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경찰과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는 학생운동권 내부 정보를 얻기 위해 학생들을 협박하고 회유하며 프락치 활동을 강요했다. 1980년대 대학가를 배경으로 공안당국이 운영하던 프락치 실태를 그린 황철민 감독의 독립영화 <프락치>의 한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9> ‘구학련’과 프락치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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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수 <한겨레> 논설위원. 1989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해 청와대 출입기자와 워싱턴 특파원, 정치부장, 편집국장을 지냈다. 저서로 청와대와 백악관의 권력작동 방식을 비교한 <청와대 vs 백악관>(2009년)이 있다. 82학번으로 5공 시절 군에 강제징집됐다 돌아와보니 대학가가 온통 엔엘(NL) 열풍에 휩싸였던 기억을 갖고 있다. 사회부 신참기자 시절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를 취재하며 무엇이 수많은 학생들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의문을 가진 게 20여년이 지나 이 시리즈를 쓰는 계기가 됐다. 격주로 연재한다.
1987년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1월엔 서울 최저기온이 영하 19.2도까지 내려가는 17년 만의 한파가 몰아닥쳐 한강이 꽁꽁 얼었다. 시국도 몹시 스산했다. 연초부터 야당과 대학가의 개헌서명 운동이 곳곳에서 경찰과 충돌을 빚었다. 전두환 정권은 장기 집권을 위한 폭압적 탄압 수위를 높이기 시작했다. 학생운동권을 겨냥한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일었다. 경찰은 수배 학생을 잡기 위해 통반장을 통한 주민신고체제를 만들고 특별 호구조사를 벌였다.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씨 고문치사 사건은 이런 분위기에서 발생했다.
그해 1월14일 서울 남영동의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서울대생 박종철씨(언어학과 84학번)가 숨졌다. 수배중인 선배의 거처를 대라며 경찰이 고문하다 벌어진 일이었다. 그 무렵 경찰과 안기부는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박종철씨처럼 아무 잘못도 없이 단지 수배 학생을 안다는 이유로 끌려가 구타와 고문을 당하는 일이 허다했다. 운동권 내부 정보를 얻기 위해 학생들을 협박하고 회유했다. ‘프락치’를 둘러싼 의심과 불신이 가장 팽배했던 시기 또한 그때였다. 학생운동사에서 가장 유명한 프락치 사건으로 기억되는 배○○씨 사건은 5공 말기 그런 흉포한 분위기에서 생겨난 비극이었다. 치안본부 대공본실이 그 중심에 있었다.
“수사관이 한심하다는 듯 쳐다봤다”
박종철씨 사건이 발생한 87년 1월 무렵으로 김관영씨(서울대 신문학과 84학번)는 기억했다. 서클 선배인 배○○씨(서울대 83학번)한테서 한번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배씨는 김씨에게 ‘엔엘(NL) 학생조직을 재건하자’고 말했다고 한다. 불과 수개월 전인 1986년 여름, 남한의 첫 엔엘계 학생조직이던 구국학생연맹(구학련)이 와해되면서 대다수 학생활동가들은 구속되거나 수배된 상태였다. 경찰 수사 발표를 보면 구학련과 구학련의 투쟁조직인 자민투(반미자주화 반파쇼민주화 투쟁위원회) 관련으로 서울대에서만 60여명이 구속됐다. 김씨는 구학련에서 본부서클을 담당하는 책임자였는데 운 좋게도 검거를 면한 상태였다. 배씨는 학교에 남은 엔엘 계열 학생들을 모아서 새로 조직을 꾸리자고 제안했다. 김씨는 “구학련이 이미 깨진 상태였기에 ‘민주학생연맹’(민학련)이란 이름으로 재건하자고 배씨가 제안했다. 그래서 매주 한차례씩 만나 이 문제를 논의했다”고 말했다. 장유식씨(산업공학과 83학번)도 이 과정에서 배씨를 만났다.
그러나 구학련 재건 작업은 제대로 이뤄지질 않았다. 배씨가 ‘프락치’라는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장유식씨도 그런 얘기를 얼핏 들었지만 ‘설마’ 했다고 한다. 87년 2월 말 장씨는 건국대 앞에서 배씨를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날 이후’라는 레스토랑 이름을 장씨는 지금도 기억했다. 레스토랑에 들어서 배씨를 발견하고 자리에 앉자마자 형사 5~6명이 테이블 주변을 둘러섰다. 형사들은 장씨와 배씨 두 사람을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연행했다. 장씨는 배씨의 밀고로 자신이 잡혔다는 사실을 짐작했다.
3월엔 김관영씨가 경찰에 검거됐다. 장유식씨와 비슷한 형식이었다. 김관영씨는 “배씨를 만나러 나갔는데 형사들이 현장에 나와 있었다. 배씨와 함께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됐다. 조사를 하는데 배씨와 관련한 내용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수사관이 묻지를 않았다. 그래서 배씨는 어떻게 됐느냐고 물으니까 수사관이 한심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고 말했다.
4월엔 또다른 엔엘계 학생 모임이 와해됐다. 엔엘 조직 건설을 논의하던 양기철씨(서울대 국제경제학과 82학번)와 김○○씨(고려대 83학번), 하○○씨(한신대 83학번) 등이 치안본부 대공분실 형사들에게 붙잡혔다. ‘반제청년동맹’이란 이적단체를 만들려 했다는 혐의였다. 양기철씨는 배○○씨와 친한 사이였다. 양씨가 배씨를 녹두출판사 편집위원으로 소개해준 적도 있었다. 양씨는 배씨 때문에 자신을 비롯해 다른 대학 동료들이 검거됐다고 믿고 있다. 그는 “배씨가 ‘프락치’라는 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알게 됐다”고 말했다. 불똥은 녹두출판사로도 튀었다.
녹두출판사는 그해 3월 <녹두서평> 1집을 발간했다. 이 책엔 제주 4·3운동을 다룬 이산하 시인의 ‘한라산’이 실려 있었는데 이게 필화사건으로 번졌다. 배○○씨가 그때 녹두출판사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편집장이던 신형식씨는 이렇게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87년 1월에 대학 서클 후배인 양기철에게 편집위원을 한 사람 구해달라고 부탁했더니 배○○씨를 소개해줬다. 그래서 3월21일 <녹두서평> 1집이 나올 때까지 여러 번 우리 사무실을 찾아왔다. 그런데 뭔가 풍기는 분위기가 좀 이상해서, 이산하 시인의 ‘한라산’ 얘기는 배씨에게 하질 않았다. <녹두서평>이 나오자마자 우리(편집진)는 모두 잠적을 했다. 아마 그 무렵에 배씨가 프락치 같다는 소리를 얼핏 들은 거 같다. 그 뒤에 양기철씨 등 엔엘 조직 건설을 논의하던 학생 몇명이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연행됐다. 그 소식을 듣고 서울대 총학생회에 전화를 걸었다. ‘배씨가 프락치 같은데 좀 알아보라’고 제보했다.” 신형식씨 전화를 계기로 배씨의 활동이 비로소 학내에 공개적으로 알려지게 됐다.
배씨는 1983년 서울대에 입학해 본부서클인 고전연구회에서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열성적인 ‘운동권 학생’이었다. 시위를 하다 두 차례 연행된 적이 있고, 2학년 겨울방학 때는 보름 정도 공장에 들어가 노동자 생활을 체험하는 ‘공활’(공장활동)도 했다. 그의 아버지는 부산·경남 지역에서 병원을 운영했다고 한다. 배씨는 지방 학생으론 드물게 서울대 부근의 아파트를 전세내 생활한 적이 있는데, 그때 이 아파트가 김영환, 정대화씨 등 엔엘 그룹 초기 멤버들의 아지트 역할을 했다. 누구도 배씨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랬던 운동권 학생은 왜 어느날 갑자기 경찰의 협조자가 되어 친구들을 배신했던 걸까.
“약속 장소 가보니 형사들 와 있어”
1986년 8월의 어느 날 밤, 서울 관악구 봉천동 하숙집에서 잠자던 배씨는 갑자기 들이닥친 형사들에게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갔다. 그가 연행된 곳은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4개월 뒤 박종철씨가 비슷하게 끌려온 바로 그곳이었다. 밀폐된 방에 고립돼 배씨는 선배와 친구의 행방을 추궁받았다. ‘강철서신’ 저자 김영환씨(서울대 법대 82학번)와 구학련 핵심 멤버인 박금섭씨(법대 83학번)였다. 처음엔 모른다고 잡아뗐지만 경찰의 구타와 협박을 견디긴 어려웠다. 배씨는 이렇게 말했다.
“무엇보다 심리적 압박이 너무 컸다. 그들은 나에게 김영환과 박금섭을 잡을 수 있게 협조하라고 요구했다. 협조 안 하면 구속시키겠다고 했다. 견디기 힘들었다. 모범생으로 살아왔는데 구속되면 부모님이 얼마나 실망하실까…. 또 두 사람만 잡으면, (배씨가 참여했던 노동운동 기관지 ‘들불’ 편집부의) 다른 동료와 후배들은 건드리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서, 협조했다. 내가 너무 유약했다. 좀더 강인했더라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텐데.”
김영환씨가 주도했던 엔엘 노선에 대한 반발도 작용했다. “주체사상이나 북한 문제에 거부감이 있었다. 그래서 ‘엔엘 노선에 반대하는 거지, 운동 자체를 부정하는 건 아니다’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했던 것 같다. 지금 돌아보면 다 핑계일 뿐이다.” 그렇게 풀려난 뒤 배씨 주변엔 항상 대공분실 형사들이 따라붙었다. 서너 명이 배씨 주변에 잠복하며 누구에게 전화가 걸려오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체크했다. 그때 자신을 담당했던 홍○○ 경감과 김○○ 경장의 이름을 배씨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전화가 왔다. 친구 박금섭씨였다. 배씨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서 그냥 전화를 끊었다. 형사들은 배씨를 다시 남영동으로 데려가 ‘왜 협조 안 하냐’고 윽박질렀다. 이제 다른 선택은 없었다. 다시 박금섭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1986년 10월 무렵이었다. 박금섭씨는 “한양대에서 배씨를 만나기로 했는데, 형사들이 같이 나와 있었다. 그 자리에서 붙잡혀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갔다”고 말했다. 박씨는 구속됐다 석방된 뒤인 1988년 여름 우연히 길에서 배씨를 마주쳤다고 한다. “배씨가 나한테 잘못했다고 하더라. 그래서 프락치 활동한 거 양심선언을 해라, 그러면 친구들도 용서할 거라고 했다. 그렇게 하겠다고 철석같이 약속을 했는데, 결국 안 했다.”
경찰은 고급 망원(정보원)인 배씨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오문규’란 가명으로 치안본부 산하 내외정책연구소의 신분증을 만들어서 배씨에게 줬다. 경쟁 관계인 안기부가 배씨를 채가는 걸 막으려는 의도였다. 그때 경찰과 안기부는 ‘강철서신’ 저자 김영환씨를 잡으려 혈안이 되어 있었다. 홍 경감은 배씨에게 김씨와 연락을 해보라고 계속 다그쳤다. 김영환씨는 86년 11월24일 부산에서 안기부에 붙잡혔다. 김씨는 “내가 검거된 건 배씨와는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김씨가 붙잡힌 뒤 배씨는 더이상 이런 활동을 않겠다고 경찰에 말했다. 배씨는 “김영환씨도 잡혔으니 이제 그만하겠다고 했다. 박종철씨가 숨지고 얼마 뒤인 1987년 2월쯤이었다. 구학련 쪽에서도 나를 눈치챈 거 같아 더이상 활동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배씨가 프락치 활동을 접은 시기는, 그와 동료들의 기억이 약간 엇갈린다. 장유식씨나 김관영씨 등의 기억을 보면, 배씨는 4월 무렵까지는 경찰에 협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후 배씨는 1987년 가을 한국외국어대 대학원에 진학했다. 대학원을 졸업한 뒤엔 유럽의 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1989년이었다. 안기부에 취직해 안기부 장학금으로 유학 갔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했다. 배씨는 항상 감시받는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유럽에 있을 때 한국 남자 두 사람이 시기를 달리 하며 내 주변에서 공부를 했다. 유학 온 학생들이라고 하기엔 좀 미심쩍은 구석이 많았다. 확인할 수는 없지만 나를 감시하려고 보낸 게 아닌가 생각했다”고 배씨는 말했다.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는데”
배씨는 유럽에서 10년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잠시 국내로 들어왔다가 지금은 다시 해외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 그는 “유럽 유학 시절부터 해외를 돌고 있다. 아무래도 ‘그 일’이 있으니까 국내에서 살기는 좀 꺼려진다. 해외에서도 가끔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 나를 알아보곤 가까이 오질 않는다. 그렇게 계속 살았다”고 말했다. 과거는 여전히 그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친구들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구할 생각이 없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마음속엔 항상 미안함과 죄스러움을 갖고 있다. 친구들한테 솔직하게 토로하고, 야단치면 야단맞고, 그러고 싶다. 친구들이 나를 부른다면 가겠는데, 내가 먼저 가서 미안하다고 할 자신은 없다. 서클 친구들을 만나고 싶다.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는데, 많이 기억나고 그립다. 유약하지 않았다면, 좀더 강인했더라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텐데…, 운동을 하려면 굳은 마음을 먹었어야 하는데 나는 그러질 못했다. 그때 (경찰에) 협조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안 생겼을 텐데…, 후회를 항상 한다.”
친구들은 그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배씨로 인해 경찰에 붙잡힌 김관영씨는 아직 용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김씨는 “그동안 반성을 하고 용서를 구할 수 있는 기회는 많았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운동이란 게 인간에 대한 신뢰를 갖고 하는 건데, 더구나 엔엘이 가장 강조한 게 품성인데, 그런 신뢰가 깨져 버렸다. 나에게 그 상처는 쉽게 아물 수가 없다”고 말했다. 벌써 30년 전 일이지만, 구학련을 함께했던 동료들 사이엔 아직 넘을 수 없는 강이 흐른다. 독재정권의 비인간적인 프락치 공작은 누군가에겐 회한으로, 누군가에겐 용서할 수 없는 아픔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국회 내무위원회 소속 의원들이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벌어진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을 둘러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99년 6월22일 서울대 학생회관에서 국가정보원의 프락치 매수 공작을 강요받았던 이 학교 사범대생 강성석씨(오른쪽)가 양심선언 기자회견을 열어 그동안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장철규 기자 chang21@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