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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1990년 ‘한국을 움직이는 단체’ 3위의 주인공

등록 2016-09-02 19:16수정 2016-09-02 19:48

[토요판] 박찬수의 NL 현대사
(10) ‘구국의 강철대오’ 전대협 - 1
1990년 5월19일 전남대 대운동장에서 경찰의 원천봉쇄 속에 전국에서 모인 대학생 3만여명이 전대협 4기 출범식을 열고 있다. 학생운동의 주도권이 서울에서 지방으로 옮겨가는 상징적 장면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1990년 5월19일 전남대 대운동장에서 경찰의 원천봉쇄 속에 전국에서 모인 대학생 3만여명이 전대협 4기 출범식을 열고 있다. 학생운동의 주도권이 서울에서 지방으로 옮겨가는 상징적 장면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찬바람이 옷깃 틈새로 스며드는 1989년 3월 어느 날 새벽, 서울 왕십리의 한양대 학생회관에 하나둘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서울뿐 아니라 광주, 부산, 대전 등 전국에서 올라온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중앙 간부들이었다. 학생회관 4층에 전대협 사무실의 문을 연 걸 축하하는 모임이었다. 1987년 6월 항쟁 직후에 단일 학생조직인 전대협을 결성했지만, 1988년 2기 때까지 자체 사무실도 없고 집행 기능도 취약했다. 1989년 3월 한양대 학생회관 한켠에 사무실을 마련한 건, 전대협 위상의 질적 도약을 예고하는 상징과 같았다. 이후 수년간 전대협은 통일 운동과 반정부 투쟁을 주도하며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89년 6월, 분단 이후 처음으로 평양에 남한 학생 대표를 파견했고, 1991년 5월 민자당 창당 반대 거리시위엔 전국에서 10만여명의 학생을 조직적으로 동원했다. 이 시기가 한국 학생운동의 전성기였고, 엔엘(NL) 운동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소수 서클에서 학생회 조직으로 이동

개소식 며칠 뒤 한양대 학생회관의 전대협 사무실 문에는 8절지 크기의 종이에 ‘구국의 강철대오 전대협’이라고 손글씨로 쓴 명패가 붙었다. ‘구국의 강철대오’는 전대협을 상징하는 구호가 됐다. 이 명칭을 처음 만든 건 전대협 중앙정책위원장이던 정은철(연세대 85학번)씨였다. 정씨는 “전대협의 성격을 분명하게 외부에 드러내고 내부 구성원들의 가치 공유를 위한 일종의 이미지통합(CI) 작업이었다. 그 이전까지 학생운동 조직에서 이런 시도는 없었다. 내가 지도부에 제안을 했고 직접 구호를 만들었다. 1988년 서총련(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을 발족한 뒤 ‘구국의 횃불’이란 구호를 썼는데, 이걸 본떠서 ‘구국의 강철대오’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전대협진군가’가 만들어진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일어섰다 우리 청년 학생들 민족의 해방을 위해
뭉치었다 우리 어깨를 걸고 전대협의 깃발 아래
강철 같은 우리의 대오 총칼로 짓밟는 너
조금만 더 쳐다오 시퍼렇게 날이 설 때까지
아아 전대협이여 우리의 자랑이여
나가자 투쟁이다 승리의 그 한길로

윤민석(한양대 84학번)씨가 작곡한 이 노래를 수만명이 일사불란하게 부르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그 무렵 전대협 집행국에서 일했던 한 인사(84학번)는 “1988년 2기 때까지만 해도 전대협 의장이 등장할 때 학생들이 ‘와’ 하는 함성을 지르는 정도였다. 1989년부터 달라졌다. 3기 의장인 임종석씨가 등장하면 수천, 수만명의 학생이 기립해서 ‘구국의 강철대오 전대협’을 외치며 전대협진군가를 불렀다. 전대협과 전대협 수장인 의장의 권위를 추앙하기 위한 의식과 같았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곧 익숙해졌다. 내부적으론 의장을 중심으로 단결 의식을 고취하고 대외적으론 전대협의 조직력과 규율을 드러냈다. 권위를 중시하는 엔엘 그룹의 독특한 문화와도 연관이 있었다”고 말했다. 진보 진영 내부에선 ‘어린 학생들이 너무 심하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어쨌든 일반 국민에게 전대협을 각인하는 데는 매우 효과적이었다.

전대협 사무실이 한양대에 차려진 건, 그해(1989년) 3기 전대협 의장을 임종석 한양대 총학생회장이 맡았기 때문이다. 서울대나 연·고대가 아니라 한양대가 전국 학생조직을 이끌게 된 건 의미심장했다. 학생운동이 소수 엘리트의 서클 중심에서 벗어나 학생회라는 대중조직 중심으로 변화했음을 뜻했다. 대중운동을 중시하는 엔엘 사조의 확산이 이런 움직임을 가속화했다. 정보 격차도 사라졌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운동이론의 정립과 확산은 서울대 등 일부 메이저 대학에서 만들어져 제한적으로 돌려보는 팸플릿에 많이 의존했다. 한국 변혁운동에서 북한의 중요성을 재조명한 ‘강철서신’이 1986년 봄 광범위하게 유포된 뒤 상황은 달라졌다. 북한 ‘구국의 소리’ 방송을 청취하는 팀이 전국의 거의 모든 대학에 자발적으로 생겨났다. 운동이론 정립을 굳이 서울대 등에 의존할 필요성이 사라졌다.

전대협 의장을 1기(이인영 고려대 총학생회장)와 2기(오영식 고려대 총학생회장) 때와 달리 한양대가 맡은 건 현실적 세력관계의 변화를 반영한 측면이 컸다. 그해 연세대 총학생회장엔 엔엘 계열이 아니라 피디(PD, 민중민주 또는 평등파라 부른다) 계열 학생이 당선됐다. 연세대뿐 아니라 고려대도 엔엘과 피디의 학내 영향력이 엇비슷해, 총학생회와 단과대 학생회 주도권이 매년 바뀌었다. 반면에 한양대는 1987년 이후 엔엘 계열이 총학생회와 단과대 학생회를 확고하게 틀어쥐고 있었다. 1989년 한양대 행당캠퍼스의 50여개 학과 가운데 사회학과 하나만 빼고 모든 학과의 과 대표를 엔엘 계열 학생이 차지했다. 한양대와 경희대, 건국대 등 특히 서총련 동부지구에서 엔엘은 초강세를 띠었다. 다양한 분파로 나누어진 서울대나 연·고대에 비해, 이들 대학에서 엔엘계의 집행력과 학생 동원력이 훨씬 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현실적인 세력관계의 변화가 학생운동 주도권의 한양대 이동, 그리고 이듬해엔 사상 처음으로 서울에서 지방(4기 전대협 의장 송갑석 전남대 총학생회장)으로 넘어가는 데 영향을 줬다. 1987년 6월 항쟁과 엔엘 사조 확산을 계기로 학생운동은 서울 명문대 중심의 엘리트 운동에서 벗어났다. 평상시에 10만명의 학생을 조직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6월항쟁 직후 단일 학생조직 출범
89년 3기 때 영향력 급속히 확대
수만명 일어서 ‘진군가’ 합창 열기
평시 10만명 조직동원 역량 갖춰
한양대·전남대 등으로 주도권 이동

‘전업 활동가’ 중심의 집행부 구성
일반학생들의 자발적 헌신도 한몫
밥값·교통비 등 갹출해 행사 참석
‘임길동’ 별명 얻은 3기 의장 임종석
경찰 수배망 피하며 대중적 인기도

임종석 전대협 3기 의장이 1989년 6월 임수경씨가 남한 학생 대표로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방북했다고 발표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임종석 전대협 3기 의장이 1989년 6월 임수경씨가 남한 학생 대표로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방북했다고 발표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2천명 포위망 뚫고 연단에 깜짝 등장

1989년 초 임종석 한양대 총학생회장을 전대협 의장으로 선출할 때 분위기를 당시 한양대 총학생회 간부는 이렇게 말했다. “임종석씨를 전대협 의장으로 밀었지만 처음엔 될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다. 전대협 내부에선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서울대, 연·고대 이외의 학교로 전국 학생운동의 지도부가 옮아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침 연세대에서 엔엘 계열 후보가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떨어졌고 이게 결정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했다. 학교 쪽의 은근한 ‘지원’도 한몫했다. 한양대는 ‘말썽만 부리지 말라’며 총학생회의 자율권을 인정하는 편이었다. 학생회관 사무실을 거의 총학생회 마음대로 운용할 수 있었다. 전대협 사무실을 한양대에 처음 설치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였다. 임종석씨가 전대협 의장이 되자 학교 쪽도 은근히 좋아했다. 학교 명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대학총장협의회에서 한양대 총장의 발언권이 세졌고, 대학입시의 합격선이 올라갔다는 얘기도 들었다.”

한양대로 학생운동 지도부를 옮긴 것은 모험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대성공을 거뒀다. 그해 전대협은 한국을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단체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학번 체계나 학교 서열 대신에 오직 의장과 지도부를 중심으로 모든 일을 꾸미고 실행하는 단일한 집행력, 그리고 무엇보다 일반 학생들의 헌신적인 태도가 학생운동의 전성기를 일궈냈다. 북한 수령론을 연상케 하는 ‘전대협 의장 옹위론’이라든지 학습보다 태도를 중시하는 ‘품성론’이 적어도 이때까지는 운동의 확산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1990년대 초반 서총련과 전대협 집행국에서 일했던 한 인사(84학번)는 일반 학생들의 자발성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전대협 출범식이나 평양축전 출정식엔 전국에서 수만명의 학생이 참석했지만 전대협 중앙의 재정 부담은 그리 크지 않았다. 며칠간 이어지는 행사 기간 밥값은 학생 개개인이 스스로 댔다. 일종의 자원봉사 개념이었다. 지방에서 서울까지 오는 교통편은 각 대학 총학생회에서 버스를 대절하는 식으로 책임을 졌다. 피디 계열이 총학생회를 잡고 있는 학교에선 엔엘 계열 학생들이 돈을 갹출해서 버스를 빌렸다. 숙박은 행사 주최 학교의 학생회관과 단과대 동아리방을 활용했다. 문화공연 등을 거창하게 했지만 기획과 준비 모두 각 학교 문화패의 자원봉사로 꾸렸다. 실제 돈이 들어간 건 무대 설치와 일부 음향설비 대관 등인데, 모두 합쳐봐야 1천만원을 넘지 않았다.”

임종석 의장 개인의 능력도 한몫했다. 호감을 주는 외모와 성격을 지닌 임씨는 수개월간 경찰 수배를 피해 종횡무진 활약해 대중스타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그에겐 ‘임길동’이란 별명이 붙었다. 경찰 포위망이 좁혀지면 수많은 학생이 ‘내가 임종석’이라 외치면서 경찰 시선을 분산시켜 그의 탈출을 도왔다. 1989년 10월31일 조선대에서 열린 ‘이철규씨 장례식을 위한 전대협 장례준비위 발족식’은 그런 대표적인 사례로 회자됐다.

조선대생 이철규씨는 1989년 5월 민주화운동 관련으로 수배를 받다가 광주 제4수원지 부근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조선대생들은 사인 규명을 요구하며 몇 달 동안 투쟁하다 결국 10월31일 장례식을 치르기로 하고 장례위원회를 발족했다. 장례위원장은 임종석 전대협 의장이었다. 특급 수배자인 임씨가 그 행사에 나타나리라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경찰은 전경 2천여명을 동원해 조선대를 에워싸고 언제든지 진입할 태세를 갖췄다. 집회의 마지막 순서는 선언문 낭독이었다. 검은 상복을 입은 임종석씨가 갑자기 연단에 나타나 선언문을 읽기 시작했다. 참석자들의 환호가 터졌고, 길 가던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임씨의 출현 소식에 도서관과 교실에 있던 학생들까지 몰려들어 참석자는 금세 수천명으로 불어났다. 곧 경찰이 진입했다. 학생전투조인 오월대(전남대)와 녹두대(조선대) 수백명이 임씨를 에워싸고 전경들과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그때 임씨는 길 안내를 맡은 학생 2명과 이미 조선대를 빠져나간 상태였다고 한다. 전대협 집행국에서 일했던 인사는 “임종석씨가 어느 대학 집회에 참석하면 그 대학에서 ‘가짜 임종석’을 50여명 모집해 집회가 끝난 뒤 임종석씨의 탈출을 돕게 했다. ‘임길동’이란 말이 허튼 얘기가 아니었다. 전대협의 전술 운용이 경찰보다 한 수 위이던 시절이었다”고 말했다.

1991년 ‘분신정국’을 정점으로 내리막

이게 가능했던 건, 임종석씨 보호를 비롯해 집회 및 홍보 등을 총괄하는 전대협 집행국의 역량이 과거에 비해 비약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이인영씨가 의장이던 1987년 1기 때만 해도 전대협 중앙엔 상설 집행부서 없이 지역간 연락을 맡는 연락사무국만 뒀다. 그래서 집회나 행사를 하려면 각 학교 담당자들이 약속을 정하고 모여서 행사 준비를 논의해야 했다. 1989년 3기 때부터 일선 대학에서 뽑힌 ‘전업 활동가’들이 전대협 중앙의 집행국을 구성하고 전체 계획과 일정을 조정했다. 중앙에 정책국·사무국·투쟁국·홍보국·문화국 등 집행부서와 조국통일위원회를 두었는데, 부서마다 5~6명에서 많게는 10명 정도의 학생들이 있었다. 전대협 중앙에서만 적게는 수십명, 많게는 100명 가까운 전업 학생운동 활동가들이 활약했던 셈이다. 서총련(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이나 남총련(광주전남지역총학생회연합), 부울총협(부산울산지역총학생회협의회)과 같은 지역조직도 별도의 집행부서를 뒀다.

1990년 <시사저널> 여론조사에서 전대협은 여당과 야당에 이어 ‘한국을 움직이는 단체’ 3위에 올랐다. 전경련이나 대기업보다 앞선 순위였다. 수만명의 학생이 일사불란하게 ‘구국의 강철대오’를 외칠 때, 전대협은 한국 사회를 바꿀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전성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1991년 ‘분신 정국’과 강경대씨 사망 사건을 정점으로 영향력이 꺾였고, 1996년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전대협 후신)의 연세대 농성 사건을 계기로 학생운동은 급격히 퇴조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무엇이 학생운동의 결정적인 후퇴를 가져왔을까. 조직과 영향력 확대에 기여했던 엔엘 사조는 이제 학생운동에 어떤 질곡으로 작용한 것일까. <계속>

박찬수 논설위원
박찬수 논설위원
▶ 박찬수 <한겨레> 논설위원. 1989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해 청와대 출입기자와 워싱턴 특파원, 정치부장, 편집국장을 지냈다. 저서로 청와대와 백악관의 권력작동 방식을 비교한 <청와대 vs 백악관>(2009년)이 있다. 82학번으로 5공 시절 군에 강제징집됐다 돌아와보니 대학가가 온통 엔엘(NL) 열풍에 휩싸였던 기억을 갖고 있다. 사회부 신참기자 시절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를 취재하며 무엇이 수많은 학생들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의문을 가진 게 20여년이 지나 이 시리즈를 쓰는 계기가 됐다. 격주로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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