 조직원 자격을 ‘반미 구국투쟁에 헌신한 자로서 조직 노선을 관철하고 조직 규율을 준수할 사람으로 한다’고 규정했다. 특히 눈에 띄는 건 활동가의 ‘품성’을 강조한 생활수칙이었다. 지도부는 이 생활수칙을 모든 조직원이 준수하라고 강조했다. 구학련의 생활수칙 5개 항은 이랬다.

1. 모든 생활에서 미제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하고 조국과 민중에 대한 충성심을 고양한다.

2. 나쁜 습관과 주위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명확한 책임성 하에 선도적 실천을 수행한다.

3. 비판과 상호비판으로 진정한 동지애를 구현한다.

4. 약속시간 엄수 및 규율 준수를 통해 절도있는 생활을 체화한다.

5. 자신의 몸은 해방전사의 몸임을 자각하고 음주, 흡연을 절제하고 알맞은 운동으로 건강을 유지한다.

강령과 규약 등을 정한 조직은 많았지만, 이처럼 ‘생활수칙’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학생운동 조직은 아마도 구학련이 처음이 아니었을까. 엔엘 조직의 특성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지점에 구학련이 서 있었다.

구학련이 많은 이들의 기억속에 더욱 또렷이 남은 건, 희대의 ‘프락치 사건’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경찰 수사로 와해된 구학련을 재건하자면서 학교에 남아 있던 운동권 학생들을 끌어모아 고스란히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누설한 이 사건의 전모는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그러나 당시 학생들의 증언에 따르면 구학련 핵심 조직원이던 배○○씨의 정보 제공으로 학생운동 활동가 여럿이 경찰에 체포된 사실은 확인된다.

운동권에서 프락치 사건이 배씨의 경우만은 아니다. 공안당국은 항상 학생운동과 노동운동권에 ‘망원’이라 부르는 정보원을 심기 위해 애썼고 이런 노력이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래서 1980~90년대 대학가엔 ‘누가 프락치인 것 같다’는 소문과 의심이 끊이질 않았다. 하지만 실제로 ‘프락치’로 확인된 경우는 드물었다. 설령 경찰 또는 정보기관이 망원을 심더라도 대개는 단기간 활동에 그쳤지, 배씨처럼 지속적으로 핵심에서 활동한 사례는 거의 없었다.

배씨는 1983년 서울대에 입학해 본부서클인 ‘고전연구회’에서 학생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고전연구회는 나중에 엔엘 운동의 시초가 되는데, 이것이 배씨의 전향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동료들은 추측했다. 그와 함께 서클 활동을 했던 김지연(서울대 약대 84학번)씨는 “배씨는 온순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편이었다. 감성적인 글을 잘 써서, 학내 대자보를 그가 여러 번 썼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배○○처럼 세상을 약게 살아야지…”

부산 출신인 배씨는 집안이 부유해 그 당시 지방 학생으론 드물게 학교 주변의 아파트를 전세내 자취를 했다.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미성아파트 1동 ○○○호는 자연스레 서클 세미나 등 엔엘 그룹 모임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강철서신’ 저자 김영환씨가 경찰 수배를 피해 잠시 배씨 집에 은신한 적도 있었다. 김영환씨는 “배씨는 신념이 강했다기보다는 서클 친구들과 어울리는 게 좋아서 운동을 했던 것 같다. 1, 2학년 때는 별문제가 없었지만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특히 고전연구회가 (반독재 운동을 넘어서) 반미·통일 운동을 주도하게 되니까 심적인 부담을 크게 느낀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김영환씨는 1986년 11월24일 ‘강철서신’을 쓴 사실이 드러나 안기부에 붙잡힌 뒤 수사관으로부터 이상한 얘기를 들었다. 검거 뒤 1주일쯤 지난 무렵이었다. 조사를 받는 도중에 문득 수사관이 이렇게 물었다. “네 주위에 경찰에 협조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 걸 아느냐.” 김씨가 “모른다”고 하자 수사관은 “그러면 배○○이 만나자고 했을 때 왜 거절했느냐”고 되물었다. 그러면서 수사관은 “배○○처럼 세상을 약게 살아야지…”라고 혼잣말처럼 말했다고 한다. 김씨는 이때 ‘배○○이 프락치였구나’라고 어렴풋이 짐작했다고 말했다. <다음회에 계속>

구학련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또렷이 남은 건, 희대의 ‘프락치 사건’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1980~90년대 대학가엔 공안당국이 정보원 노릇을 하는 ‘망원’을 심는 경우가 흔했고, 이 때문에 겉으론 평화스러워 보였어도 프락치 시비가 내내 끊이지 않았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 <한겨레> 자료사진
구학련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또렷이 남은 건, 희대의 ‘프락치 사건’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1980~90년대 대학가엔 공안당국이 정보원 노릇을 하는 ‘망원’을 심는 경우가 흔했고, 이 때문에 겉으론 평화스러워 보였어도 프락치 시비가 내내 끊이지 않았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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