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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내가 원하는 법안도 밀어주네…재미 입힌 ‘정치 스타트업’

등록 2018-08-01 05:01수정 2018-10-10 18:08

[정치BAR] ‘정치참여 플랫폼’ 창업

― 쇼핑하듯 입법 참여
“정당은 대기업…시민욕구 반영 느려”
IT·상상력 결합 ‘정치 스타트업’ 싹터
크라우드펀딩 통해 입법촉구 광고
후원자엔 법안 관련 기념품 제공
‘원하는 법안 구매’ 쇼핑몰도 추진

― 게임하듯 의회 체험
보드게임 만들어 정치과정 교육
무소속 출마 선거지원 컨설팅도
‘청소년 동물 해부 금지’ 첫 성과
투정이 지하철 2호선 강남역에 게시한 데이트폭력방지법 입법 촉구 광고(왼쪽)와, 후원자에게 제공한 휴대전화 케이스. 투정 제공
투정이 지하철 2호선 강남역에 게시한 데이트폭력방지법 입법 촉구 광고(왼쪽)와, 후원자에게 제공한 휴대전화 케이스. 투정 제공
정치를 ‘즐기는’ 시대가 오고 있다. 기성 정치 시스템 바깥에서 다양한 정치적 상상력을 구현하려는 이들이 움직인다. 이른바 ‘정치 스타트업’이다. 이들이 보기에 기존 정당이나 시민단체는 사회의 다양한 욕구를 반영하는 데 굼뜨다. ‘목소리’를 내고 싶어도 정치권의 벽은 높고, 내가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법안을 국회의원에게 전달하는 방법도 알 수 없다. 입법정보 누리집은 불투명하고 불친절하다.

그래서 나섰다. 누구나 정치를 좀 더 쉽고 재미있게 할 수 있도록. 마치 쇼핑하듯, 게임하듯.

■ “입법이 중요한데 왜 언론에선 잘 안 보이죠?” 31일 서울 지하철 2호선 강남역 12번 출구 앞에는 “8개월째 통과 안 되는 데이트폭력법, 의원들에게 심사를 촉구하고 싶다면?”이라는 대형 광고가 붙어 있다. ‘입법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을 표방하는 스타트업 기업 ‘투정’(to.정치)이 게재한 광고다. ‘투정’은 대학생 김예인씨가 지난해 봄 컴퓨터 프로그램 동아리에서 만난 동료 학생 2명과 의기투합해 시작했다. 자신이 지지하는 입법안에 일정 금액을 후원하면 후원금은 입법 촉구를 위한 광고 등에 쓰이고, 이와 관련해 기념 제작된 상품을 받는 방식이다. 투정은 지난 5월 주변에서 데이트 폭력을 겪은 사연을 듣고 데이트폭력방지법 입법 촉구를 위한 펀딩을 했다. 한달도 안 돼 669명이 920만원을 모금했다. 국회의원에게 전달된 전자우편 청원도 800건이 넘는다. ‘데이트폭력방지법 촉구’ 광고는 지난 4일부터 한달 동안 강남역 출구에 게시된다. 후원자에게는 성폭력 고발운동 지지 의미가 새겨진 휴대전화 케이스, 타투 스티커를 만들어 제공했다.

지난 20일 서울 서강대 캠퍼스 내 에스지엠(SGM) 랩에서 투정 김예인 대표(왼쪽 둘째)가 팀원들과 함께 회의를 하고 있다. 이경미 기자
지난 20일 서울 서강대 캠퍼스 내 에스지엠(SGM) 랩에서 투정 김예인 대표(왼쪽 둘째)가 팀원들과 함께 회의를 하고 있다. 이경미 기자
지난 20일 서강대에서 만난 김 대표는 투정 설립 계기에 대해 “입법은 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커서 중요한데, 언론에선 잘 다루지 않는다. 그래서 누구나 입법정보를 쉽게 파악하고 참여할 수 있는 서비스를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국회나 정부의 입법정보 사이트가 있지만 원하는 세부정보 검색이 잘 되지 않고 접근성이 떨어져, 직접 서비스 개발에 나섰다고 한다.

팀원들이 모두 20대인 만큼 펀딩할 법안도 20대가 관심 갖는 분야를 찾는다. 다음 프로젝트로 유기견 문제 해결을 위한 동물등록법 개정안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김 대표는 “우리의 관심사보다는 특정한 일로 어려움을 겪는 사연자를 발굴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입법안을 찾으려고 한다. 현재 소셜미디어를 통해 사연을 모집하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최근에는 크라우드펀딩을 조금 더 재밌게 하기 위해 플랫폼을 ‘법안 쇼핑몰’로 재단장하고 있다. ‘내가 원하는 법안을 쇼핑한다’는 개념을 적용하는 것이다. ‘법안 구매하기’를 선택하면 해당 상임위원회 의원들에게 청원 전자우편을 보낼 수 있고, ‘내 인생으로 배송하기’를 선택하면 입법 현황 구독 서비스와 디자인 상품을 배송받는 식이다. 김 대표는 “밀레니얼 세대가 자신의 삶에 밀접한 정치 과정에 즐겁고 쉽게 참여하도록 돕는 게 우리의 소셜 미션”이라고 말했다.

■ “정치는 게임이다!” 정치 문제를 창의적으로 해결해보겠다는 취지로 지난해 설립된 스타트업 ‘칠리펀트’는 정치교육을 쉽고 재밌게 할 수 없을까 고민하다 보드게임 3종을 만들었다. 의회정치, 대통령, 공직사회 세 종류인데, 각각의 게임을 통해 정치 과정을 모의 경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의회정치’ 게임은 참가자들이 국회의원 역할을 맡아 서로 협상을 통해 자신이 추진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점수를 쌓아가는 방식이다. 이 과정에서 상임위원회 등 국회의 역할, 입법 절차를 배운다. ‘대통령’ 게임은 대통령의 자질과 역할을 학습하도록, ‘공직사회’ 게임은 정부의 공직 종류와 직급을 파악하도록 설계했다. 박신수진(32) 칠리펀트 대표는 “토지 공유제를 주장했던 미국 경제학자 헨리 조지의 사상을 사람들이 알기 쉽게 보드게임 형태로 만들었던 ‘지주게임’에 착안해, 정치에 관한 기본 지식을 쉽게 알리고자 보드게임을 개발했다”고 말했다.

일부 학교에서는 방과후 수업 교재로 구매해 간다고 한다. 칠리펀트 직원들이 직접 학교에 나가 수업을 진행하기도 한다. 칠리펀트는 올가을에 사법체계, 정당정치, 국정운영 등 세 주제의 게임을 더 만들 참이다.

지난 18일 경기도의 한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의회정치 보드게임을 하고 있다. 칠리펀트 제공
지난 18일 경기도의 한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의회정치 보드게임을 하고 있다. 칠리펀트 제공
칠리펀트는 정치교육뿐 아니라 정치참여 사업도 벌이고 있다. 지난 6·13 지방선거에서 또 다른 스타트업 ‘폴리시브릿지’와 함께 무소속 출마자들의 선거를 돕는 온라인 통합지원서비스 ‘첼렉션’을 운영했다. 후보들의 표어, 홍보 문구를 비롯해 공약·정책, 선거운동 전략 등을 컨설팅했다. 비록 당선자는 배출하지 못했지만 칠리펀트는 첼렉션의 가능성과 취지를 살려 앞으로도 계속 운영해나갈 계획이다.

■ 시민 힘으로 이룬 ‘동물 해부 금지법’ 국회의원 비서관 출신 이현승(36)씨가 만든 ‘폴리시브릿지’는 캠페인을 하려는 사람이면 누구나 같은 뜻이 있는 동료를 찾고 서명운동·입법청원·펀딩을 할 수 있는 플랫폼 ‘폴박스’를 운영한다. 국회 근무 당시 미세먼지 문제를 고민하는 시민들이 캠페인 시작이나 입법 절차, 국회에 의견을 전달하는 방법을 잘 몰라 어려워하는 걸 보고 이 서비스를 개발했다. 캠페인이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입법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이 대표가 가진 국회 경력을 최대한 활용한다. 2년 전에는 몇가지 법안을 사이트에 올려놓고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법안을 입법 추진하기로 했는데, 청소년 동물 해부 실습을 금지하는 동물보호법 개정안이 1등을 했다. 이후 홍의락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해당 법안을 발의했고 지난 3월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현승 대표는 “시민들이 정치에 대한 관심과 참여 욕구가 높다. 다만 방법을 잘 모르는 경우가 있는데, 이들에게 적절한 서비스를 제공해 정치를 이들 앞에 가져다 놓고 싶다”고 말했다. 폴리시브릿지는 이외에도 정책자문, 입법정보 개발 등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계획이다.

폴리시브릿지 대표 이현승(가운데)씨가 지난 1월 서울 마포구의 한 서점에서 6·13 지방선거에 출마하려는 이들에게 선거전략 등을 강의하고 있다. 폴리시브릿지 제공
폴리시브릿지 대표 이현승(가운데)씨가 지난 1월 서울 마포구의 한 서점에서 6·13 지방선거에 출마하려는 이들에게 선거전략 등을 강의하고 있다. 폴리시브릿지 제공
■ “시민에게도 자격이 필요하다” 이들 외에도 토론 커뮤니티 플랫폼 ‘빠띠’, 일상생활의 사소한 변화를 모색하는 정책개발 모임 ‘시민이 만드는 생활정책연구원’ 등 다양한 형태의 단체가 기성 정치 밖에서 정치참여 모델을 만들고 있다.

정당이나 시민단체에서도 비슷한 활동을 할 수 있을 텐데 굳이 별도로 하는 이유는 뭘까? 폴리시브릿지 이현승 대표는 “거대 정당에 있으면서 대기업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때그때 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했다”며 “새로운 기술과 서비스를 공부해 빠르게 정치에 적용해보기 위해 국회 밖으로 나왔다”고 했다.

이들의 활동은 기존의 진보·보수 이념에 구애받지 않는다. 박신수진 칠리펀트 대표는 “흔히 새는 좌우 날개로 난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 전에 왜 날아야 하고 어떻게 날아야 하는지 아는 게 먼저라고 생각한다. 시민에게도 자격이 필요하다는 게 우리의 철학”이라고 말했다. 이경미 기자 km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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