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4월 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 회원들이 서울 용산구 사무실에서 ‘출신학교 차별 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국민운동 출범식을 열고 법 제정을 찬성한다고 쓴 손팻말을 들어보이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권력 실세의 채용 청탁, 이사장의 부당 지시, 자기소개서와 어학 점수 조작, 그걸로도 모자라 서류전형 합격자 증원, 외부 면접위원의 반대를 뒤집은 최종 합격. 공공기관 채용 부정의 종합판이다. 여기에 화룡점정이 하나 더 있다. ‘학력제한 없음’이란 채용공고와 달리 출신학교까지도 자의적 등급에 따라 최대 10점의 차별을 뒀다면? 나아가, 그런 사실이 없다고 발뺌까지 했다면? 정규직 평균 연봉이 7761만원으로 공공기관중 최상위권인 중소기업진흥공단(이하 중진공)이 그랬다. 불과 몇년전까지도 학력차별을 넘어 학교차별이라는 퇴행적 구태를 은밀히 실행해온 것.
중진공이 2012~13년 새 세 차례 신입공채에서 모두 4명을 외부의 청탁 또는 압박으로 부정채용하는 과정에서 국내 응시자들의 출신 대학과 전공 분야에도 최저 5점에서 최고 15점까지 점수를 세분해 차등 부여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런 사실은 26일 <한겨레>가 단독입수한 중진공 내부 문건 ‘2013 하반기 신입직원채용 서류전형 기준(안)’으로 처음 확인됐다. 앞서 지난달 중진공은 “2013년 채용 때 대학별 점수표 제작 기준 및 활용 여부를 묻는 이찬열 의원(국민의당)의 서면 질의에 모두 ‘해당사항 없음’이라는 답변을 내놨다. 거짓이었다.
중진공은 당시 일반 행정직과 기술직, 스펙초월소셜리크루팅(행정) 등 3개 부문의 공채를 하면서, 응시 자격에 ‘기술직은 전문학사 이상 학위, 행정직은 학력 및 연령 등 제한 없음’이라고 모집요강에 명시했다. 그러나 뒤로는 임의로 정한 출신대학의 등급에 따라 15점부터 최저 5점까지 차별한 점수를 부여했다.
중진공은 정부의 출연·출자 또는 재정지원으로 설립돼 운영되는 공공기관이다. 2017년 현재 평균 근속기간 14.5년, 평균 연봉이 7761만원에 이른다. 2013년 하반기 채용시험에는 36명 모집에 무려 8670명이 지원(경쟁률 241대 1)한 ‘꿈의 직장’이다. 그런데 국민 세금이 밑천인 준정부기관이 정작 채용에선 응시자들을 출신대학에 따라 1등 국민부터 꼴찌국민까지 11개 등급으로 나눠 차별 대우를 한 것이다.
‘2013 신입 채용 서류전형 기준(안)’으로 드러난 중진공의 학교차별은 깨알같이 촘촘했다. 전국의 4년제 대학 187개교를 다시 본교/분교, 주간/야간을 기준으로 257곳으로 세분한 뒤, 최고 15점부터 최저 5점까지 일일히 점수를 매겼다. 이른바 스카이(SKY) 등 최상위권 6개교는 만점, 중앙대·경희대 등 차상위권 7개교는 14점을 줬다. 비수도권에선 부산대·경북대 등 국립대와 영남지역 일부 사립대가 12점으로 최고였지만 대다수는 10점보다도 낮았다. 당시 ‘친박 실세’였던 최경환 자유한국당(전 새누리당) 의원이 청탁 압력을 넣은 지역사무소 인턴 출신 지원자는 학교점수가 12점이었으나 점수 조작으로 최고 15점으로 바뀌는 등 유력자들의 뒷심에 힘입어 바늘구멍을 뚫었다. 중진공의 학교차별은 외국 대학에까지 적용됐다. 보스턴대, 미시간주립대, 게이오대, 북경대, 국립모스크바대, 시드니대 등 세계 주요대학 72곳을 망라했는데, 학교점수는 모두 최하점인 5점으로 책정됐다. <한겨레>는 중진공 쪽의 해명을 들어보려 인재경영실에 수차례 전화했으나 간부급 책임자와 끝내 연락이 닿지 않았다.
중진공 최고위급 임원을 지내고 나온 김아무개씨는 “2013년 공채 때 인사팀 실무자로부터 수도권 대학과 지방대, 또 수도권에서도 서울 소재 대학과 아닌 곳으로 그룹을 나눠 점수에 차등을 둔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대학 차등제가) 언제부터인지 시점은 모르지만 2013년에 처음 만들어진 건 아니고 그 전부터 이어져온 관례(관행)였다. 채용 관련 임원회의에서 대학별 차등 점수제(의 문제점)에 대해 논의된 적은 없었다”고 덧붙였다.
공공기관의 학력, 학교 차별은 중진공 뿐 아니라 다른 기관에서도 공공연한 비밀이다. 기획재정부가 공기업의 ‘성별·신체·학력·연령 등에 대한 불합리한 제한’을 규정으로 금지한 때가 2010년, 국가인권위가 이들을 차별행위로 규정하기 시작한 게 2002년이지만 유명무실했다.
국립중앙의료원은 지난해 7월 간호직 신규 채용때 출신학교를 4개 그룹으로 나눠 학교 성적에 따른 선발 기준에 차별을 뒀다. 구체적으로, 서울시내 4년제 대학은 대학정원의 성적순 70%이내, 국립대는 성적 40% 이내, 경기도 및 7대 도시 4년제 대학은 성적 20% 이내, 지방 4년제 대학은 성적 10% 이내였다. 서울에서 멀어질수록 우수한 대학 성적을 요구한 셈이다.
수출입은행은 2011년부터 2013년 사이 신규 채용때 출신 대학교에 따라 0.8부터 1까지, 전문대와 고등학교는 각각 0.75와 0.7의 가중치를 두는 방식으로 학력과 학교를 차별한 사실이 감사원 감사로 적발됐다. 이 때문에 성적이 우수하고 변호사나 회계사 자격까지 갖춘 응시자들이 서류전형에서 억울하게 탈락한 반면, 최상위권 대학 출신 지원자들 상당수는 부당한 특혜를 누렸다. 예컨대, 2013년 하반기 채용에서 학교 가중치를 배제할 경우, 상위 6개 대학 출신의 서류전형 합격자 수는 450명에서 278명으로 38%나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일준 최현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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