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한국당 의원들이 23일 오전 박근혜 전 대통령의 첫 공판을 앞두고 열린 원내대책회의가 시작되기에 앞서 일제히 관련 뉴스를 검색하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문재인 대통령이 파격 인사와 각종 개혁조처, 탈권위적 행보로 국민들에게 감동을 선사하며 ‘정권 교체’가 ‘세상 교체’임을 실감하게 하고 있다. 승자의 계절이 무르익는 사이, 패자들은 조용히 패배를 복기하고 있다. 국민의당은 25일 박주선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임시 지도부를 세우고 대선평가위원회를 꾸려서 대선 패인을 짚어보기로 했다. 대선 후보였던 안철수 전 대표는 대선 백서 발간을 제안한 바 있다. 바른정당은 대선 직후인 15~16일 국회의원과 원외 당협위원장 연석회의를 열고 ‘개혁보수 독자노선’을 다짐했다. 대선 후보였던 유승민 의원은 대선 때 도와줬던 이들을 만나며 감사인사를 하고 있다. 정의당 심상정 대표도 지지자들을 만나는 ‘약속투어’를 하고 있다. 정의당은 지역별로 평가 작업을 진행한 데 이어, 다음달 3일 전국위원회에서 대선 패배를 점검하고 향후 노선을 논의하는 토론을 벌일 예정이다.
그런데 대선에서 24%의 득표로 2위를 한 제1야당 자유한국당은 움직임이 더디다. 대선 패배에 책임지는 행동은 이철우 사무총장이 사퇴한 게 전부다. 패배를 곱씹어보자는 얘기는 건너뛴 채 당권 대결로 치달으면서 또 해묵은 친박-비박 싸움이다. “탄핵 때 바퀴벌레처럼 숨어 있다가 슬금슬금 기어나오는 자들”(홍준표 전 경남지사)-“낮술 드셨나? 탄핵 때 본인은 어디에 있었나”(홍문종 의원) 설전만 선명하다. 자유한국당은 뒤늦게 이달 30일 토론회, 6월1~2일 국회의원과 원외 당협위원장 연찬회를 열어 대선 패배를 분석하고 진로를 모색할 예정이지만 이 또한 7·3 전당대회를 앞둔 당권 대결 전초전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다.
자유한국당은 대선 패배를 되짚어보는 백서를 펴낼 계획도 없다고 한다. “왜 졌는지는 우리 모두 다 안다. 백서를 내다 보면 누군가를 특정해야 하고, 또다른 당 분란만 일으킬 뿐”이라고 당 핵심 관계자는 말한다. 자유한국당이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진 것인지 다 알면서도 콕 찍어 공식 기록으로 남기기 어려워하는 점은 전신인 새누리당이 지난해 4·13 총선 뒤 펴낸 <국민백서>에서 확인된 바 있다. 당시 백서는 일반인, 전문가, 당직자, 언론인 등의 입을 빌려 “불통 정부와 거수기 여당”, “공천파동의 쓰나미” 등을 총선 패배 원인으로 꼽으면서, “수평적 당청 관계”, “친박-비박 갈등 해소” 등을 해결과제로 제시했다. 하지만 이 백서에서는 놀랍게도 책임 당사자로서의 ‘박근혜’ 이름 석자를 찾을 수가 없다. “대통령”, “청와대”라는 표현으로 에둘렀을 뿐이다. 그때라도 박근혜 전 대통령과 맹목적 친박을 핵심 책임자로 명시하고 정풍운동이라도 벌였다면 탄핵 사태까지는 가지 않았을 수도 있다.
대통령이 파면당하고 정권이 교체됐어도 자유한국당은 여전히 박근혜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선 때 홍준표 후보는 “탄핵은 인민재판이었다”며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부정하면서 강경보수층 결집에 열을 올렸고, 자유한국당은 대선 뒤에도 탄핵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그나마 자유한국당에 표를 몰아준 대구(45%)·경북(49%)을 비롯한 강경보수 지지층에 묶여 옴짝달싹 못 하는 모습이다. 국민 대다수, 특히 20·30·40대가 자유한국당을 ‘박근혜당’으로 여기며 완전히 등돌렸는데도 말이다.
자유한국당에 새로운 리더십을 세우는 과정은 박근혜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박근혜와 절연하고 불통, 무능, 권위주의, 헌법 무시, 권력 남용과 같은 박근혜 유물과 결별해야 비로소 ‘새로운 보수 가치’에 대한 논의도 가능하다. 박근혜와의 관계, 탄핵에 대한 입장, 친박 문제를 이번에도 명확히 정리하지 못한다면 107석 자유한국당은 ‘바퀴벌레-낮술’ 논쟁의 무한궤도에 갇혀 서서히 죽어가는 공룡이 될 것이다. 불행히도, 그걸 해낼 자격과 능력을 동시에 갖춘 사람이 잘 안 보인다. jayb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