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어이가 없는 토론이다.”(홍준표 자유한국당 대선후보)
19일 서울 여의도 <한국방송>(KBS)에서 열린 19대 대선후보 초청 토론은 사상 첫 스탠딩 토론으로 주목받았습니다. 질문과 답변을 합쳐 각자 9분 동안 발언할 수 있는 ‘총량제’ 방식, 후보끼리 질문·답변을 주고받는 와중에 다른 후보가 끼어들어 발언할 수 있는 ‘난상토론’이기도 했습니다.
결과는 나빴습니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에게 질문이 몰렸고, 케케묵은 ‘색깔론’이 다시 등장했습니다. 선명한 정책 대결보다는 꼬투리 잡기, 네거티브 공세가 이어졌습니다. 특히 “어이없는 토론”이라고 혼잣말을 한 홍 후보는 스스로가 ‘어이없는 토론’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토론은 ‘말의 성찬’이지만 때론 스치는 눈빛과 손짓 하나가 많은 것을 보여줍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뇌물’ 의혹을 또 꺼내든 홍 후보를 쳐다보는 문 후보의 표정, 후보 사퇴 가능성을 묻자 큰 동작을 써가며 부인하는 유승민 바른정당 대선후보의 모습 등이 대표적입니다. 23일 열리는 3차 TV토론에서는 더 나은 모습을 기대하며 2차 TV토론 후보별 ‘피꺼솟’(피가 거꾸로 솟는다는 말의 줄임말) 장면을 추렸습니다.
■ 홍→문 “만약 노 대통령이 640만달러 안 받았으면 왜 극단적 선택을?”
홍 후보는 지난 2월 “지금 민주당 1등 하는 후보는 자기 대장이 뇌물 먹고 자살한 사람”이라고 말해 큰 논란을 불렀습니다. 3월6일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땐 진행자가 사과 의사를 묻자 “뭘 사과를 해”라며 거절했습니다.
홍 후보는 1차 토론에 이어 2차 토론 초반부터 다시 이 이야기를 꺼내 들었습니다. 홍 후보는 1차 토론 당시 문 후보가 “(뇌물 관련 발언) 책임지셔야 한다”고 한 말을 두고 “사실이 아니면 후보 사퇴하겠다. 사실이면 (문 후보는) 어떻게 할 것이냐”며 공세를 이어갔습니다.
이 외에도 국가보안법 폐지, 북한인권결의안 기권 등 ‘색깔론’ 공세를 펼친 홍 후보에게 문 후보는 “나라를 이렇게 망쳐놓고 언제까지 색깔론 할거냐”며 반박했습니다. 한창 질문과 답변을 이어가던 중 홍 후보는 뜬금없이 지도자의 ‘자질’을 언급하며 “만약 노무현 대통령이 640만달러 안 받았으면 왜 극단적 선택을 했겠냐”고 윽박질렀습니다. ‘극단적 선택’이라는 단어가 나오고 난 뒤, 문 후보는 더는 대꾸 없이 홍 후보를 물끄러미 바라봤습니다. ‘정치적 동지’인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아픈 기억까지 끄집어낸 홍 후보에 대한 문 후보의 심정이 느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 홍→안 “왜 선거 포스터에 당명을 안 썼나”
최근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후보는 선거 포스터 합성 논란으로 곤욕을 치렀습니다. 여타 후보들과 달리 그의 포스터에는 당명도 없습니다. 이를 놓칠 리 없는 홍 후보, 안 후보에게 ‘가벼운 질문’이라며 “포스터에 왜 당명이 없냐”며 물었습니다.
안 후보는 “선거 포스터 70%가 초록색(국민의당 상징색)이다. 당 마크도 있다”며 반박했습니다. 홍 후보를 위한 ‘맞춤식’ 설명도 덧붙였습니다. “나이키(운동용품 브랜드)를 누가 나이키라고 쓰냐”는 것이죠. 직접적인 이름 없이 상징으로도 충분하다는 뜻이겠지요. 안 후보는 손짓으로 직접 ‘나이키’ 상징을 그려 보였습니다.
■ 문→홍 “경남에서도 제대로 못 했다 평가받는다”
홍 후보는 2차 토론에서 “자유한국당은 이제 ‘박근혜의 당’이 아니라 ‘홍준표의 당’이 됐다”며 박근혜 정부의 실패를 계승하는 것을 거부하는 모양새를 취했습니다. 박근혜 정부를 탄생시킨 ‘원죄’ 추궁을 처음부터 차단하겠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이에 문 후보는 홍 후보에게 “경남지사까지 하셨는데 12일 재보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이 경상남도에서 10석 중 6석을 승리했다. 경남에서도 홍 후보가 제대로 못 했다 평가받는 것 아니냐”고 맞받아쳤습니다.
의외의 공격 포인트였을까요. 홍 후보는 고개를 세게 저으며 “그건 아니다”고 말했습니다. “대구에서도 안철수 후보보다 못하다”는 문 후보의 말에는 “지금은 훨씬 내가 나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드러냈습니다.
■ 문→유 “바른정당에서 사퇴 요구하는 기막힌 일이…”
유 후보 ‘사퇴론’은 그가 몸담은 정당 안에서 나왔습니다. 그 자체로 유 후보는 ‘피가 거꾸로 솟는 심정’이겠지요. 문 후보는 유 후보에게 “이번 대선에서 제일 기막힌 일은 바른정당에서 유 후보에게 사퇴 요구를 하면서 안철수 후보를 다 함께 지지·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유 후보는 “후보 사퇴는 전혀 없다. 안철수 후보하고 그런 이야기 오간 적도 없다. 후보 사퇴할 일 전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답했습니다. 유 후보는 아무 걱정하지 말라는 듯, 문 후보를 향해 손을 아래위로 움직였습니다.
■ 홍→심 “세게 보이려고 한 말인데, 하하하하”
홍 후보는 갖가지 막말로 연일 논란을 만들고 있습니다. 17일 방송된 한 방송사 모바일 콘텐츠에 출연해서는 “집에서 설거지를 하느냐”는 질문에 “설거지를 어떻게 하느냐”고 반문한 뒤 “하늘이 정해놓은 것인데 여자가 하는 일을 남자에게 시키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이를 안 후보가 지적하고 “사과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자 홍 후보는 “내가 스트롱맨 아니냐. 세게 보이려고 그런 말을 했다”며 웃어넘기려 했습니다. 유일한 여성인 심상정 정의당 대선후보가 제동을 걸었습니다. 심 후보는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여성을 종으로 본 게 아니면 그런 말 못한다. 대한민국 모든 딸에게 사과하라”고 다시 요구했습니다. 여전히 웃어넘기려는 홍 후보의 미소 띤 얼굴과 정색한 심 후보의 얼굴이 크게 대비됐습니다.
홍 후보는 “그걸 사과하라고 하면 어떻게 하냐”고 다시 거부했지만, 유 후보의 협공이 더해지자 ‘떠밀리듯’ 사과했습니다.
글 이유진 기자 yjlee@hani.co.kr 그래픽 강민진 디자이너 rkdalswls3@hani.co.kr, 영상 한국방송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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