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2월24일 오후 5시 이희호와 김대중은 청와대를 떠나 서울 동교동으로 돌아왔다. 5년 임기를 무사히 마친 대통령 부부에게 시민들은 거리에 나와 태극기로 환송했고, 동교동 주민들은 꽹과리와 꽃다발로 환영해줬다. <한겨레> 자료사진
제16대 대통령 선거 투표 하루 전날인 2002년 12월18일 저녁 서울 종로에서 노무현과 정몽준의 마지막 공동 유세가 열렸다. 청중 가운데 한 사람이 ‘다음 대통령 정몽준’이라고 쓴 피켓을 들었다. 노무현은 “다음 대통령은 경쟁을 통해서 올라와야지 그냥 주는 게 아니다”라며 “속도위반하지 말라”고 말했다. 정몽준은 ‘단일화 정신’을 훼손했다며 이날 밤 노무현 지지를 철회했다. 노무현은 19일 0시5분 서울 평창동 정몽준의 집을 찾아갔으나 만나지 않겠다는 말을 듣고 발길을 돌렸다. ‘정몽준 폭탄’이 터졌다. <조선일보>는 19일 아침 신문에 “정몽준, 노무현 버렸다”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노무현 지지자들의 투표참여 독려로 투표 당일 내내 인터넷이 달아올랐다.
12월19일 치러진 대통령 선거 결과는 노무현의 극적인 승리였다. 노무현은 유효투표의 48.9%(1200만여 표)를 얻어 46.6%(1143만여 표)에 그친 한나라당 후보 이회창을 눌렀다. 노무현은 광주에서 최고득표율(95.2%)을 올리고, 대구에서 최저득표율(18.6%)을 기록했다. 반대로 이회창은 대구에서 최고득표율(77.8%), 광주에서 최저득표율(3.6%)을 기록했다. “노무현 후보가 승리해 정권 재창출을 이루어냈지요. 우리가 이긴 것만큼이나 기뻤어요. 남편은 선거에 관여하면 안 되니까 속으로만 애를 태우다가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니 말할 수 없이 기뻐했지요.”
노무현은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 12월23일 청와대를 방문해 김대중을 만났다. 김대중은 현안인 북한 핵 문제를 찬찬히 설명했다. 노무현은 햇볕정책을 지속하겠다고 말했다. 2003년 1월5일 김대중과 이희호는 대통령 당선자 부부를 청와대 만찬에 초청했다. “그날 권양숙 여사가 청와대로 왔어요. 권양숙 여사는 1996년 종로에서 노무현 후보가 출마했을 때 처음 만났지요. 청와대 관저와 제2부속실을 안내하고 설명했어요. 아주 겸손한 분이었어요.”
보수언론에서 김대중과 이희호가 퇴임한 뒤 돌아갈 동교동 집을 ‘아방궁’이라고 불렀다. 이희호는 새집을 둘러보고 와서 둘째아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집이 다 되었다고 해서 가보았는데 살고 싶지 않은 집이어서 실망했다. 예전 동교동 집보다 답답하다. 우선 주위에 높은 건물이 둘러쳐 있고 정원이 반으로 줄어 개 한 마리도 기를 수 없게 되었다.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구나. 다만 주방이 전보다 조금 넓어진 것뿐이다. 그러나 그 집밖에 갈 곳이 없으니 가서 살기는 해야겠지.”
북한이 미국의 조지 부시 정권과 갈등을 빚은 끝에 2003년 1월10일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했다. 미국이 1994년 제네바합의의 ‘북한 핵 동결’ 전제조건이었던 중유 공급을 직전 12월에 중단한 것이 직접적인 이유였다. 미국 상원의원 에드워드 케네디는 워싱턴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북한 핵 위기는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무시한 부시 행정부가 초래했다”고 부시의 잘못된 정책을 비판했다.
1월17일 연세대 총장 김우식이 아태평화재단을 인수하여 김대중도서관을 만들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남편이 아태재단을 연세대에 기증했어요. 서재에 있던 남편의 책 1만6000권과 자료들도 함께 기증했지요. 대통령 이름이 붙은 도서관으로는 아시아에서 처음이었다고 해요.”
이희호는 청와대에서 지낸 시간을 돌아보았다. “청와대 생활이 불편했지요. 만나고 싶은 사람을 자유롭게 만날 수 없었어요. 하고 싶은 일이 많았는데 대통령 부인이 쓸 예산이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어요. 예산을 어느 정도는 배정해줘야 나름대로 국민이 바라는 일을 할 수 있잖아요. 대통령 부인이라고 해서 대통령 뒤만 졸졸 따라다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같이 갈 일도 있지만 독자적으로 해야 할 일도 있으니까요. 가난한 여성들, 소외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활동을 하고 싶었는데 돈이 없어서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계속 남았어요.”
김대중의 퇴임을 앞두고 ‘대북 송금 사건’이 터졌다. ‘현대가 4억 달러를 대출받아 금강산 관광 대가로 보냈다’는 한나라당의 주장이 일으킨 파문이 눈덩이처럼 커졌다. “야당이 정상회담을 돈으로 샀다고 공격했어요.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 쪽에서는 검찰수사가 불가피하다고 했지요. 당선자 비서실장이 ‘김대중 정권에서 털고 가야 한다’는 말도 했고요. 남편은 그 일로 마음고생을 많이 했어요.”
김대중은 2월14일 ‘국민에게 드리는 말씀’을 발표했다. “정부는 남북 정상회담 추진 과정에서 북한 당국과 많은 접촉이 있던 현대 쪽의 협조를 받았습니다. 현대는 대북 송금의 대가로 북쪽으로부터 철도·전력·통신·관광·개성공단 등 7개 사업권을 얻었습니다. 정부는 그것이 평화와 국가 이익에 크게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실정법상 문제가 있지만 이를 수용했습니다.” 김대중은 “공개적으로 문제가 된 이상 진상을 밝히고 책임을 지겠다”고 말하고, 남북 긴장 완화와 국익 증진의 기회가 훼손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부탁했다. “남편이 간절히 호소했는데도, 야당이 계속 이 문제를 키우면서 특별검사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했지요.” 김대중이 호소문을 발표한 그날 금강산 육로 시범 관광이 시작됐다. 동해안 휴전선이 열리고 남쪽 사람들을 실은 버스가 북쪽으로 넘어갔다.
2월23일 이희호는 하루 종일 짐을 싸느라 바빴다. 지난 5년을 되새겼다. “국민의 정부가 이루어낸 일이 참 많았어요. 남북정상회담을 했고, 국가인권위원회를 만들고 여성부를 신설했지요. 국가부도사태를 극복했고요. 그런데 외환위기 충격을 수습하느라 서민의 삶을 충분히 돌보지 못했어요. 외환위기로 허물어진 중산층을 복원하는 것도 바란 만큼 되지 않았고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지요. 남편도 5년 단임이라는 시간이 너무 짧다고 여겼어요. 1년6개월만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많은 문제를 해결했을 텐데 그걸 못했다고 아쉬워했지요. 짐을 다 쌌는데 허탈하고 텅 빈 것 같은 마음이 들었어요. 우리가 잘못한 일에 대해 용서를 빌고, 새로운 분이 잘하도록 도와주시고 바른길로 인도해주시기를 기도했지요.”
앞서 2월10일 김대중과 이희호는 공동정부에서 여당 대표를 지낸 민주당과 자민련 인사들과 함께 청와대에서 고별 만찬을 했다. 이희호는 그 자리에서 아껴두었던 말을 꺼냈다. “지난 5년을 돌아보니 아쉬움이 많습니다. 남편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남편이지만 저도 찬사를 보내고 싶습니다. 제가 옆에서 지켜본 바에 의하면 항상 밤잠을 설쳐가면서 나라와 민족을 진심으로 생각하고 사랑해온 것만은 사실입니다.”
2월24일 아침 이희호와 김대중은 국립묘지를 참배했다. 김대중은 마지막 국무회의 시작 전에 ‘위대한 국민에게 바치는’ 퇴임인사를 했다. “국민 여러분과 저의 정부는 지난 5년 동안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 국운 융성의 큰 기틀을 잡았다고 생각합니다. 일생 동안, 특히 지난 5년 동안 저는 잠시도 쉴 새 없이 달려왔습니다. 이제 휴식이 필요합니다. 저는 우리 민족의 장래에 큰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반드시 세계로부터 존경받는 위대한 국가로 성장할 것입니다. 우리 국민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경제대국의 꿈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남북 간의 평화적 통일도 언젠가는 실현시키고 말 것입니다.” 오후 5시 이희호와 김대중은 청와대를 떠났다. “떠나는 것은 언제나 슬픈 일이에요. 5년 동안 함께 고생한 직원들이 모두 나와 인사를 했어요. 시민들이 연도에서 태극기를 흔들었어요. 동교동에 오니 사람들이 꽹과리를 치면서 환영해주었는데, 흥겨운 소리를 들으니 다시 마음이 밝아졌지요.”
2003년 2월25일 노무현이 16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김대중은 몸이 불편했지만 이희호와 함께 취임식에 참석했다. 노무현은 취임사에서 “개혁과 통합을 바탕으로 삼아 국민과 함께하는 민주주의, 더불어 사는 균형발전사회,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시대를 열어나갈 것”이라고 선언했다. 노무현 정부에 대한 국민의 기대는 높았다. 취임 직후 여론조사에서 일반 국민의 92%가 노무현의 ‘참여정부’에 기대를 걸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3년 2월25일 김대중과 이희호는 퇴임 첫 행사로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했다. 2002년 12월 극적인 승리를 거둔 노 후보의 당선을 누구보다 기뻐했던 부부는 퇴임 직전 터진 대북송금 사건에 대한 새 정부의 수사 방침 탓에 몸도 마음도 편치 못했다. ♣H6a김대중평화센터 제공
노무현이 취임한 다음날인 2월26일 한나라당이 대북송금사건 특검법을 통과시켰다. 여당인 민주당은 대통령이 특검법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3월14일 임시국무회의가 열렸다. 국무위원 가운데 한 사람을 빼고 모두 특검법 공포에 반대했다. 통일부 장관 정세현은 “대북 사업 추진 과정이 공개되면 남북대화와 민간교류가 중단될 수 있다”고 반대했다. 이날 노무현은 특검법을 원안대로 공포했다. “당시 남북관계 개선을 바라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특검법을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이 우리에게 이야기도 하지 않고 특검법을 공포했어요. 남편은 안타까워하고 속상해했지요. 그래도 밖으로는 말을 하지 않았어요.”
3월20일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했다.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감추고 있다는 것이 이유였지만 근거가 희박했다. 명분 없는 침략에 세계가 미국을 비난했다. 조지 부시 정권을 거치는 동안 미국의 도덕적 위상은 급속히 추락했다. 미국의 요구를 받은 한국은 이라크에 공병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4월22일 김대중과 이희호는 청와대에서 부부 동반 만찬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그 자리에서 ‘현대 대북 송금이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어요. 그 때문에 남편이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남편은 현대의 대북 송금이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지요. 즐거운 자리가 되지 못했지요.” 특검의 활동이 시작됐다. ‘국민의 정부’ 시절 금융감독원장 이근영, 청와대 경제수석 이기호, 청와대 비서실장 박지원이 구속됐다. “우리는 그분들이 죄인이 아니라 통일일꾼이라고 생각했지요.” 대북 송금과 관련해 조사를 받던 현대아산 회장 정몽헌이 8월4일 자신의 집무실에서 투신자살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6·15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는 성명을 내 “특검이라는 이름으로 애국이 범죄로 전도되는 비이성적 상황이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2003년 5월11일 김대중은 퇴임 뒤 첫번째 입원을 해 심혈관 확장수술과 함께 신장투석 치료를 시작했다. 5월16일 연세대세브란스병원에서 퇴원하면서 주치의(장남식)와 함께 한 모습.
김대중의 건강이 나빠졌다. 5월11일 김대중은 신촌 연세대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다. 협심증 증세였다. 5월12일 김대중은 심혈관 확장 수술을 받고 처음으로 혈액 투석을 받았다. “남편은 청와대에 있는 동안 신장이 나빠져 2002년 12월에 혈액 투석을 받아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어요. 그런데 투석을 한 번 하면 다섯 시간 동안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 해요. 그래서는 정상적인 집무를 할 수 없다고 해서 미루었지요.” 5월16일 퇴원한 뒤로 김대중은 정기적으로 투석치료를 받았다. “한 주에 세 번 투석을 했지요. 남편이 의식을 잃기도 해서 처음에는 두려웠어요. 그렇게 이틀에 한 번씩 마지막까지 5년이 넘도록 투석을 받았지요.”
2003년 5월 들어 ‘대북송금’ 수사 등으로 노심초사하던 김대중은 끝내 병원에 입원해 심혈관 확장 수술을 받고 신장 투석도 시작했다. 이 때문에 5월31일 통일맞이 늦봄 문익환 기념사업회(이사장 이재정·왼쪽)가 주는 늦봄통일상은 이희호가 대신 받아야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5월31일 사단법인 통일맞이 늦봄 문익환 기념사업회가 주는 제8회 늦봄통일상 수상자로 김대중이 결정됐다. “남편 건강이 좋지 않아 내가 대신 가서 받았어요. 문익환 목사님이 생전에 남편과 함께 민주화운동을 하셨잖아요. 기쁜 마음으로 받았지요.” 김대중은 8월에 만해대상 평화부문상을 수상했다. 8월8일 이희호는 일본 도쿄 국제문화회관에서 열린 김대중 납치 30돌 기념식에 참석했다. “그때도 남편의 기력이 다 회복되지 않아 내가 가서 남편의 메시지를 전달했지요. 진상을 이제라도 밝혀 공식문서에 기록해야 한다고 했지요.”
2003년 9월 노무현 대통령을 탄생시킨 새천년민주당이 분당 사태를 맞았다. 9월19일 신당파 의원 37명과 한나라당 탈당파 의원 이부영·이우재·김영춘·안영근·김부겸이 새 교섭단체인 국민참여통합신당을 출범시켰다. 9월29일 노무현도 민주당을 탈당했다. “분당 과정에서 많은 갈등이 있었어요. 남편은 노무현 대통령이 왜 그렇게 조급하게 서두르고 일부러 적을 만드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어요. 산토끼를 잡으려다 집토끼마저 잃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어요. 하지만 말을 아꼈지요. 남편은 대통령에서 퇴임한 뒤로는 국내 정치에서 한발 떨어져 남북통일과 세계평화에 힘쓰겠다고 했거든요.” 11월11일 국민참여통합신당 의원들과 개혁국민정당에서 탈당한 김원웅·유시민이 주축이 돼 열린우리당이 창당됐다. 11월21일 <한겨레>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지지율은 한나라당 23.7%, 새천년민주당 18.2%, 열린우리당 11.7%로 나타났다.
2003년 10월6일 정몽헌의 부인 현정은을 포함해 민간인 1100명이 류경정주영체육관 개관 행사에 참가하러 분단 반세기 만에 처음으로 경의선 육로를 거쳐 평양을 방문했다.
2003년 11월3일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퇴임 직전 1월 김대중은 장서 1만6천권과 자료들을 포함해 아태평화재단을 연세대에 기증해, 아시아 첫 대통령 이름의 도서관을 만들었다. 11월14일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도 방문해 축하해줬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3년 11월14일 퇴임한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이 서울 동교동 김대중도서관을 찾아 김대중과 환담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4년 8월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김대중도서관을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박근혜는 김대중에게 부친 박정희시대 겪은 탄압과 고초에 대해 딸로서 사과한다고 말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11월3일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이 개관했다. 대통령 노무현과 정당대표·외교사절을 포함해 300여명이 참석했다. “남편은 김대중도서관이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세계평화에도 기여하기를 바랐지요.”
개관식에서 노무현은 김대중이 외환위기 극복, 지식정보화 기반 구축, 남북정상회담의 업적을 남겼다고 열거하고 이렇게 말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세계 각국의 평가는 우리 일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역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민주주의와 평화, 통일에 대한 열정과 헌신을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11월14일 퇴임한 빌 클린턴이 김대중도서관을 찾아왔다. “김대중도서관 개관 이후로 많은 손님이 방문했어요. 클린턴 대통령이 왔을 때는 참 반갑게 만났지요.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도 왔는데, 유신 시절에 남편이 겪은 고초에 대해 사과했어요.”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