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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도시락 못 싸온 아이들 보고 ‘결식아동 돕기’ 시작했죠”

등록 2016-08-10 21:27수정 2017-01-09 11:00

[이희호 평전] 제6부 청와대 시간 3회 금강산 관광
1998년 11월 이희호가 약속한 대로 애덤 킹 가족을 포함해 한국인 입양아를 둔 열 가족이 한국에 왔다. “청와대 점심에 초대해서 만났지요. 애덤 킹을 입양한 찰스 킹과 도나 킹은 초청장을 받고 처음엔 어리둥절했대요. 킹 부부는 세 아이가 있는데도 장애아 일곱 명을 포함해 아홉 명이나 입양해서 키우고 있었어요. 그중 한국에서 입양한 아이가 다섯 명이나 됐어요. 참 대단한 분들이고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분들이었지요.”

이희호는 그 뒤로도 애덤 킹을 몇 번 더 만났다. “2000년 1월에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서던캘리포니아대학에서 ‘국제사회복지상’ 첫 번째 수상자로 나를 선정했어요. 수상 뒤에 강연을 하고 연단에서 내려오는데 한 아이가 꽃을 들고 뒤뚱뒤뚱 걸어오는 거예요. 애덤 킹이었어요. 새 티타늄 다리를 자랑해요. 그 뒤에 동네 장애인팀에서 야구를 시작했다고 사진과 편지를 보내왔어요. 그래서 두산 베어스에서 야구 유니폼과 용품을 기증받아 보내주었지요.”

2001년 애덤 킹은 다시 한국을 찾았다. “2001년 4월에 프로야구 개막식 시구를 애덤이 하면 어떻겠냐는 의견이 나왔어요. 그래서 애덤을 다시 초청했지요.” 4월5일 두산 베어스와 해태 타이거즈 개막전에서 애덤은 티타늄 다리로 서서 개막 시구를 던졌다. 이희호는 난생처음 야구장을 찾았다. 주최 쪽은 장애 어린이 400명도 초청했다. “‘국민의 정부’ 출범 첫해에 ‘장애인 인권 헌장’을 제정하고 제1차 장애인 복지 발전 5개년 계획을 시작했지요. 청와대에서 장애인 초청 행사를 많이 열었어요. 그런데 그 웅장한 건물에 장애인용 화장실이 없었어요. 서둘러서 1층에 만들었지요. 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그만큼 부족했던 거지요.”

이희호는 청와대에 있는 동안 여성과 어린이에게 관심을 쏟았다. “남편이 대통령이 될 때까지 나는 청와대에 들어가면 어떤 일을 해야지 하는 생각을 구체적으로 해본 적이 없었어요. 그저 기회가 온다면 어려운 이웃과 여성을 돕는 일에 힘쓰고 싶다는 마음뿐이었지요.” 아이엠에프 경제위기로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이 더 커졌다. “그때 밥을 굶는 아이들이 많았어요. 한번은 초등학교를 방문해 점심시간에 아이들과 함께 식사를 했어요. 그런데 도시락을 싸 오지 못하는 아이들이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굶는 아이들에게 밥을 먹일 수 있는 길이 없을까 하고 방법을 궁리했지요. 그때 나랑 가까운 박영숙씨, 한신대 김성재 교수와 함께 의논했어요.”

1998년 8월 대통령 부인 이희호(오른쪽 셋째)는 결식아동을 위한 봉사단체 ‘사랑의 친구들’을 꾸렸다. 박영숙(왼쪽 셋째) 총재의 제안으로 이희호가 김대중에게 보낸 옥중서신을 책으로 펴내 그 인세로 활동을 시작했다. 사진은 98년 12월14일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열린 <내일을 위한 기도> 출판기념회 모습.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98년 8월 대통령 부인 이희호(오른쪽 셋째)는 결식아동을 위한 봉사단체 ‘사랑의 친구들’을 꾸렸다. 박영숙(왼쪽 셋째) 총재의 제안으로 이희호가 김대중에게 보낸 옥중서신을 책으로 펴내 그 인세로 활동을 시작했다. 사진은 98년 12월14일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열린 <내일을 위한 기도> 출판기념회 모습.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그런 논의 끝에 1998년 8월10일 태어난 것이 ‘사단법인 사랑의 친구들’이었다. 박영숙이 총재를 맡고 이희호는 명예총재가 됐다. “6월 미국 방문 때 동포 어머니들에게 조국의 굶는 아이들을 도와달라고 호소했더니, 워싱턴에서 가정법률상담소를 운영하는 방숙자씨가 우리를 돕겠다고 나섰어요. 방숙자씨가 나라사랑어머니회를 조직해 우리에게 물품을 많이 보내주었지요.”

이희호는 재원을 마련할 방법을 찾다가 옥중의 남편에게 보낸 편지들을 묶어 <내일을 위한 기도>라는 이름으로 책을 펴냈다. 그런 사정을 박영숙은 추천사에서 이렇게 밝혔다. “아이엠에프 시대로 들어선 뒤 결식아동은 12만명을 넘어섰으며 헤아릴 수 없는 가정 파탄이 이어지고 있다. 이런 안타깝고 가슴 아픈 상황을 보고 들으며 무언가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사랑의 친구들’을 통해 사회봉사 활동을 하기에 이르렀다. (…) 함께 일하던 몇 사람이 문득 떠올린 것이 바로 사형선고를 받은 김대중 선생에게 보낸 이희호 여사의 편지 묶음이었다.” 책의 인세는 ‘사랑의 친구들’ 활동에 모두 들어갔다. “‘사랑의 친구들’이 1년에 한 번씩 바자회를 열었어요. 그렇게 모은 돈으로 저소득층 지역의 결식아동을 돕고, 의약품을 지원받아 북한 어린이 돕기에도 썼지요. ‘사랑의 친구들’은 우리가 청와대를 떠난 뒤에도 활동을 계속하고 있어요. 바자회도 매년 열고 있고요.”

‘사랑의 친구들’ 사업이 궤도에 오르자 이희호는 이듬해 ‘한국여성재단’을 만드는 데 마음을 기울였다. “박영숙씨가 아이디어도 많고 추진력도 있어서 이사장을 맡았어요. 기업체들에서 기부금을 받아 여성 능력 개발을 지원하고 저소득층 여성을 돕는 일을 했어요. 나는 명예이사장을 맡아 힘을 보탰지요.” 한국여성재단은 1999년 12월 ‘딸들에게 희망을’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발족했다.

1998년 6월16일 현대그룹 명예회장 정주영이 자신의 서산농장에서 기른 소 500마리를 트럭에 싣고 북한 방문에 나섰다. 정주영은 이날 오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평화의 집’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강원도 통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18살이던 1933년 아버님의 소 판 돈 70원을 갖고 집을 나섰습니다. 이제 그 한 마리 소가 1000마리 소가 되어 그 빚을 갚으러 꿈에 그리던 고향 산천을 찾아갑니다.” 정주영은 소떼와 함께 걸어서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행사였다. <시엔엔>(CNN)을 비롯한 미국의 주요 언론들은 실시간으로 또 주요 뉴스로 이 사실을 보도했다.

정주영이 돌아오기 하루 전인 6월22일 동해상에서 북한 잠수정 한 척이 어선이 쳐놓은 그물에 걸려 표류 중인 채로 발견됐다. 이튿날 북한 잠수정 예인작업이 벌어지는 동안 임진각에서는 정주영 귀환 행사가 열렸다. 7박8일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정주영은 북한과 금강산 관광 사업에 합의했다고 밝혔다. “정부의 승인을 받는 대로 이르면 금년 가을부터 매일 1000명 이상의 관광객이 유람선을 이용해 금강산 관광을 하게 될 것입니다.” 잠수정 사건이 일어났지만, 여론조사에서 80% 넘는 국민이 햇볕정책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998년 장애입양아 애덤 킹 초청
청와대에 장애인화장실 처음 설치

외환위기로 밥 굶는 아이 12만명
여성계 나서 ‘사랑의 친구들’ 출범
옥중서신 책 펴내 인세 전액 기부

7월 일본 방문 아키히토 일왕 예방
“한국인에 큰 고통” 식민지배 사과
“미치코 왕비도 내 자서전 꿰뚫어”

11월 중국 방문 장쩌민 주석 ‘환영’
“남편을 ‘형님’이라 부르며 노래도”

1998년 7월31일 김대중·이희호는 최규하·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전직 대통령 부부를 청와대로 초청해 만찬을 했다. ‘악연’이던 전두환(왼쪽 둘째)·이순자(맨 왼쪽) 부부가 안팎의 대화를 주도해 인상적이었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98년 7월31일 김대중·이희호는 최규하·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전직 대통령 부부를 청와대로 초청해 만찬을 했다. ‘악연’이던 전두환(왼쪽 둘째)·이순자(맨 왼쪽) 부부가 안팎의 대화를 주도해 인상적이었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7월31일 김대중은 전직 대통령 부부를 초청해 만찬을 했다. 최규하·전두환·노태우·김영삼 부부가 참석했다. 전직 대통령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만찬을 함께한 것은 한국 현대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남편은 국민 화합 차원에서 전직 대통령 부부를 모두 모셨지요. 우리를 핍박했던 분들이었지만 남편은 아무런 사감 없이 대했어요. 저녁을 함께 먹은 뒤 남자들은 남자들끼리, 여자들은 여자들끼리 따로 테이블을 마련해 이야기했지요. 그런데 저쪽에서는 전두환 대통령, 이쪽에서는 이순자 여사 목소리가 가장 컸어요. 아주 거침이 없었지요.”

10월7일 김대중과 이희호는 일본을 국빈으로 방문했다. “남편은 한국과 일본이 불행한 과거사를 정리하고 미래의 동반자로 거듭나는 계기를 만들고 싶어했지요. 김영삼 대통령이 독도 영유권 문제가 불거졌을 때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겠다’고 극언을 해서 서로 강경책을 내놓는 바람에 한일 관계가 아주 안 좋았거든요.” 도쿄 도착 첫날 김대중과 이희호는 일왕 부부를 예방했다. “남편은 외교적 차원에서 일본 국민이 원하는 대로 아키히토 천황을 ‘천황’이라고 불렀어요. 마사코 황태자비가 하버드대학에서 남편의 연설을 들은 적이 있다고 해서 놀랐지요. 1983년 우리가 미국에 망명해 있던 시절에 황태자비가 하버드대학에서 수학하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1998년 10월 일본을 처음 국빈방문한 김대중·이희호는 도쿄 왕궁에서 아키히토 일왕을 예방했다. 미치코(오른쪽) 왕비는 이희호(왼쪽)의 자서전 <나의 사랑 나의 조국>을 미리 읽고 환담을 나누기도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98년 10월 일본을 처음 국빈방문한 김대중·이희호는 도쿄 왕궁에서 아키히토 일왕을 예방했다. 미치코(오른쪽) 왕비는 이희호(왼쪽)의 자서전 <나의 사랑 나의 조국>을 미리 읽고 환담을 나누기도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아키히토는 일본의 한국 식민지배에 대해 사죄했다. “한때 우리나라가 한반도와 여러분께 크나큰 고통을 안겨준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것에 대한 깊은 슬픔은 항상 본인의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아키히토는 “교토에 도읍한 간무 천황의 생모가 백제에서 온 귀화인이라고 한다”는 이야기도 했다. “미치코 황후가 일본어로 번역된 내 자서전 <나의 사랑 나의 조국>을 읽었던가 봐요. 내용을 다 꿰고 있었어요. 구로다 사야코 공주는 남편이 텔레비전 동물 프로그램을 좋아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다음날 한일 정상회담이 열렸다. 김대중과 일본 총리 오부치 게이조는 ‘21세기 한일 파트너십’을 발표했다. 이 공동선언에서 오부치는 “일본이 과거 한때 식민지 지배로 인하여 한국 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이에 대하여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하였다”고 밝혔다. “이 발표문은 일본 정부가 식민통치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한국을 직접 지칭해서 처음으로 외교문서에 명기했다는 데 의미가 있었어요. 우리 외교의 승리라고 할 수 있지요.”

한일 정상은 일본 대중문화를 한국 시장에 개방하겠다는 결정도 했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은 남편의 뜻이 반영된 것이었어요. 당시 국내에서는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시기상조라는 의견이 많았어요. 남편은 우리의 문화 역량을 감안하면 개방하더라도 문제 될 것이 없다고 믿었지요. 나도 대중문화를 개방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야 우리 대중문화도 일본으로 나갈 수 있고요. 일본 대중문화를 개방한 뒤로 일본에서 한류가 크게 일어났잖아요.”

10월9일 김대중과 이희호는 일본에 있는 친구들을 만났다. “남편이 일본에 망명해 있던 시절부터 가깝게 지낸 분들을 숙소로 초대해 만났지요. 도쿄 납치 때 남편의 비서였던 조활준씨, 남편의 초등학교 친구 김종충씨가 왔어요. 월간 <세카이> 발행인인 야스에 료스케씨가 그해 1월에 세상을 떠나서 그 부인이 왔고요. 도이 다카코 사회당 당수,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총리, 고노 요헤이 전 자민당 총재도 왔어요. 노벨문학상을 받은 오에 겐자부로, 재일동포 지문날인 철폐운동을 벌이던 이인하 목사도 만났지요.”

11월11일 김대중과 이희호는 중국을 방문했다. 김대중은 동포들과 간담회를 하면서 중국 방문을 포함한 4대국 외교의 의미를 이렇게 강조했다. “한국은 4대국 사이에 끼여 있는데 자칫 잘못하면 찢기고 당할 수 있지만 잘만 하면 우리의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에 4대국이 서로 협력하려 할 것입니다. 색시 하나를 두고 신랑감 넷이 프러포즈를 하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외교입니다.”

1998년 11월 중국을 국빈방문한 김대중은 ‘형님’이라 부르며 환영해준 장쩌민 주석과 뜻이 잘 통했다. 11월12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만찬행사에서 먼저 이탈리아 가곡을 부른 장쩌민의 강권으로 김대중·이희호 부부는 ‘목포의 눈물’ ‘도라지 타령’ 등 답가를 했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98년 11월 중국을 국빈방문한 김대중은 ‘형님’이라 부르며 환영해준 장쩌민 주석과 뜻이 잘 통했다. 11월12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만찬행사에서 먼저 이탈리아 가곡을 부른 장쩌민의 강권으로 김대중·이희호 부부는 ‘목포의 눈물’ ‘도라지 타령’ 등 답가를 했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1월12일 김대중과 중국 국가주석 장쩌민이 단독 정상회담을 했다. “남편과 장쩌민 주석은 서로 마음이 잘 맞았어요. 남편보다 8개월 아래인 장쩌민 주석이 남편을 형님이라고 불렀어요. 아주 솔직하고 통이 큰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통역도 없이 영어로 서로 대화했어요. 장 주석은 노래도 잘해요. 나중에 만찬장에서 이탈리아 노래 ‘오 솔레 미오’를 불렀어요. 그러고는 우리에게도 한 곡 부르라고 강권해서 ‘목포의 눈물’을 불렀지요.” 김대중과 장쩌민은 한중 관계를 선린우호 관계에서 동반자 관계로 한 단계 올렸다.

11월14일 김대중과 이희호는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를 찾았다. “청사에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김구 선생 흉상이 있었어요. 그 앞에서 남편이 수행원들에게 ‘백범 선생의 일지를 보면 경제정의와 공평 사회를 만들자고 역설하는데, 그 뜻을 되살려야 한다’고 이야기했지요. 남편은 ‘국민의 정부’가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취임식 때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받든다’고 선언했고요.”

1998년 10월27일 정주영은 소 501마리를 데리고 두 번째 방북길에 올랐다. 방북 기간 동안 북한은 현대그룹에 금강산 관광객 유치 허가를 내주었다. 정주영은 국방위원장 김정일도 만났다. 11월18일 금강산 관광객 1418명을 태운 유람선이 동해에서 첫 출항을 했다. 정주영도 아들들과 함께 유람선에 올랐다. “분단 반세기 만에 남과 북이 대규모 민간교류를 시작했어요. 남쪽의 관광객이 처음으로 북한 땅을 밟았어요. 북한은 최전방 지역과 군사요충지 장전항을 개방했고요. 엄청난 사건이었지요. 금강산 관광은 햇볕정책의 첫 결실이었어요.”

1998년 12월 김대중과 이희호는 베트남을 방문했다. “남편은 베트남전쟁 때 한국군이 참전해 총을 겨눈 사실을 무작정 덮어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정상회담 때 ‘두 나라 사이에 한때 불행한 시기가 있었다’고 그 문제에 대해 에둘러 사과의 뜻을 밝혔지요. 우리는 베트남 국민이 국부로 모시는 호찌민 주석 묘소를 참배하고 꽃을 바쳤지요.” 김대중과 이희호가 베트남에서 돌아온 12월17일 이태영이 세상을 떠났다. 이희호와 김대중은 이튿날 빈소를 찾았다. 이희호는 눈물을 흘렸다. “이태영 선생님은 평안북도 운산이 고향인데, 생전에 ‘통일이 되면 판문점에 이산가족을 위한 가정법률상담소를 만들겠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결국 남북통일을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요.”

1998년 6월 미국 국빈방문 때 로스앤젤레스에서 만난 의족소년 애덤킹(오른쪽)과 약속한대로 이희호는 한인 장애입양아들을 한국에 초청해 인연을 이어갔다. 사진은 2001년 4월 프로야구 개막전에서 시구자로 나선 애덤킹과 이희호. <한겨레> 자료사진
1998년 6월 미국 국빈방문 때 로스앤젤레스에서 만난 의족소년 애덤킹(오른쪽)과 약속한대로 이희호는 한인 장애입양아들을 한국에 초청해 인연을 이어갔다. 사진은 2001년 4월 프로야구 개막전에서 시구자로 나선 애덤킹과 이희호. <한겨레> 자료사진
1999년 2월25일 ‘국민의 정부’ 출범 1년을 맞았다. 1997년 12월 38억달러였던 외환보유고가 그사이 520억달러로 늘어났다. 사상 최대의 보유고였다. 1997년 87억달러 적자를 낸 무역수지는 1998년 399억달러 흑자로 뒤바뀌었다. “그런데 경기회복이 더뎌서 온기가 여전히 윗목까지 퍼지지 않았어요. 남편은 실업 문제를 해결하려고 온갖 노력을 하는데도 성과가 빨리 나지 않아 안타까워했지요.”

2월21일 김대중은 텔레비전 방송에 나와 ‘국민과의 대화’를 했다. 방청석 질문자가 “남태평양 무인도에 간다면 가져가고 싶은 것 세 가지만 꼽아달라”고 하자 김대중은 “실업, 부패, 지역감정”이라고 답했다. “당시 야당에서 지역감정을 부추겼어요. 호남 지역만 호황이고 영남 기업은 다 죽는다고요. 고위 공직자도 호남이 독식한다고 했고요. 그건 사실이 아니었거든요. 예산도 영남이 훨씬 많고 고위 공직자도 영남 출신이 많았어요. 남편은 예산을 배정할 때 광역자치단체장들을 서울로 오게 해서 예산청장과 예산기획위원장이 참석한 자리에서 예산을 배분했어요. 1999년도에는 영남에 2조6000억원, 호남에 1조5000억원이 돌아갔지요.”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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