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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젊은 이희호의 별명은 독일어 ‘다스’…다시 보는 이희호 평전 10장면

등록 2019-06-11 14:16수정 2019-06-11 21:01

2015년 4월~2016년 11월까지 ‘한겨레’ 장기 연재
‘이희호 평전-고난의 길 신념의 길’ 속 주요 장면
11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이희호 여사의 빈소 모습. 이 여사는 지난 10일 오후 노환으로 별세했다. 연합뉴스
11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이희호 여사의 빈소 모습. 이 여사는 지난 10일 오후 노환으로 별세했다. 연합뉴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이자 여성운동가·민주화운동가로 평생을 보낸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이 10일 별세했다. <한겨레>는 2015년 4월부터 2016년 11월까지 이희호 이사장의 일생을 그리는 ‘이희호 평전-고난의 길 신념의 길’을 80차례 장기 연재했다. 100년 가까이 여성 권리 신장, 민주주의 회복, 한반도 평화 구현을 향한 투쟁으로 일관했던 이희호 이사장의 일대기 속 주요 장면을 꼽아봤다.

1. 김대중과 만나기 전에도 이희호는 주목받는 사회운동 지도자였다

이희호의 삶은 김대중의 존재와 떼려야 뗄 수 없이 얽혔다. 그러다 보니 이희호 자신보다는 ‘김대중의 부인’으로 더 알려졌다. 그러나 김대중과 만나기 전에도 이희호는 주목받는 사회운동 지도자였다. 이름이 나는 데 굳이 김대중이라는 존재에 빚질 이유가 없었다. 미국에서 유학한 유망한 사회학 연구자로서 대학 강단에 섰고, 여성문제연구회의 창립을 주도했으며,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YWCA)연합회 총무로서 여성기독운동을 이끌었다. 총무로 취임해 활동한 4년 동안 이희호는 여성운동의 새 장을 열었다. 이 나라 여성인권운동 성장의 중심에 이희호가 있었다.

이희호와 김대중을 잘 아는 사람들은 ‘이희호가 없는 김대중을 생각할 수 있는가’ 하고 자주 물었다. 동행자 이희호가 없다면 정치인 김대중도 있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생전의 김대중 자신이 그런 생각을 가장 분명하게 표현한 사람이었다. 김대중은 1983년 미국 망명 시절 샌프란시스코에서 강연하던 중 이렇게 말했다. “아내가 없었더라면 내가 오늘날 무엇이 되었을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내가 여러분과 함께할 수 있는 것은 내 아내 덕분이고, 나는 이희호의 남편으로서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나는 그것이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2. 이희호에게 따라붙었던 별명, 독일어 중성 관사 ‘다스’(das)

1942년 이화여자전문학교(이화여대 전신) 문과에 입학한 이희호는 일제 강점 말기의 혼란 속에서 2년 만에 강제로 졸업한 뒤 충남 예산에서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원으로 일하다가 다시 배움의 길을 찾아 1946년 서울대 사범대에 입학했다.

해방 직후 가족과 함께 서울로 올라온 이희호는 일제로 인해 이화여전 2년 만에 강제로 마쳐야 했던 대학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1946년 9월 서울대 사범대 영어과에 입학한 이희호는 3학년 때 교육과로 전과했다. 사진은 1949년 교정에서 교육과 교수·동기들과 함께한 모습으로, 맨 뒷줄 왼쪽이 이희호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해방 직후 가족과 함께 서울로 올라온 이희호는 일제로 인해 이화여전 2년 만에 강제로 마쳐야 했던 대학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1946년 9월 서울대 사범대 영어과에 입학한 이희호는 3학년 때 교육과로 전과했다. 사진은 1949년 교정에서 교육과 교수·동기들과 함께한 모습으로, 맨 뒷줄 왼쪽이 이희호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대학생 이희호는 혼자 공부에만 몰두하는 유형이 아니었다. 피천득의 회고에서도 얼핏 드러나듯이 이희호는 사범대 여학생들의 리더 구실을 했다. 그 시절 이희호에게 따라붙었던 별명이 독일어 중성 관사 ‘다스’(das)였다. 행동만 봐서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나는 걸음걸이가 빠르고 행동이 남성적이었어요. 그래서들 ‘다스’라고 불렀지요.”

그 시절 이희호와 남학생들의 관계를 보여주는 말이 ‘누님’이다. 남학생들은 너나없이 이희호를 누님이라고 불렀다. 다른 학생들보다 나이가 많기도 했지만 거침없고 활기 넘치는 태도로 일마다 앞장서는 것이 누님다웠다.

3. YWCA 총무 이희호가 제안한 첫 캠페인 ‘혼인신고를 합시다’

대학 졸업 뒤 한국전쟁을 맞아 이희호는 피란길에 올랐다. 부산에서 피란 생활을 하면서 1952년 당시 여성계 지도자였던 황신덕·박순천·이태영과 함께 여성문제연구원을 창립했다. 이희호는 이 연구원의 상임간사를 맡아 여성들의 인권을 지키고 지위를 높이는 일에 몰두했다. 여성문제연구원은 뒤에 여성문제연구회로 이름을 바꾸어 꾸준히 활동을 계속했고, 이희호는 1964년부터 1971년까지 2대 회장을 맡기도 했다. 여성문제연구원이 시작한 남녀차별 철폐운동은 1989년 가족법 개정으로 이어졌다.

이희호는 모교 이화여대 부총장이자 와이연합회 회장이던 박마리아의 권유로 1959년 1월부터 대한와이더블유시에이(YWCA·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 초대 총무를 맡아 1962년 5월 김대중과 결혼한 뒤 그해 12월 그만둘 때까지 꼬박 4년간 의욕적으로 활동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이희호는 모교 이화여대 부총장이자 와이연합회 회장이던 박마리아의 권유로 1959년 1월부터 대한와이더블유시에이(YWCA·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 초대 총무를 맡아 1962년 5월 김대중과 결혼한 뒤 그해 12월 그만둘 때까지 꼬박 4년간 의욕적으로 활동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59년 1월3일부터 이희호는 대한와이더블유시에이연합회 총무로 출근했다. 이희호는 총무로 취임하자마자 와이더블유시에이의 분위기를 확 바꾸었다. 사회운동가 출신답게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희호가 제안한 첫 캠페인은 ‘혼인신고를 합시다’였다. “당시엔 결혼을 하고도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사는 경우가 많았어요. 뒤에 첩으로 들어온 사람이 혼인신고를 하는 바람에 조강지처가 쫓겨나는 일이 비일비재했어요. 자식 낳고 살다가 하루아침에 빈손으로 집밖에 나앉는 거지요.” 이희호는 포스터를 만들어 전국의 지역 와이더블유시에이에 보내 붙이게 하고 띠를 어깨에 두르고 거리 캠페인에 나섰다.

4. “무일푼이지만 꿈이 큰, 이 사람을 도와야겠단 생각 들었다”

이희호가 김대중과 결혼하겠다고 결심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요약하자면, 김대중은 ‘도와야겠다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었다. 민주주의와 조국통일에 대한 큰 꿈을 품었으나 모든 것을 잃고 나락에 떨어진 사람이 그때의 김대중이었다. 이희호는 이 남자의 꿈이 꿈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 사람을 도와야겠다’ 그것이 이희호를 움직인 생각이었다. “이 사람을 도우면 틀림없이 큰 꿈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들었지요.”

1962년 5월10일 이희호는 정치인 김대중과 결혼했다. 결혼식은 조향록 목사(맨 뒷줄 신랑 신부 사이)의 주례로 서울 종로구 체부동에 있던 외삼촌 이원순의 저택에서 올렸다. 대청마루에서 혼례를 마친 뒤 정원에서 찍은 양가 가족 사진이 남아 있다. 앞줄 신랑 왼쪽에 앉은 이가 신부의 아버지 이용기, 신부 오른쪽에 앉은 이가 큰오빠 이강호다. 둘째 줄 맨 왼쪽에 선 이는 신랑의 비서 조길환, 그 옆 넥타이 맨 이가 신랑의 남동생 김대의이고, 맨 뒷줄 오른쪽 끝이 막내 동생 김대현이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62년 5월10일 이희호는 정치인 김대중과 결혼했다. 결혼식은 조향록 목사(맨 뒷줄 신랑 신부 사이)의 주례로 서울 종로구 체부동에 있던 외삼촌 이원순의 저택에서 올렸다. 대청마루에서 혼례를 마친 뒤 정원에서 찍은 양가 가족 사진이 남아 있다. 앞줄 신랑 왼쪽에 앉은 이가 신부의 아버지 이용기, 신부 오른쪽에 앉은 이가 큰오빠 이강호다. 둘째 줄 맨 왼쪽에 선 이는 신랑의 비서 조길환, 그 옆 넥타이 맨 이가 신랑의 남동생 김대의이고, 맨 뒷줄 오른쪽 끝이 막내 동생 김대현이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결혼 다음 해인 1963년의 일이다. 서울 동교동에 집을 사서 수리를 마친 어느 날, 외출했다가 돌아온 이희호는 대문에 문패가 두 개 걸린 것을 보았다. 김대중과 이희호의 이름이 각각 새겨진 문패였다. 김대중이 자기 이름의 문패를 주문하다가 문득 아내가 생각나 아내 이름의 문패도 함께 주문했던 것이다. 남편이 집안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에 부부 문패가 걸린 대문은 낯선 풍경이었다. 김대중의 회고다. “(부부 문패를 단 건) 아내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발로였다. 그런데 막상 그렇게 하고 나니 문패를 대할 때마다 아내에 대한 동지의식이 자라났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감정이다.” 부부 이름이 새겨진 동교동 문패는 이희호와 김대중의 동반자 관계를 보여주는 상징물이 되었다.

5. “김대중이 대통령 돼서 독재하면 제가 타도하겠다”

1971년 ‘4·27 7대 대선’ 당시의 일이다. 이희호도 남편에 뒤지지 않는 강행군을 계속했다. “남편이 1진이라면, 나는 2진이었어요. 남편이 가지 못한 곳을 주로 다녔지요.” 이희호는 영동·장호원·논산·서산을 비롯해 전국의 소도시 수십 곳을 돌았다. 장터와 거리를 다니며 거칠고 투박한 손들을 잡았다. 이희호는 연단에 오르기도 했다. 남편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달라고 호소하며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제 남편이 대통령이 되어서 만약 독재를 하면 제가 앞장서서 타도하겠습니다.” 그 시절엔 후보 부인이 연단에 올라 연설을 하는 일이 드물었다. 사람들은 뜨거운 박수로 답했다.

1971년 대통령 선거 때 장충단공원 유세에 나선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71년 대통령 선거 때 장충단공원 유세에 나선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같은 해 8대 총선 때도 이희호는 따로 찬조 연설자로 뛰었다. “나에게 지원해 달라고 요청하는 지역구를 돌았는데, 꽤나 인기 있는 연사였어요.” 이희호는 청중들과 문답하듯이 연설했다. “여러분, 독재를 원하십니까?” “아니오.” “그럼 민주주의를 원하십니까?” “네.” 단순명쾌한 문장이 연사의 강단 있는 목소리에 실려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냈다.

6. 남산에 끌려간 이희호 “나도 동참할 수 있게 되어 대단히 영광”

1976년 김대중·문익환·윤보선·함세웅을 비롯한 재야인사들이 중심이 돼 박정희 유신정권을 비판한 3·1민주구국선언 사건 직후 이희호는 남편과 함께 남산 중앙정보부로 끌려갔다. 이희호는 수사관들을 향해 걸어가면서 태연하고도 결연하게 말했다. “민주 회복을 위해 많은 사람, 특히 젊은이들이 이곳을 거쳐 가는데 나도 동참할 수 있게 되어 대단히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이희호가 중앙정보부에 잡혀가 신문을 받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1976년 이른바 ‘3·1 명동성당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11명이 구속되고 7명이 불구속되자 그 부인들은 ‘양심범가족협의회’를 결성해 옥바라지와 석방운동에 나섰다. 사진은 76년 5월4일 첫 공판이 비공개로 열리는 바람에 참관도 하지 못한 가족들이 불구속 기소자로 법정에 섰던 이우정 교수한테서 설명을 들으려 기독교회관 식당에 모였을 때 모습이다. 왼쪽부터 고귀손(윤반웅 〃), 박순리(서남동 부인), 이우정, 이희호(김대중 부인), 박영숙(안병무 〃), 공덕귀(윤보선 〃), 박용길(문익환 〃), 김석중(이문영 〃). 뒷줄 맨 왼쪽 이종옥(이해동 〃)씨가 소장해온 사진이다.
1976년 이른바 ‘3·1 명동성당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11명이 구속되고 7명이 불구속되자 그 부인들은 ‘양심범가족협의회’를 결성해 옥바라지와 석방운동에 나섰다. 사진은 76년 5월4일 첫 공판이 비공개로 열리는 바람에 참관도 하지 못한 가족들이 불구속 기소자로 법정에 섰던 이우정 교수한테서 설명을 들으려 기독교회관 식당에 모였을 때 모습이다. 왼쪽부터 고귀손(윤반웅 〃), 박순리(서남동 부인), 이우정, 이희호(김대중 부인), 박영숙(안병무 〃), 공덕귀(윤보선 〃), 박용길(문익환 〃), 김석중(이문영 〃). 뒷줄 맨 왼쪽 이종옥(이해동 〃)씨가 소장해온 사진이다.
그 시절 이희호는 구속자 가족을 대변해 외국 언론에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우리는 각오하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남편들이 한 일은 양심적이고 애국적인 일이었습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당당히 일하다가 고난을 받고 있는 우리의 남편들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눈물을 흘리지 않을 것입니다.”

1979년 12월 8일 긴급조치해제에 따른 구속자석방과 아울러 당국의 ‘보호'에서 풀려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부인 이희호 여사와 함께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연합뉴스
1979년 12월 8일 긴급조치해제에 따른 구속자석방과 아울러 당국의 ‘보호'에서 풀려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부인 이희호 여사와 함께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연합뉴스

7. 국회 방청석에서 가족법이 통과되는 순간을 지켜보다

1989년 12월 이희호에게 뜻밖의 기쁨을 주는 일이 벌어졌다. 가족법 개정이었다. 이희호는 국회의원 부인들과 함께 국회에서 법안이 통과되는 순간을 방청했다. “가족법 개정은 내 평생 소원이었어요. 헌법은 남녀평등을 보장하고 있는데 가족법은 일제강점기에 틀이 만들어진 뒤로 거의 바뀌지 않았거든요. 내가 창설에 앞장섰던 여성문제연구소가 가족제도에 관한 민법 개정을 추진하고, 그 뒤에는 이태영 박사가 가정법률상담소를 이끌면서 여성단체들과 함께 개정 운동을 벌였어요. 그래서 1960년, 1977년 두 차례 손질했는데 여전히 남녀차별 조항이 많았어요. 여성들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아들, 손자에게까지 법률상 종속돼 있었지요.”

8. “김정일 위원장 첫인상은 풍문과 달리 명랑해 보였다”

2000년 6월13~15일 평양에서 분단 이래 처음으로 남북 정상이 만났다. 당시 이희호는 김정일을 찬찬히 관찰했다. “정확하고 풍부한 어휘로 말을 쏟아냈어요. 유머 감각도 있고요. ‘저 표현력을 어떻게 지금까지 감출 수 있었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아, 북한에는 선거가 없지’ 하고 자문자답하면서 혼자 웃음을 삼켰지요.”

2000년 6월13~15일 첫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방북 일정 동안 이희호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탐색했다. 이틀째인 6월14일 저녁 목란관에서 열린 환영만찬 행사에서 김 위원장과 건배를 하는 모습.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2000년 6월13~15일 첫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방북 일정 동안 이희호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탐색했다. 이틀째인 6월14일 저녁 목란관에서 열린 환영만찬 행사에서 김 위원장과 건배를 하는 모습.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이희호의 가슴에 문득 서러움이 번졌다. “만감이 교차했지요. 이렇게 짧은 시간에 올 수 있는데 남과 북의 정상이 만나기까지 반세기나 걸렸잖아요. 또 우리는 북한과 화해하고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 때문에 수십 년 동안 박해를 받았고요. 그래서 나도 모르게 서러운 마음이 들었지요.”

6월15일 평양을 떠나기 전 김정일이 주최한 송별 연회는 화기가 넘쳤다. “모두 일어나 손을 잡고 합창했지요. 기쁨과 슬픔이 뒤섞여 가슴이 뭉클했어요. 남편과 김정일 위원장도 손을 잡고 앞뒤로 흔들며 노래했지요. 나도 김정일 위원장 손을 잡았어요.”

9. 유엔 총회에서 여성으로 첫 기조연설을 하다

2002년 5월 8일 이희호 여사가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유엔 아동특별총회에 참석해 기조연설를 하는 모습. 연합뉴스
2002년 5월 8일 이희호 여사가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유엔 아동특별총회에 참석해 기조연설를 하는 모습. 연합뉴스
2002년 5월6일 이희호는 유엔 아동특별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했다. 8일에는 임시의장으로서 영어로 회의를 주재하고 기조연설을 했다. “어린이가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은 곧 평화롭고 번영된 인류의 미래를 만드는 일입니다. 지금도 수많은 어린이들이 빈곤과 학대, 영양실조와 에이즈에 희생되고 있습니다.” 이희호는 “우리의 아이들이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나 밝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나서자”고 촉구했다. 이희호에게 유엔특별총회는 뜻깊은 행사였다. “유엔총회에서 임시의장으로 회의를 주재하고 기조연설을 한 것은 여성으로서는 내가 처음이었다고 해요. 영광스러운 일이었지요.”

10. “내 양심에 비추어 일생을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

1997년 12월18일 제15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 뒤 승리가 확정되고 지지자들에게 인사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이사장. 한겨레출판 제공
1997년 12월18일 제15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 뒤 승리가 확정되고 지지자들에게 인사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이사장. 한겨레출판 제공
이희호는 지나온 삶을 돌아보았다. 20세기를 관통해 21세기에 이른 100년 가까운 삶이었다. “내 양심에 비추어 일생을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이희호는 자신이 여성운동가·민주화운동가로 기억되기를 바랐다. “여성의 인권을 존중하고 높이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남편과 함께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한길을 걸었다는 것을 기억해주었으면 합니다.”

이희호는 한국이 인권국가로 반듯하게 서는 날이 오기를 꿈꾸었다. “우리나라가 도덕적으로 모범이 되는 나라로 세계인에게 인정받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여유 있는 사람들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도와서 같이 잘사는 나라가 되면 좋겠습니다.”

이희호는 매일 기도했다. “남과 북이 서로 사랑하고 도와가며 살아가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유진 기자 y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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