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 조작 혐의로 특검의 수사를 받고 있는 ‘드루킹’ 쪽으로부터 뭉칫돈을 수수했다는 의혹을 받았던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가 23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목소리가 잇따라 올라왔다.
1980년대 노회찬 의원과 노동운동을 함께한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3일 낮 1시께 자신의 트위터에 글을 올려 “89년대 인천지역 민주 노동자연맹 활동을 하면서 부부간에 서로 형제처럼 지내고 내 자취방에 와서 하룻밤씩 같이 자면서 진보의 시대를 열어보자고 밤을 새웠던 회찬형, 돈 받았으면 대구역에서 할복하겠단 사람도 잘살고 있는데 이렇게 가시다니 황망하기 이를 데 없네요.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며 비통한 심경을 밝혔다.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인천지역에서 저와 노동운동을 함께했던 노회찬 의원께서 황망하게 떠나버렸다”며 “우리나라 진보정치의 보석 같은 큰 별을 잃었다”고 애도했다.
노회찬 의원과 경기고등학교 동창이자 오랜 친구인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까까머리 고등학생 시절’을 회상하며 그를 추모했다. 이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10대 소년들이 청춘을 즐기기에는 ‘10월 유신’으로 그 폭압성을 더해가던 박정희 철권 통치가 너무나 분노스러웠다”며 당시를 돌아봤다. 두 사람은 1학년이던 1973년 10월 유신 선포 1주년을 맞아 유신에 반대하는 유인물을 뿌렸다. 이 의원은 “(이후) 나와 그는 민주화 운동을 했던 대학생으로, 양심수와 변호사로, 도망자와 숨겨주는 사람으로, 운동권 대표와 정치인으로, 국회의원으로 관계는 달라졌지만, 한결같이 만났다”며 “더 좋은 세상을 만들자는 그 어렸던 시절 함께 꾸었던 꿈은 내 몫으로 남겨졌구려. 부디 평안하기를”이라며 ‘그리운 친구’를 기렸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는 과거 노회찬 의원과 구치소에서 맺은 개인적인 연을 소개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 교수는 23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노 의원을 “아주 보기 드문 사람이었다”고 평가했다. 이 교수는 “당시 구치소에 정치범이 너무 많아 징역 생활이 좀 ‘트여 있던’ 시기였다. 노회찬씨는 인사라도 하려 찾아가 보면 (항상) 문을 잠가놓고 있었다. 찾아오는 이들이 너무 많아 책을 제대로 볼 수 없어 일부러 부탁해서 잠근 것이라고 했다”고 썼다. 이 교수는 “흔히 자유와 구속을 대립시키지만 이를 보고선, 자유란 때로 더 강한 구속을 자처하면서도 가능한 것이구나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이 교수는 “정말 그릇이 크고 사유가 유연하며 유머 감각이 탁월한, 그러나 또한 삶이나 행동의 원칙이 분명한 사람이었다”며 안타까운 심경을 밝혔다.
박범계, 최재성, 박영선, 전재수, 박지원 등 동료 의원들도 현직 국회의원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안타까움을 드러내며 그의 영면을 빌었다.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정치가 뭐길래 그리 가십니까? 저하고는 KBS 토론이 마지막이었네요. 우리 세대의 정치 명인 한 분이 떠나셨네요. 큰 충격이고 참 가슴이 아픕니다. 이제 편히 쉬세요”라고 썼다.
김선수 대법관 후보 인사청문회 도중 노 의원의 비보를 접한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은 “노 대표의 인격상 무너져 내린 명예와 삶, 책임에 대해서 인내하기 어려움을 선택했겠지만 저 자신도 패닉상태”라며 “솔직히 청문회를 이어가기 어려운 상태”라고 밝혔다. 이재명 경기도지사도 트위터에 글을 올리고 “갑작스러운 비보에 참담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2016년 9월2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중앙계단에서 열린 ‘백남기 농민 사망 국가폭력 규탄 시국선언'에서 노회찬 정의당 의원(오른쪽)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누리꾼들은 ‘3선’ 의원이자 노동운동과 진보정치를 대표해온 노 의원의 삶을 돌아보며 그를 애도했다. 트위터 이용자 @Femo****은 2008년 1월28일 노 의원이 대표 발의한 ‘차별금지법’ 첫 번째 페이지를 찍은 사진을 올리고 “노회찬 의원은 17대 국회에서 차별 사유에 ‘성적지향’과 ‘성별 정체성’이 들어간 차별금지법을 국회에서 최초로 발의했던 정치인이었다”고 돌아봤다. 또 다른 트위터 이용자 @FROS****은 “노 의원은 늘 부당한 국가권력에 대항해, 억울한 노동자들과 힘없는 시민의 편에 섰던 사람이자 입담과 언변으로 진보정치의 의제를 대중에게 전하려 노력했던 정치인”이라며 고 백남기 농민 부검 영장을 강제로 집행하려는 경찰 앞을 막아섰던 노 의원 모습이 담긴 사진을 올렸다.
2007년 2월8일 오전 청와대 앞에서 노회찬 당시 민주노동당 의원이 엠네스티에서 양심수로 인정한 삼성일반노조 김성환 위원장의 석방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한편, 노 의원은 숨지기 전 남긴 3통의 유서에서 “2016년 3월 두 차례에 걸쳐 경공모로부터 모두 4천만원을 받았다”고 밝히면서도 “어떤 청탁도 없었고, 대가를 약속한 바도 없었다”고 덧붙였다. 다만 청탁과 대가가 없었지만 정치자금 수수 자체에 대해서는 ‘후회한다’는 말을 남겼다. 그는 “나중에 알았지만, 다수 회원들의 자발적 모금이었기에 마땅히 정상적인 후원절차를 밟아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고 적었다. 이에 대해 노 대표는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부끄러운 판단이었다”라고 후회했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 일부
노회찬 의원과는 개인적인 연이 있습니다.
구치소에서도 같이 있었고 징역 생활도 청주에서 같이 했지요.
<삶을 위한 철학 수업> 강연할 때 항상 드는 예인데
아주 보기 드문 사람이었습니다.
감옥이란 자유를 제한하는 구속의 공간이죠.
그래서 누구나 닫힌 방의 숨막히는 공간에서 나오려 애쓰는데
그래도 그 당시 구치소는 정치범이 너무 많아(300명 이상)
징역 생활이 좀 '트여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노회찬 씨는 인사라도 하려 찾아가보면
문을 잠가놓고 있는 겁니다.
하여 문을 또달라고 할까요 물어보면
그러지 말라고, 자기가 일부러 부탁해서 잠근 거라는 겁니다.
이유를 물으니
구속되기 전엔 보고 싶은 책이 많아도 시간이 없어 못 보았길래
구속되면서는, 이젠 책 좀 실컷 봐야지 했답니다.
그러나 징역이 트여있는 덕에
찾아오는 이들이 너무 많아 책을 제대로 볼 수가 없더랍니다.
그래서 일부러 잠가 놓고, 닫힌 문 앞에서 얼른 돌아가게 하려는 것이라는 겁니다.
흔히 자유와 구속을 대립시키지만
이를 보고선, 아, 자유란 때로 더 강한 구속을 자처하면서도 가능한 것이구나 생각했습니다.
책을 보는 자유를 위해 방문을 잠그는 구속을 자처한 것이니까요.
마치 자유인이 되기 위해 문을 잠그는 무문관 수행자들 처럼.
자유란 그런 점에서 능력이라고,
능력만큼 자유로운 것이라고 하는 얘기를 무엇보다 설득력있게 보여주는 사례였습니다.
저는 사실 그 얘기를 듣고 나서도
교도관에서 방문 좀 잠가달라고는 하지 못했습니다.
좁은 공간의 제약은 생각보다 큰 스트레스인지라...
그런 점에서 노회찬 씨는 정말 드문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그릇이 크고 사유가 유연하며
유머감각이 탁월한,
그러나 또한 삶이나 행동의 원칙이 분명한....
강연료라는 말에 호의로 알고 받은 돈이
정치사기꾼의 돈이었을 줄이야....
이런 일로 이런 분이 세상을 떠났다니 너무 안타깝습니다.
무심코 엎어쓴 흙탕물마저 견디지 못하는 고결함이 차라리 원망스럽습니다.
회찬이 형,
슬프고 안타깝습니다.
해주셔야 할 일이 많았는데요....
가신 곳은 어떤가요?
거긴 잠글 방문이 없지요?
방은 넓은 가요?
책은, 읽으실 책은 충분한가요?
형의 재기넘치는 유머에 웃어줄 분들이 많이 있나요?
형이 사랑했던 노동자들도 많이 있겠지만,
악수할 때마다 대하는 징그런 웃음의 정치인들도 있겠지요?
먹먹한 마음이, '명복을 빈다'는 말조차 상투적인 듯하여
적지 못하게 합니다.
감옥에서 함께 겪었던 사회주의의 붕괴를
가서 직접 눈으로 보자고 갔던 모스크바,
그 모스크바에서 정신나가도록 함께 마셨던,
뻬쩨르부르그행 기차표를 날려버렸던 그 보드카의 취기가 갑자기 들이닥칩니다.
다음날의 아주 힘든 그 숙취마저 그 취기를 따라 밀려들어옵니다.
덧없는 초혼의 외침이라도 외치고 싶은
미치게 더운 여름날입니다.
이유진 권지담 기자
yj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