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박의 대표주자로 꼽히는 유승민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16일 의원총회에서 치러진 원내대표 선거 결과를 심각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황준범 정치데스크 jaybee@hani.co.kr
촛불 광장에 ‘박근혜 퇴진’과 함께 쏟아진 구호는 ‘새누리당 해체’였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직후 <한겨레>가 정치·경제·사회·문화계 인사 30여명에게 새누리당을 향한 조언을 구했을 때 나온 답도 마찬가지였다. “친박은 정계은퇴하고 당 주도세력이 바뀌어야 한다”, “새누리당은 없어지고, 건전한 보수정당으로 재탄생해야 한다”, “다음 정권에 욕심내지 마라”….
이런 요구는 너무도 상식적이지만, 이에 대한 새누리당의 응답을 확인해볼 수 있는 첫 가늠자였던 16일 원내대표 경선은 친박의 승리, 비박의 패배로 나타났다. 후보 인물 구도의 패착이었다느니, 선거 전략이 없었다느니 여러 해설이 나오지만, 핵심은 ‘바깥세상이야 뭐라든 새누리당은 박근혜당’이라는 점이다.
새누리당은 말 그대로 박근혜가 만들고(2012년 2월 한나라당에서 개명), 박근혜가 키워온(18대 대선, 19·20대 총선) 박근혜의 당이다. 두 차례의 공천을 거쳐 당 소속 의원의 절대다수가 친박으로 채워졌다. 지난 4·13 총선에서 새누리당은 국회에서 과반의 지위는 잃었을지언정, 당내 친박은 더욱 두터워졌다. 이 때문에 5월 원내대표 경선에서 친박계는 총선 패배 책임론 속에서도 자신들이 원하는 원내대표(정진석)를 세웠고, 8·9 전당대회에서도 이정현 대표 등 최고위원회를 친박 일색으로 채우는 데 성공했다. 심지어 박 대통령 탄핵안이 통과됐는데도 원내대표 경선에서 또 이겼다. 총선 패배와 탄핵을 겪고도 새누리당은 그 전과 후 달라진 게 없다. 어떤 태풍도 지진도 미치지 않는 고요한 새누리섬이다.
이런 사태의 원인은 박근혜와 친박이지만, 더이상 그들을 비판하는 것은 지겹고 의미없다. 이제 친박이 아니라 비박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비박계 숫자가 크게 부족한 것도 아니다. 탄핵과 이번 원내대표 선거에서 확인했듯이 60명 안팎이 비박으로, 친박에 육박한다. ‘보수 혁신’이라는 명분과 여론의 지지에서도 우위에 있다. 그런데도 비박은 최근의 당내 대결에서 패배를 거듭해왔다. 왜 그럴까. 콘크리트처럼 똘똘 뭉친 친박에 비해, 비박은 각자의 앞날을 계산하며 모래알처럼 움직여왔다. 탄핵 국면에서 비상시국위원회를 꾸려 공동행동을 했지만, 그 안에서도 끊임없이 ‘탈당하자, 말자’, ‘탄핵하자, 4월 퇴진을 믿어보자’ 등 이견을 노출하며 우왕좌왕했다. 비박의 축이라는 김무성, 유승민, 남경필(탈당) 쪽은 서로를 향해 “결정적 순간에 당신이 무얼 했냐”, “왜 나를 비난하냐”며 뒤에서 손가락질을 해왔다. 그사이 친박은 모여서 “배신하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비박과의 싸움에서 ‘밀고 당기기’ 전략을 구사해왔다.
비박은 이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물러난 이정현 지도부를 대체해 앞으로 꾸려질 비상대책위원회 구성에 달렸다지만, 집단 탈당이나 분당 사태가 현실화할 가능성은 높아 보이지 않는다. 그동안의 패턴으로 보면, 친박은 탈당·분당을 최소화하려 ‘2선 후퇴 코스프레’를 하고, 비박은 타협안을 받아들이며 “끝까지 안에서 싸워보자”고 나설 공산이 크다. 궁극적인 당 쇄신의 지표가 될 ‘친박 청산’은 더더욱 쉽지 않다. 비박은 서청원·최경환·이정현 등 8명을 찍어 ‘당을 떠나라’고 선언했지만, 의원 제명은 당 소속 의원 3분의 2가 찬성해야 하기 때문에 스스로 탈당이나 정계은퇴를 선언하지 않는 한 1명도 정리하기 어렵다. 인적 청산의 벽에 도달하는 순간이 오더라도, 비박의 다수는 “아직 끝이 아니다”라며 당에 남을 것이다. ‘새누리당 해체’와 ‘보수 재건’이라는 비박의 외침은 재건축 수준이 아니라 페인트칠이나 리모델링에 머물 가능성이 높다.
그런 결말이 온다면 그 책임은 친박이 아니라 비박이다. 비박 인사들이 스스로를 향해 하는 말들을 적어둔다. “말로 메주를 쑤면 5천만을 먹여살릴 사람들”, “용기 부족을 명분 부족이라며 연명하려는 사람들”, “토사물이 입 한가득 차올라와도 꿀꺽 삼켜버리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